지하철로 11분 혹은 도보로 15분이라면 즐거움이 더 많은 쪽으로
뉴욕에 도착한 당일에는 비가 하루종일 추적추적 내렸어요. 기대와 다르게 비 오는 뉴욕은 너무너무 춥고, 길에는 피하고 싶은 검은색 구정물 웅덩이가 많았답니다. 그래서 커피숍 안에 들어가 핫초코를 주문하고 몸을 녹이며 바깥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지요.
커피숍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 각자의 일에 빠져 여유로워 보였어요. 비가 언제 그칠지 걱정하는 저와는 달리요. 이 사람들은 바깥에 비가 오던, 날씨가 춥던 걱정 없이 본인의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는 궁금해졌어요. 무엇이 이들이 본인이 살고 있는 이 뉴욕이라는 도시를 즐기게 하는가에 대해서요.
그 이유는 구름이 개고 햇빛이 내리쬔 다음날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이방인인 저 조차도 자연스럽게 이 도시에 녹아들게 했어요.
호텔에서 나와 목적지를 향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이 거리는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는 가게들로 오밀조밀 구성되어 있었어요. 구글맵에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 보았더니, 지하철 옵션은 총 11분, 도보 옵션은 총 15분이었어요. 도보이용 루트를 살펴보니, 도보로 가는 길 주변에는 궁금해서 저장해 두었던 상점들이 있었어요. 저는 고민 없이 걸어가길 선택했어요. 저는 도보로 가는 길 안내를 켜놓고는, 지도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최종 목적지 방향만 익혀둔 후 이 골목, 저 골목을 선택하며 자연스레 이 거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지하철 11분과 도보 15분 이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거리 속의 많은 사람들은 즐거움이 많은 옵션을 선택할 거예요. 그리고 도보 15분의 옵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그 이후에도 목적지까지의 수많은 즐거움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네모네모로 이루어진 뉴욕에서 어느 골목을 선택하든, 목적지까지의 소요시간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거리에서 어느 골목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이 공간에서의 경험은 달라지며, 같은 neighborhood(동네)를 다녀왔더라도 사람마다 경험과 이야기가 달라져 이 공간의 매력은 무수해지는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예를 들어, 오전에는 A 쪽 길이 마음에 들어서 A 루트를 선택했다면,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 B 루트를 이용한다면 이 한 개의 공간은 한 사람에게 두 가지의 다른 경험을 하루에 선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뉴욕의 대표적인 로컬브랜드 르뱅베이커리 NOHO지점의 사진입니다. 뉴욕시티 내 모든 르뱅쿠키 매장에서는 이렇게 그 지점 neighborhood의 귀여운 약도 일러스트를 볼 수 있어요.
르뱅베이커리의 매장별 일러스트가 이러한 이용자들에게 골목골목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공간의 또 다른 산물이라고 느껴집니다. 르뱅베이커리의 일러스트들을 보면, 각 골목별 공간들이 나타내는 즐거움들을 볼 수 있답니다. 어느 지점들은 이 일러스트가 담긴 엽서를 손님들에게 제공하기도 해요. 저는 르뱅 East Village 지점에서 East Village 맵이 담긴 엽서를 받았어요. 이러한 걷기 즐거운 골목의 경험이 로컬브랜드로서의 독보적인 정체성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또한, 지하철 11분의 옵션은 걷기가 어려운 시민들에게는 경사로가 보장된 지하철 옵션을 보장하기도 합니다. 모든 뉴욕 시민에게 지하철 이용 접근성을 완전히 보장하기까지 아직 과제는 많이 남아있지만, 좁은 골목골목 속에서 도보와 거의 비슷한 시간을 보장하며 지하철역으로 내려갈 때 많은 지하철역이 엘리베이터와 경사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시민을 도시 속 경험으로 수용하는 데에 뉴욕은 많이 앞서있는 도시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접근성에 관련한 이야기는 추후 주제로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해요.)
어디를 가든, 반경 도보 30분인 공간 안에서 집을 나설 때, 혹은 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으로 향할 때 “날씨도 좋은데 걸어갈까?”라는 마음이 들었다면 우리는 걷기 좋은 도시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저는 이런 즐거움 가득한 거리를 넘어서서,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이 도보 30분 거리 안에서 해결되는 30분 도시, 30분 네이버후드(30 min city, 30 min neighborhood)과 같은 n분도시의 도시계획 컨셉들을 지지합니다.
걷는 즐거움으로 공간을 구석구석 누리게 하며, 온전히 자기만의 경험과 시간을 만들어주는 공간이 좋은 도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럼 이용자는 자연스레 본인이 살고 있는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와도, 날이 추워도 본인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카페 안 사람들처럼 말이죠.
많은 시민들이 걷기에 즐거운 도시가 많이 생겨나, 도시가 각자의 공간과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기를 바라며 오늘의 글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