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과 실행의 경계에서
“왜 어떤 일은 계획만 했을 뿐인데 이미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까?”
그녀의 다이어트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연애 6년과 결혼 10여 년, 그동안 다이어트를 하며 다양한 에피소드가 만들어졌고 그것들은 나에게 깨달음과 때로는 잔잔한 울림을 줬다. 많은 이야기들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으며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바나나, 식사가 될 수 있나?
원숭이 해에 태어나서인지 아내는 바나나를 애정하고 그래서인지 집에 바나나가 응급약처럼 상비되어 있다. 갑자기 공복이 찾아와 위급함을 느낄 때 요긴하다. 그래서 사놓은 바나나는 노란 껍질이 검게 변할 틈이 없다.
어느 날 아내의 친구가 집으로 놀러 왔다. 차를 마시면서 불현듯 찾아온 공복에 아내가 밥을 먹을까 잠시 고민했다고 한다. 점심을 먹기는 약간 일러 아내는 친구와 바나나를 하나씩 먹었다고 했다. 그러고 시간이 지나 점심 때까 되어 아내가 밥을 먹자고 하니 친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고 한다.
“우리 밥 먹었잖아, 바나나가 밥 아니었어?!”
아내가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며, 나에게 저녁을 먹으며 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내는 그 뒤로 여러 날 바나나를 먹을 때마다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이 하루에 네 끼를 먹는 ‘관리 안 하는 여자’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칼로리로 따지면 바나나 한 개는 100칼로리이니 한 끼 권장 600칼로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최소 6개는 먹어야 식사이다. 아무튼 날씬한 친구의 엄격한 다이어트에 아내는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곤약쥬스는 최고의 디저트?!
요즘 아내가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있어, 며칠 전 드디어 뭐 먹냐고 물었다. 나에게 먹어보라 말도 않고 먹는 것이 치사해 보였다. 다이어트를 위해 샀고 칼로리도 아주 적다고 제품 광고하듯 자랑했다. 그런데 얼굴 표정을 보니 정말 맛있어서 먹는 것처럼 보였다.
“아, 잠깐만 너 저녁 먹고 이걸 먹는 거야?”
그렇다. 아내는 밥 대신 먹어야 할 ‘공복 진정제’를 디저트로 먹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달라고 해서 맛보니 식후 간식으로 손색이 없었다. 용도의 재해석은 뇌의 고급 기능이고 유연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아내의 유연한 사고에 놀랐다. 이 일을 계기로 나도 틀에 박힌 생각에서 좀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최근에 아내가 곤약 쫀드기도 먹는 것을 봤다.
아들의 연어 볶음밥, 아내의 큰 그림?
아내가 저녁을 먹지 않게 다고 선언한 어느 저녁식사 때 일이다. 접시에 담긴 아들의 밥이 평소보다 수북해 보였다. 메뉴는 아내의 주특기 연어 볶음밥이었다. 놀고 있다 식탁에 앉은 아들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이런저런 반찬들을 챙겨주며 아들과 나란히 앉아있는 아내의 모습이 그날따라 보기 좋았다.
평소에 아들이 먹는 양에 비하면 오늘은 볶음밥 양이 좀 많다고 생각했는데, 기특하게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다. 그때 아들의 텅 빈 접시를 보며 중얼거리는 아내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웬일로 밥을 다 먹네!”
그렇다. 아내는 아들이 남길 줄 알았던 것이다. 남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애환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 ‘빅픽쳐’를 그렸던 것이다. 볶음밥에 들어간 연어는 너무 담백했고 밥은 평소보다 더 꼬들거려 아이가 음식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도(?)와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잠시 머뭇거리는 아내에게 살포시 곤약쥬스를 내밀었다. 나의 호의에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아내는 프라이팬에 조금 남은 연어 볶음밥을 쓸어 먹으며, 오늘 만든 음식이 유난히 맛있었다는 것에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좋지 않은 습관들을 고치기 위해 많은 계획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고치기 쉽지 않았다. 되돌아 보면 이것저것 계획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때가 많았다.
아내의 살 빼지 않을 결심들 (습관들)
튀김 음식을 먹을 때, 튀김옷을 더 좋아한다.
야채와 해산물을 최대한 먹지 않으려고 애쓴다.
주재료만큼 양념을 첨가하고 소스와 함께 먹는다.
단백질이 든 음식을 먹을 때 꼭 탄수화물도 챙겨 먹는다
기초대사량을 줄이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내가 노안(늙은 얼굴)이 될 결심들 (습관들)
강한 햇빛에도 자외선 차단을 위한 선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얼굴이 코팅되는 것이 불편하다.
얼굴이 갈라질 정도로 목이 말라도 물을 먹지 않는다.
식사 후에 소파에 앉아서 최대한 편하게 쉬어 소화가 되지 않게 한다. 식후 충곤을 즐긴다.
내 몸을 산화시킬 가공음식을 즐겨 먹는다. 소시지와 햄이 나의 최애 음식들이다.
계획하는 것 자체가 마치 실행한 듯한 느낌을 줄 때
한 철학자는 자신의 책에서 “혁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혁신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오은영 박사는 “부모, 특히 아빠들은 아이랑 놀아주는 상상만으로 마치 놀아줬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 부부가 세운 숱한 계획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다이어트를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이미 다이어트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고, 나의 좋지 않은 습관들을 고칠 계획으로 내가 이미 충분히 노력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하는 것이 삶을 바꿀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좋은 책을 읽고 명사의 강연을 듣고 난 뒤, 그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다. 물론 책을 읽는 순간이나 강연을 듣고 난 직후에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하지만 금방 휘발되어 버린 채 감동이 건설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휘발되는 감동을 포획하여 삶을 바꾸는 에너지로 쓰는 길이 무엇일지 고민해보니 글쓰기가 아닐까-라는 다소 진부한 결론이 나왔다. 배운 것을 복습하듯 글쓰기는 나만의 언어로 읽은 책과 강연을 재구성하는 대단히 복잡한 과정이다. 이를 통해 뇌 속에 생각 회로가 만들어져야 한다.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 없이 경험했으니 말이다. 많은 독서광들이 리뷰를 쓰며 자신의 내공을 키우는 것이 한편으로 이해되었다.
생각하고 계획한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힘이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