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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Sep 11. 2020

입술과 친밀함


1. 산책

아침 산책을 다녀오면 기분이 보송보송하다.  

해가 떠오르고, 물이 흐르고. 

동물들이 깨어나고, 집 밖을 나오는 사람들. 

편의점 연유라떼를 사서 열걸음에 한 모금씩 마시며 걸었다.  



2. 뤼스 이리가레

이원적 리듬들은 신체적 형상과 같은 구체적인 성적 차이의 내용들을 모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신체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의 패턴들을 규제한다. 말하자면 뤼스 이리가레가 성적 본질로 삼는 것은 신체의 형태나 그 형태가 갖는 기능들(월경, 출산, 수유 등)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비롯한 자연 전체에서 물질적 흐름의 패턴들과 시간성을 규제하는 리듬인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76쪽)



3. 입술의 기원

아인슈페너를 마시다가 입술이 두 개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윗입술이 아메리카노 위에 올려져 있는 휘핑크림을 부드럽게 받쳐주고 아랫잎술이 유리잔 끝부분에 밀착해서 중심을 잡아주면 두 입술 사이로 작은 틈이 만들어지는데, 그 상태로 유리잔을 기울여 조금씩 빨아들이면 적절한 비율로 섞인 휘핑크림-아메리카노가 마침내 입 속으로 쪼르륵 흘러들어와 입 안에 천천히 고이더라는 걸 문득 깨달은 것이다. 두 입술이 이런 섬세한 분업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실감하면, 잠깐이지만 우주의 작은 비밀을 나 혼자 알게 된 것 마냥 들뜨기도 한다. (유레카!) 입술의 존재 이유는 키스할 때도 체감할 수 있다. 체감하면서도 내 입술이 낯설어질 때가 있는 건 너와 나의 입술이 어떤 식으로 포개지고, 입술이 움직이는 강도와 속도는 어느 정도일 것이며, 혀는 어느 시점에 등장해서 입술을 어떻게 거들고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지(S? A? Z?), 우리 둘의 러닝타임은 어떻게 되고 마지막 커튼콜은 어떻게 장식할 것인지 미리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첫 키스를 할 때 단계마다 이루어지는 미세한 부분 동작들을 입술이 그럭저럭 해내는 건 멋지고 다행인 일이다. 그런 이유로 입술이 뇌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제2의 뇌일 수 있다는 것, 생을 거듭하며 저 나름대로 쌓아온 입술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도 세워보는 것이다.  



4. 뤼스 이리가레

뤼스 이리가레는 초월만큼이나 내재성을 강조하면서, 주체가 자신의 세계에 거주하면서 타자와의 조우를 통하여 자기 세계의 한계와 차이를 인식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자기 자신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는 자율성을 요구한다. 타자와의 친밀함은 타자와 주체 사이의 차이와 거리를 삭제하고 극복함으로써가 아니라 각자의 거주지와 각자의 차이를 보존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81쪽)



5. 휴머니즘

동물과 비교해서 사람의 사람다움을 논하는 말들은 진부하고, 한 물 갔고, 시대착오적이고, 피씨하지 못한 말이 되어가고 있어. 인간의 어떤 행동과 사고는 그 자체로 밑바닥이어서, 더이상 반면교사를 찾지 못하게 되었거든. 동물을 빚댄 비속어는 욕인지 칭찬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지. 휴머니즘은 휴먼과 이즘으로 쪼개어졌고, 수많은 이즘 중에서도 가장 곤경에 처한 이즘이 되고 있는 것 같아. 휴먼은 더이상 휴먼을 강조해서 얻을 것이 없어. '약속된 땅'이나 '미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던 짧은 역사는 휴먼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보이거나(기후변화) 보이지 않는 것들(바이러스)에 의해 급격히 와해되고 있어. 휴먼 이후의 세상, 종의 경계를 넘어 사고하고 살아가는 철학은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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