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생추어리'라는 행위자 네트워크
문탁네트워크 미학세미나에서 발표한 낭독극 '새벽(dawn)' 사전 에세이입니다. (2022.12.3)
관계적 예술과 미적 체험
- '새벽이생추어리'라는 행위자 네트워크
7월부터 새벽이와 만나고 있다. 새벽이는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로 지금은 새벽이생추어리에 살고 있다. 나는 새벽이를 돌보는 하반기 자원활동가(보듬이)로 지원해서 보듬이가 되었다.
새벽이를 처음 만진 날을 기억한다. 새벽이가 울타리 가까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손을 뻗어 새벽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거친 털의 감촉이 느껴졌고 새벽이 피부와 내 손 사이에 무언가 오고 갔다. 새벽이 냄새가 내 손에 배었고 처음으로 살아 있는 돼지의 냄새를 맡았다. 익숙한 냄새(고기 냄새)와 낯선 냄새(새벽이 냄새)가 동시에 감각되어 혼란스러웠다.
더운 여름 날 돌봄활동을 하다 보면 많은 것들이 내 몸에 들러붙는다. 나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온갖 존재들과 긴밀해진다. 그 존재들이 땀샘을 통해 내 몸 밖으로 나온 노폐물과 섞이고 반응하면 특유의 냄새가 만들어진다. 돌봄 후 귀갓길 지하철에서 하차하려고 일어난 줄 알았던 내 옆자리 사람이, 나와 멀리 떨어진 좌석으로 이동(피신)해서 앉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나는 부끄러움보다는 어떤 사이-존재(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로서 새로운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에 고양되었다.
보듬이 활동을 통해 다양한 인간, 비인간 존재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나는 종종 묘한 충만감을 느꼈다. 그런 감정은 특정한 순간에 분명하게 체감되는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에게 그 순간을 설명하다 보면 이게 다가 아닌데, 이걸로 충분하지 않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학 세미나를 하며 내가 경험한 예술적 아름다움, 미적 체험을 떠올렸을 때 나는 새벽이생추어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거기엔 예술가, 작품, 관람객, 전시/공연장으로 표상되는 예술적 주체가 없다. 그럼에도 거기엔 어떤 예술적인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새벽이생추어리로 맺어진 네트워크를 하나의 예술작품이자 예술행위로 볼 수 있을까? 활동에 참여하며 새벽이생추어리 네트워크에 부분적으로 결속된 내가 느끼는 순간 순간의 고양감, 충만감도 미척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물음들에 응답해줄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관계 미학
미술 비평가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의 미학>이란 책에서 9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예술적 실천들을 소개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예술의 각축장 위에서 행해지는 가장 생생한 부분은 상호작용적이고 상생적이며 관계적인 관념에 따라 전개된다."
그리고 인간 상호작용의 영역과 사회적인 맥락을 지평으로 삼는 예술을 '관계적 예술'이라 정의한다. 그는 현대미술 작품은 쭉 돌아봐야 할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경험해야 할 지속적인 시간으로서, 제한 없는 대화를 위한 통로이자 '사회적 틈'으로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회적 틈이란 일상생활과는 다른 자유로운 리듬과 상호인간적 교류를 만들어내는 지점이다.
부리오는 관계적 예술의 특성들(상호작용적, 상생적, 관계적, 지속적인 시간(경험), 제한 없는 대화, 사회적 틈)을 인간적인 것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범주로 제한해서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가 말한 관계적 예술을 인간 사회 밖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싶었다. 조경진은 <관계 미학 : 미학과 비평 사이>라는 논문에서 부리오의 관계미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사물 간의 하이브리드적 연결망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범주의 관계적 예술을 제안한다. 그리고 관계 미학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정의한다.
"관계적 예술은 그것의 미적 기능, 양태, 형식, 상징적 가치가 본질적으로 관계적 형식에 의존함으로써 성립하는 예술이며, 여기서 관계적 형식은 그 형식적 정합성이 그 형식을 구성하는데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들’ 간의 상호주관적인 관계로부터 창발적으로 발생하며, 동시에 또 다른 관계적 형식으로 열려있다(open-ended)."
자료를 찾으며 관계적 예술과 미학을 탈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갱신하려는 시도들이 반가웠다. 관계적 형식에 의존하는 예술, 모든 행위자들간의 상호주관적 관계로부터 만들어지는 예술은 창작자와 관람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작품은 물리적 대상보다는 관계적 형식에 더 크게 의존하며, 예술적 경험이 발생하는 곳은 전시장이나 공연장 밖의 장소까지 확장되는 것 같다.
‘인간과 비인간까지 포함한 상호주관적 관계에서 창발하는 예술!’
이러한 예술적 정의를 전제로 새벽이생추어리라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인간, 비인간 행위자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준비했다.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들, 관람자들까지도 또 다른 ‘관계적 형식’으로, 새벽이생추어리 네트워크의 부분적인 행위자로 결속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