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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릉빈가 May 19. 2022

감정쓰레기통이라 친구였다

처음부터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내가 전학을 갔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보며 지낸 건 1년 반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시대도 아니고 서로 맘만 있으면 연락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 소소한 일상을 주고 받으며, 나름 감정을 주고 받았다. 그런 시절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꼬이기 시작하더니 내가 정신 차렸을 때 그 애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걸 눈치채는데 정말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조짐은 보였던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생긴 건 그 친구가 직장을 다니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직장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푸념을 하거나 어려움을 토로했고, 나는 묵묵하게 들어주고 위로해줬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친구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친구가 부장이 어쨌네, 고객이 저랬네, 동료가 이랬네 하며 화를 내며 짜증을 쏟아낼 때 친구가 먼저 잘못했기에 생긴 문제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위로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역성을 들었다. 그리고 사람이란 자기가 잘못한 걸 알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친구도 그렇게 1시간이고, 2시간이고 하소연을 하고 난 후엔 '그래도 내가 좀 잘못하긴 했어'라고 자기반성(?)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는 안 그러면 되지. 고생했다'며 나름 훈훈한 마무리도 되었다.


어느 순간 이런 패턴이 고착화되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자기가 힘들고 열받을 때 연락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치부거리가 되거나 뒷말이 나올 것 같은 그런 말들을 나에게 쏟아냈다. 혹은 자기가 자랑하고 싶거나 칭찬받고 싶을 때 연락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면 잘난 척 한다고 눈 흘기거나 욕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 순수하게 축하해주고 칭찬해줬기 때문이다.



사실 이 관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방적 관계였단 것이다. 그 친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감정과 말을 받아들였지만, 그 친구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친구 말은 그랬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나 말하라고. 하지만 막상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면 귀찮음, 관심없음, 흥미없음, 지루함 등의 감정이 전화상인데도 확 느껴져서 말할 수 없었다.


또한 나는 그 친구가 전화가 오면 바로 받는 편이었고, 못 받았으면 꼭 전화를 했다. 그러면 친구는 바로 통화가 안 되어 서운하다고, 혹은 왜 이렇게 늦게 전화했냐며 화를 낸 적도 이따금 있었다. 문제는 그 친구는 내가 전화했을 때 그런 게 없었단 것이다. 그 친구는 내 전화를 받은 일이 정말 한 번도 없었다. 그 친구가 문자를 보내거나 카톡을 보냈을 때 나는 확인하는 대로 답장을 보냈지만, 그 친구는 내가 보낸 문자나 카톡에 답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보통 이런 관계가 되면 이상하다고 눈치를 챌 법도 한데 그런 와중에도 못 챈 것은 나는 대학생이고, 그 애는 직장인이란 것 때문이었다. 직장인은 출근하면 핸드폰 한 번 보기 힘들다, 대학생과 직장인이 어찌 같냐며 연락 빈도수가 같길 바라는 건 철없는 생각이란 등의 이야기를 TV 같은 곳에서 많이 듣고 보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일하느라 바빠서 그런가 보다~'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때때로 그 친구는 정말 울면서 혹은 절절하게 "진짜 친구는 너 밖에 없어. 다른 애들은 다 가짜야. 내가 이렇게 힘들 때 아무도 전화 안 받고 그러는데 넌 달라. 진짜 내가 너한테 잘할게. 내가 앞으로 너한테 정말 잘할 거야."란 말들을 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눈치챈 건 대학을 졸업하고나서다. 그래서 몇 번 그 친구에게 대놓고 말한 적이 있었다. 너는 내 연락을 받지도 않고, 날 궁금해 하지 않으면서 너 힘들 때만 날 찾지 않냐고. 너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위로해줄 존재가 필요한 것뿐 아니냐고 했는데 또 그 친구는 쿨하게 인정했다. 네가 한 말이 맞고 자기가 그런 경향 있는 거 안다면서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항상 '앞으로 내가 잘할게'란 말도 붙어왔다.


하지만 더는 이 관계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을 할 때쯤에 연락이 자연스럽게 두절됐었다. 서로 연락하지 말자고 한 것도 아닌데 한 마음인 것마냥 2-3년 정도 연락 안 하고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관계가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그 친구가 전화를 했다. 다시 연락하고 잘 지내보자며, 자기가 잘하겠다며 말이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서 다시 이어진다고 한들 나에게 뭔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람이 손을 내밀었을 때 거절하는 것은 또한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엔 좀 더 나은 관계로 변화할지도 모른다는 또 그런 기대도 구석에서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애석하게도 결과적으로는 똑같았다. 여전히 나는 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상태였고, 그 친구는 이따금 연락하여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내가 이 관계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하게 정리된 사건이 바로 친구 생일이었다. 내 생일은 그 친구보다도 빨랐는데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생일 축하연락을 못 받았다. 나는 매번 그 친구 생일에 축하연락 했지만 말이다. 그 날따라 나도 심통이 나서 일부러 축하연락을 안 했는데, 그 친구는 자기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고 서운하다며 그 밤에 전화를 한 것이다. 그 순간 실소가 터져나왔다.


물론 그러고서 바로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어느 밤, 친구에게 연락이 왔고, 난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밤에도 연락이 왔고 나는 또 받지 않았다. 30분 후에 또 전화가 왔지만 그 역시 받지 않았다. 그 날 이후 그 친구는 더 이상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우리의 10년 넘는 관계가 그렇게 끝이 났다.




존중 받지 못한 관계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관계다. 내가 그 친구의 감정쓰레기통으로 변질된 순간에 나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리 따지면 나는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친구에게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그 친구가 내게 계속 연락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감정쓰레기통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기 때문이다. 그걸 내가 좀 더 일찍 그 역할을 거부했다면 아마 더 일찍 끝나는 관계였을 것이다. 이런 관계는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나는 실로 이 관계가 정리되고서 숨이 트이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그럼에도 길게 이어진 건 결국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친구가 꽤 소중했다. 이왕이면 평생을 함께 했으면 했다.


항상 나는 그 친구에게 서운한 것 중 하나가 '왜 즐겁고 좋은 일이 있을 땐 연락을 안 하지?' 였다. 항상 듣는 이야기는 부정적이고 화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고, 나는 그것을 들어주다 보면 내 기가 빨리고,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내 기분마저 상하게 되는 일 투성이었다. 나도 그 애에게 기분 좋고 신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누가 쓰레기통을 옆에 두고 싶겠는가. 쓰레기통은 내가 버리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만 찾는 것이다. 기분 좋은 일들이 가득할 때 감정쓰레기통인 나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 간단함을 깨닫는데 정말 나는 오래오래 걸렸다.




사람의 관계는 주고 받아야만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주고 받을 때 꼭 동일할 필요는 없다. 내가 돈을 10만 원 썼다고 상대방도 10만 원 써야 하는 건 아니다. 상대방이 써 준 편지 한 장이 내 10만 원과 그 가치를 똑같이 할 수도 있다. 그저 서로에게 필요하고, 서로 함께 한다는 공유의식이 있다면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나는  친구가  감정쓰레기통이 되어주길 바란 적은 없다. 내가 전화했을   친구가 받았으면 했다.  받았으면 나중에라도 전화해줬으면 했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을 보내주길 바랐다. 그리고 설령 몇년 만에 연락해도 허울 없이 그저 즐겁고 편한 그런 좋은 관계였으면 했다.  친구가 그걸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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