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도 업(業)이다

가사노동에 대한 평가

by 가릉빈가

"우리 집에는 와이셔츠가 30장 있어."

고등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한 말이다. 왜 이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 딴에는 꽤 강렬한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와이셔츠 30장도 모자라 아직 포장조차 뜯지도 않은 와이셔츠도 있어 몇 년간은 와이셔츠 살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왜 이렇게 됐는고 하니 아내가 수술을 하고 한 달의 입원생활을 하는 동안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래서 선생님 혼자서 집안일과 자녀의 돌봄과 아내의 간병과 직장생활을 모두 다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초등학생 밖에 되지 않아 부모의 손길은 필요하고, 퇴근하면 병원으로 가야지 정말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처음 일주일은 어떻게든 버텼는데, 시간이 누적될수록 집안일 할 여력은 안 되니 식사는 전부 외식으로 돌리고, 청소는 대충 필요한 부분만 해결했는데 그 와중에도 포기가 안 되는 게 빨래였다. 자주 갈아 입어야 하는 와이셔츠와 속옷 등은 어떻게든 빨아서 입어야 했는데 그 빨래라는 과정이 의외로 만만치가 않는 것이다. 빨고, 말리고, 개고, 다림질 하는 이 과정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서 와이셔츠, 속옷, 양말 같이 자주 갈아 입어야 하는 것들을 모두 대량구매해서 하루하루마다 새 것을 입고, 입은 건 그냥 세탁기에 처박아 놓은 채 한 달을 연명했다. 그리고 아내가 퇴원한 후에 집안 청소며 자녀 돌봄이며 아내가 입원하기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그 덕에 그때 산 것들이 넘쳐난 상태였다. 생활도 집안도 자녀도 그 모든 것이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는 말을 기억한다.


고작 아내가 한 달 동안 집을 비웠을 뿐이다. 그 한 달 사이에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아내가 한 달 동안 집안일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전쟁을 치룬 듯한 삶이다. 아내의 존재가 절대로 작지 않음을, 아내가 하고 있던 광범위한 집안일이 삶의 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는 집안일, 달리 표현하면 가사노동에 대해서 폄훼한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서 그냥 지나친다. 그러하다 보니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사노동에 대해 그나마 진지하게 오가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전이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청소하는 것, 빨래하는 것, 식사준비하는 것, 아이를 돌보는 것, 간병하는 것 등은 여성이자 엄마이자 아내에게 주어지는 디폴트 값이었고, 그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은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터부시했다. 그런 여성, 그런 엄마, 그런 아내가 있다면 오히려 인간 실격인 것처럼 평가내렸다. 집안일이 더 이상 여성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인식하고 주장하는 지금의 이 시대도 별반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이자 엄마이자 아내의 몫이고,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노동의 분류에 '공식적으로' 가사노동도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물이 바로 통계청에서 발표한 『가계생산 위성계정』이다.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를 평가했다. 한마디로 여지껏 노동의 영역이라고 보기는 애매했던 집안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임금을 책정할 수 있느냐에 대한 나름의 공식적인 지표이다.


출처: 통계청, 가사생산 위성계정 / 고용노동부, 최저임금

가사노동을 시급으로 계산했을 때 먼저 남녀의 차이가 월등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이 하는 가사노동은 남성에 비해 평균 약 3배 정도 차이가 난다. 2019년 기준 남성의 가사노동의 최저시급은 5,205원인데 2014년 최저임금 5,210원보다도 낮은 금액이다. 결국 저 추정된 금액은 가사노동에 투입되는 시간과 질의 문제일 것인데, 여성의 가사노동이 5년 주기로 그 기울기가 정확하게 보이는 것에 비해 남성의 가사노동의 기울기가 완만한 것을 보면 남성의 가사노동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다지 확대되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여성의 가사노동을 최저임금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그 의미가 보인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1999년에는 4,982원으로 추산했는데, 2014년에 1만 원 시급을 넘어섰고, 2019년은 1만 3,902원으로 추산했다. 최저임금은 1999년의 시급은 1,525원이었고, 2019년의 시급은 8,350원이다.

물론 가사노동 시급 추산 기준과 최저임금 책정 기준이 동일한 것은 아니나 이 수치를 봤을 때 가사노동이 절대로 만만하거나 쉬운 노동은 아니란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시급이 높다는 건 그만큼 노동의 강도나 가치도 높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1만 원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좀 더 남은 최저임금과 이미 1만 원을 넘어서버린 가사노동의 추산액이 과연 노동보다 가치절하 되어도 괜찮은 걸까?


사실 이런 추산이 아니어도 집안에서 하루 종일 집안일 하다 보면 의외로 쉴 틈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작하는 집안일은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 이루어진다. 여기에 어린 자녀의 양육이나 노부모의 돌봄이 추가된다면 24시간도 부족하다. 하고자 하면 끝이 없는 게 집안일이란 소리다.



집안일을 낮잡아 보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사처럼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법조인들처럼 판결하거나 변호하지 않으며, 회사원들처럼 보고서를 쓰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아웃풋(output)도 나오지 않는 일에 사람들은 높은 평가는 내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정말로 집안일이 생산성이 하나도 없고,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집안일의 가장 맹점은 집안일로 통해 얻어진 생산성과 결과물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인정하지도, 인식하지도 않고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집안일의 결과값은 디폴트값이다. 깨끗한 거실바닥은 당연한 일이다. 깨끗하게 빨아 정갈하게 개어진 빨래 역시 당연한 일이다. 집안일의 생산성으로 얻게 되는 것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들 뿐이라 티가 안 난다.


거실바닥이 더러워야, 음식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야, 빨래가 쌓여 있어야 그제서야 집안일을 하지 않음이 티가 난다. 아이가 숙제를 하지 않고 학교에 가야, 옷 소매 끝이 더러워야 엄마의 보살핌이 부족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집안일이 더욱이 매일 반복적으로 하는 일인 동시에 증거자료로 남기기도 쉽지 않은 것이라서 우리는 집안일이 노동이라고 취급할 생각도 없이 흘러간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는 초·중·고·대를 걸쳐서 가족의 기능에 대해서 끊임없이 배운다는 것이다. 그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재생산의 기능이라고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은 숨 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 그 가치가 무색하고, 존재하고 있는 생산성조차 망각하여 너무 낮은 위치에서 짓밟힌다. 하지만 이 하잘 것 없을 것 같은 집안일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의 일상도 함께 무너진다.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은 2인 이상이 있을 때이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최소단위이자 기본단위는 가족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머무는 곳이 집이고,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실상 집안일이다. 결국 가장 내 가까이에 있고, 기본적인 집안일이 먼저 행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옛말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에서도 잘 드러난다.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선 먼저 집안이 화목해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나와 내 집안을 안정시켜야 한다. 결국 집안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바깥일도 무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의 순서는 언제나 집안일 바깥일이다. 모든 일의 주춧돌이라도 할 수 있는 집안일을 무시하는 게 과연 온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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