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 초콜릿을 닮은 오크, 다크 초콜릿을 닮은 월넛색 가구들 이야기
점점 초콜릿을 찾게 되는 계절이 되니 생각난, 월넛과 오크를 닮은 초콜릿들, 밀크 초콜릿을 닮은 오크와 다크 초콜릿을 닮은 월넛으로 만든 가구 이야기.
얼마전 을유문화사 이벤트에 당첨되었다.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였는데, 예전에 읽었던 <생활 명품>의 개정증보판이다. 윤광준 작가는 일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제일 쉬운 실천법이 생활 물건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미 소개글부터 끌리는 이 책을 꼭 받고 싶어서 진심을 다해 댓글을 달았다. "꼭 브랜드 명품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스토리가 있는 물건이 시간의 옷을 입고 잘 관리되면 멋진 빈티지가 되는 것 같다. 무엇이든 신중하게 고르는 태도, 그리고 그것을 잘 다루고 간직하는 태도를 이 책을 통해 더 훈련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운좋게 당첨된 <생활명품 101>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나만의 스토리가 있는 ‘생활 명품'은 무엇인지 돌아 보다가 스탠다드에이의 가구들이 우선 떠올랐다.
스탠다드에이에 대해 생각날 때마다 블로그에 조금씩 적어둔 이야기를 곧 업로드 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최신호 리빙센스에서 스탠다드에이의 지난 십년간을 반추한 인터뷰를 보았다. 지금이 딱 그곳의 이야기를 할 타이밍인가? 스탠다드에이가 지금 처럼 성장하기 전 작은 공방일 때부터 나는 그들의 가구와 인연을 맺었는데, 시간이 쌓여가며 여전히 튼튼하고 가구의 색도 더욱 깊어지는 것을 보면서 정말 평생 써도 되겠구나 확신이 생기던 요즘이었다. 스탠다드에이는 몇년전 부터 대형 프로젝트를 많이 하더니, 최근에는 프리즈 서울의 하우저앤워스 갤러리를 위한 공간에 스탠다드에이 가구가 놓인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제는 스탠다드에이의 초창기 가구는 정말 그들의 역사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하겠구나 싶게 아득하게 느껴진다. 스탠다드에이의 예전 블로그에는 배송 후기나 소소한 작업 일지들이 올라 오곤 했었다. 특히 어느 고객이 아이가 테이블 상판 밑에 크레파스로 낙서를 해 놓아서 어떻게 원상 복귀를 해야 하나 고민하니, 혹시 스탠다드에이 10주년 기념 행사를 연다면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서 나누고 싶다고 했던 글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나는 십년후에 스탠다드에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궁금했더랬는데…
내가 오픈 초기에 이용했던, 그리고 쭉 응원해온 공간들이 성장하는 걸 보는 것은 큰 기쁨이고 오랫동안 계속 남아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곳의 작은 변화가 있을 때마다 금세 알아 차릴 수 있었던, 나만 알아 보는 것 같은 '히든젬hidden gem' 이었던 곳(그때도 이미 유명하긴 했지만) 대한 향수가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스탠다드에이와의 첫 만남은 2014년 무렵인데, 그때 아이들이 어릴 때 쓰던 가구를 하나씩 바꾸게 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유행이기도 했지만, 공방에서 만든 나의 취향이 담긴 원목 가구를 하나씩 소장하고 싶어서 여러곳을 알아보다가 스탠다드에이에 문을 두드린 것이다. 우리집에 있는 스탠다드에이 가구는 침대 1개, 데이베드 1개, 협탁 1개, 책장 2개, 선반장 1개, 사다리 책장 1개 이다. 한꺼번에 주문한 것은 아니고 몇년에 걸쳐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구매 했는데, 먼저 내가 메모지에 원하는 가구의 크기와 디자인을 대충 그려 보내면, 실장님들과 여러번 소통하며 디자인을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특히 나는 가구의 높이가 키를 넘지 않을 것, 금속이 들어가지 않을 것, 책장이나 침대 밑은 막히지 않을 것, 문은 꼭 미닫이문으로 할 것 등 나만의 고집이 있었는데, 전문가의 의견과 부딪히더라도 결국 나의 의견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의 만족감이 정말 컸다. 그 만족감에 대한 중독성(?) 때문인지 필요한 가구가 생기면 결국 기성 가구를 사기 보다 스탠다드에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스탠다드에이는 처음에 목조형가구 전공자들이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멤버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의자를 유난히 좋아해서 디자이너 가구에 대한 공부를 책으로나마 계속 해왔고, 한때는 목공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정작 그 분야에 접근성이 좋았던 때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게 안타깝다. 나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었는데, 나름의 갭이어를 갖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그리고 덜컥 한 미술학원에 등록을 하게 된다. 나는 마음속 남아 있던 미술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는지- 일단 그림도 못 그리면서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각종 석고상을 그리게 되었는데, 당연히 잘 못그리니, 선생님은 마지못한 격려를 해주며 지도를 해주고, 마무리는 선생님이 해주었다. ㅠㅠ 그때 내 담당 선생님이 목조형가구 전공이었다. 그 분이 자신의 전공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스케일이 커서 졸업 전시 준비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움이 많다고 했는데, 나는 그 전공이 실제로 사용 가능한 ‘가구'도 만든다는 것을 잘 몰랐고, 당시 선생님이 말하는 ’작업’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그 선생님의 작업실도 가보고, 전시도 가보고, 그랬을 것 같은데 당시 나는 너무나 무지했다.
아무튼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나무’라는 소재에 눈을 뜬 나는 어느새 그것에 푹 빠져버렸다. 우리집에는 모든 공간에, 부엌에도 플라스틱이 (나무 외에는 유리나 스테인리스만) 전혀 없다. 작은 수납 용기까지도 나무로 된 것만 쓴다. 물론 초기 비용 부담이 있지만, 대신 나무는 오일을 발라가며 관리를 잘 하면 평생 쓸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보다 제작 단가가 더 비싼 원목 가구를 완성품도 보지 못한채 주문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긴 했다. 당시 공방을 여러군데 알아보기는 했는데, 스탠다드에이의 어떤점에 나는 신뢰가 갔을까. 쇼룸이 우리집에서 멀어서 샘플 가구들의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스탠다드에이 멤버들이 블로그에 기록한 작업 일지, 배송 일지 등을 보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고 싶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사진으로 보는 디자인 자체도 마음에 들었을 뿐더러 어쨌든 그런 마음가짐으로 제작하는 가구라면 모험하는 보람, 기다리는 보람, 사용하는 동안의 만족도가 모두 클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스탠다드에이는 그 기대를 모두 충족해주었다. 스탠다드에이 가구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때 며칠동안 나뭇결을 관찰하고, 쓰다듬고, 나무향을 맡았던 기억이 난다.
스탠다드에이 가구중에서 나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것은 '미닫이문이 달린 책장' 이다. 미닫이문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락방 같은 느낌이 난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묵직한 문을 열면, 컴컴한 공간에 보물이 있을 것 같고,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추억이 있을 것 같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미닫이문이 언젠가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다. 추억은 있지만 애착이 사라진 너무 거대했던 옛책장과 집착하듯 헌책방을 돌며 모았던 절판된 책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책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계속 모은 이미지들은 미닫이문이 달린 수납장들이었다. 내 키보다 약간 낮은 높이에 책 판형에 꼭 맞는 높이와 깊이를 가진 수납 공간, 그리고 미닫이
문이 있는 책장이 필요했다. 미닫이문이 있으면 그 안에 아무거나 넣어도 다 가려지고, 뭐가 있는지 이미 알지만 문을 여는 행위 자체가 매번 설레임을 줄 것 같았다.
미닫이문이 달린 책장 주문 제작을 의뢰했을 때, 깊이가 깊지 않은 책장에 미닫이문을 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험이 많은 전문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바로 수긍을 했다. 하지만 그후 며칠간 계속 떠오르는 미닫이문 이미지들 때문에 고민이 되었고 쉽게 포기가 안되었다. 결국 나는 다시 미닫이문을 고집하였고, 결과물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생각난 김에 예전 배송 후기를 찾아보니, 나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늘 원하는 것이 정확하고, 싫은 느낌 또한 정확하다.“ ㅋㅋ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은 아니지만, 나의 취향을 이해해주는 전문가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도 성의를 보여주었다. 미닫이문은 문이 움직이는 레일이 필요한데 보통 기성품에는 금속이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이 미닫이문 아래에는 금속 레일 대신 그저 홈이 살짝 파여 있을 뿐이다. 덕분에 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더욱 따뜻해졌다. 그 미닫이문을 열고 닫으며 왠지 향수어린, 오래전의 느낌을 받는다.
이 미닫이문은 생각보다 두께감이 있어서 안쪽에 '다양한 수납'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덕분에 오로지 책만을 수납하기 너무나 적절하다. 또한 욕심내서 물건을 쌓아두기보다 소중한 것을 선별하게 된다. 미닫이문 안에는 지금은 보지 않지 않아도 간직하고 싶은 책들과 오래된 '디지털' 카메라, 아이들의 육아 수첩이나, 이름표, 사진 등 지난 물건들이 들어 있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가 있다. 마치 진짜 다락방처럼.
이 책장을 배송 받을 때는 두분의 실장님이 왔는데, 나는 그때 모카마스터로 내린 커피와 밀크 초콜릿, 다크 초콜릿을 준비했다. 당시 나는 또 어려운 부탁인 줄 모르고 ㅋㅋ 오크 도마와 월넛 도마도 두개씩 주문했는데, 아무리 소품이라도 쉬운 작업이 아닌데다 좋은 가격에 주신걸 알고, 죄송하면서 감사하기도 했다. 아무튼 책장이 조립되는 동안 나는 오크로 만든 도마에는 밀크 초콜릿과 월넛으로 만든 도마에는 다크 초콜릿을 올렸는데, 초콜릿과 나무색이 잘 어울려서 모두가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새 가구의 향, 커피향으로 채워진 공간에 오크색, 월넛색 초콜릿이 어우러진 티크 테이블, 그리고 지금 보다 더 젊었던 내 모습과 멀리서 온 손님들이 있던 풍경. 나무를 다루는 사람들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오로지 나무 이야기만 할 수 있었던, 반복되는 일상과 육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던 즐거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그날 책장이 완성되기까지 소통했던 실장님이 우리집을 둘러보며 “배송하면서 멋진 공간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런 분위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라고 했다. 그때는 마리메꼬 커튼 하나 만으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직까지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의 취향으로 꾸며진 작은집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집 풍경은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마리메꼬 패브릭만은 계절마다 패턴과 색을 달리하며 우리집 공간을 채워주고 있다. 이렇게 쓰다보니 언젠가 마리메꼬 이야기도 써야할 것만 같네…아무튼 신중하게 물건을 고르고, 그것을 잘 관리하는 태도를 지켜나갈 수 있게 해준, 어느덧 십여년간 함께한 스탠다드에이 가구들은 시간의 옷을 입고, 나만의 빈티지, 생활 명품이 되어 가고 있다. 윤광준 작가의 말처럼 일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제일 쉬운 실천법인 생활 물건 돌아보기를 계속 하고 싶어진다. 나만의 스토리와 우리집의 역사를 쌓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