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코로나가 시작하던 무렵의 겨울에 화가 바네사 벨의 화집을 샀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이기도 한데, ‘책'에 관한 모든 그림을 모아 놓은 책에서 그녀의 그림이 유독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화집 속 그녀의 그림들은 모두 매력적이었는데, 특히 그녀의 집 풍경들이 인상적이어서 그녀의 집, 찰스턴 하우스에 관한 소개가 담긴 책<Charleston>도 샀다. 이 책은 바네사 벨의 남편 퀜틴 벨이 쓰던 책을 딸이 이어서 완성한 책이다. 이 책에는 마치 집 곳곳을 직접 투어를 하는 것 처럼 느끼게 하는 생생한 사진들이 있는데, 실제로도 투어를 할 수 있도록 개방을 한다고 한다. 영화 <비타 앤 버지니아>(2018)에는 이 찰스턴 하우스가 그대로 묘사 되어 실제 그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Charleston> 책에는 바네사 벨의 화집에 없던 그림들도 있어서 더 반가웠는데, 특히 그녀의 방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Interitor with Housemaid>(1939)에 묘사된 그녀의 방에는 1인용 책상, 꽃, 창문, 커튼, 램프, 책, 의자가 있었다. 마치 그녀의 동생, 버지니아 울프가 쓴 책처럼, '자기만의 방'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 했다. 나는 그 그림을 본 후로 작은 책상, 꽃, 창문, 램프, 커튼, 책, 의자가 모두 들어간 그림을 꼭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그나마 여성 화가들의 그림 속으로 이따금 도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야만의 시대에도 자신의 재능을 숨길 수 없었던, 그리고 차별과 소외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용기 있게 추구해 나갔던 오래전의 여성 예술가들을 떠올렸다. 특히 바네사 벨, 힐마 아프 클린트, 가브리엘 뮌터, 바우하우스의 여성 공예가 등 잊혀진 여성 작가들을 탐색해가면서 위안을 얻었다. 원래 책 읽는 여인과 의자가 함께 있는 풍경의 그림을 좋아하는 나이긴 했지만, 바네사 벨의 방 그림을 보고는 당장 그 공간을 내것으로 하거나, 그런 공간이 그려진 그림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버렸다. 아마도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고 싶은 간절함이 소유욕으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갖고 싶은 그림에 집착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차에 어느날 갑자기 엄마한테서 문자메세지로 사진이 하나 도착했다. 베란다 창고를 정리하다가 발견했다는, 표구도 되지 않은 채 돌돌 말려서 방치된 그림이었다. 사진 속의 제법 커 보이는 그림을 찬찬히 보던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 거렸다. 그 그림에는 내가 원했던 작은 책상, 꽃, 창문, 커튼, 램프, 책, 의자가 모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60여년전, 아빠가 십대 시절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되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 속 공간은 아빠의 방이었을까, 친척집의 공간이었을까. 아무튼 그에 대한 답은 이제 들을 수 없지만, 그저 상상해보는 것 만으로도 그림은 점점 생명력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한테 당장 그 그림을 보내달라고 해서 받자마자 표구를 하러 갔다. 액자를 고르면서 한참 고민을 하다가, 금색 프레임을 곁에 두니 그림이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해서 그것으로 골랐다. 아빠는 어떤 연유로 그런 그림을 그렸으며, 하필 딱 그 타이밍에 나에게 그림이 도착했을까. 60여년만에 빛을 보게 된,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아빠의 그림이 찾아온 것은 기적이자 희망이었다. 바네사 벨의 집을 소개한 책에서 ’자기만의 방' 으로 짐작되는 그녀의 그림을 보자마자 그 공간과 똑같은 물건들이 존재하는 그림을 계속 상상했던 나는 어쩌면 '(그림을 그리던 때의) 아빠의 기억'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도 존재를 몰랐던 아빠의 그림이 발견된 순간은 다행히 모두가 준비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이전에 그 그림을 보았다면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았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우리집 방 한구석에 여전히 방치된 아빠의 그림들을 보면 모든 그림이 다 내게 의미 있는 건 아님을 깨닫는다.
백여년전의 여성 작가가 그린 '자기만의 방' 그림에 대한 동경은 어쩌면 그림의 소유를 바란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과 시간과 일에 대한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 바네사 벨의 그림과 비슷한 풍경이 그려진 아빠의 그림이 나에게 도착한 후 부터 나의 마음은 점점 회복 되었다. 마치 소년이었던 아빠가 60여년전에 쓴 편지 같았다. 수취인 불명이거나, 분실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누군가에게든 도달해서 그 사람을 위로해주는. 그림이 도달하기까지의 여백에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림은 그 시간을 견뎠다. 나도 언제 어떻게 누가 받을지 알 수 없더라도, 발견되었을 때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꼭 글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의 편지를 많이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우연과 서프라이즈가 있는 삶의 순간들을 모아 보다 보면, 어느새 다시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순순히'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비틀스의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이 한 말)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되는걸 알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