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 여성 작가의 공간을 상상하며
‘플랫’ 이라는 단어가 좋아요. 플랫에 사는걸 상상해보면 왠지 자유로우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들어요. 플랫이 있는 벽돌 건물은 100여년전에 지어져 왁스로 광을 내야 하는 마룻 바닥이 있을 것 같고, 창문을 열면 저 멀리, 공원이나 호수가, 창가에는 꽃나무가 있을 것 같아요. 나무가 보이는 높이의 층에서 사는게 좋아요. 나무가 창을 가려도 틈새로 빛이 들어오고,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는게 좋아요. 높은 층의 탁 트인 전망은 매력적이지 않아요. 단독 주택처럼 너무 홀로 있는 공간도 바라지 않아요. 창가에는 책상과 책장이 놓이고 벽쪽에는 침대와 붙박이 장이 있는 방, 민트색으로 칠해진 깨끗한 화장실, 그리고 2인용 소파와 암체어를 놓을 수 있는 거실이 있는 플랫이면 좋겠어요. 격자 무늬 창이 있는 베란다도 필요해요. 책을 읽을 의자 하나가 놓이거나 손을 흔들며 누군가를 배웅할만한 공간이요. 가구 몇가지는 미드 센추리 모던 덴마크 가구로 갖고 싶어요. 유행과 상관 없이 오래 쓸 수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도 더해지니까요. 길이 들어서 반들반들 윤이 나고, 모서리가 조금씩 벗겨 졌어도 튼튼하고 멋스러워요. 나무로 만든 가구는 시간의 흐름을 우아하게 담는 것 같아요. 헌책처럼 말이예요. 나무로 만든 가구가 자리를 지키는 동안 그곳에 새겨지거나 담긴 흔적을 분석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인생이나 동네의 역사가 나올지도 모르죠. 조명은 꼭 간접 조명을 쓸거예요. 식탁 위의 팬던트, 거실에 플로어 램프와 사이드 테이블 위의 작은 램프, 책상 위에 놓을 램프와 침대 옆 협탁에 놓을 램프도 필요해요. 복도에도 벽걸이 등 하나는 필요하죠. 수도원 같이 명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벽걸이 등 아래의 공간은 사색하거나 휴식하기 좋을 것 같아요. 방은 아니지만 빛으로 만든 공간이죠. 책상에는 랩탑이나 타자기, 티크로 만들어진 독서대와 로즈우드와 브라스로 만들어진 레터 홀더를 놓고 싶어요. 세칸 정도의 수납 공간이 있는 책장은 넘치지 않도록 도서관과 헌책방을 활용해서 책들을 순환시킬 거예요. 참, 책장에는 미닫이 문이 달려 있으면 좋겠어요. 작은 책장이라도 나의 취향과 마음의 변화에 맞춰서 큐레이션을 하고 싶어요. 노트나 사진은 쌓이면 일년에 한권씩 나만의 책으로 만들거예요. 식탁 위에는 짝이 맞지 않아도 인연이 닿을 때 마다 하나씩 수집한 북유럽 빈티지 그릇들을 놓을거예요. 그릇 패턴에 브라운이나 오렌지 색은 꼭 들어가야 해요. 냉장고에는 화이트 와인을 책상 위에는 위스키 한병을, 그리고 캐비넷에는 좋은 일이 생긴 날 마실 샴페인 한병을 넣어둘거예요. (마치 Queen의 노래 ‘Killer queen’에 나오는 그녀처럼) 부엌에는 그릇과 유리잔과 술을 넣어 놓는 작은 캐비넷이 필요해요. 유리잔은 종류별로 딱 두개씩만 캐비넷에 넣어둘 거예요. 와인잔은 입에 닿는 부분이 섬세하고 얇은 것으로, 위스키잔은 스템이 날씬하고 긴 것으로. 침대는 소파로도 쓸 수 있는 데이 베드로 놓고 싶어요. 침구는 흰색이더라도, 알록달록한 울 100% 쓰로우 하나는 꼭 필요해요. 옷장에는 모직 코트. 트렌치 코트, 카디건, 스웨터, 청바지, 슬랙스, 셔츠, 티셔츠, 스카프, 잠옷, 로브가 하나 둘씩만 있을 거예요. 스웨터와 코트는 낡더라도 이너웨어는 늘 깨끗한 것으로 입을 거예요. 화장실과 부엌에는 꼭 창문이 있으면 좋겠어요. 부엌창은 싱크대 앞에, 화장실창은 욕조 옆에 있으면 좋겠죠. 거실과 침실의 창가에는 무늬가 화려하면서도 그중에 꼭 햇살의 노란색이 들어간 패브릭 커튼을 걸거예요. 방음 장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집 소리가 들리는건 민망하지만, 윗집의 학생이 밤늦게 들어와 고단한 몸을 침대 위에 누이는 소리나, 외국인 부부가 알 수 없는 소리로 부부 싸움을, 때론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게 거슬리지는 않거든요. 직접 소통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느낌은 좋아요. 친밀하지 않아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싶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