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유발하는 금기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삶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120쪽.
작품 해설
프랑수아즈 사강은 노년을 두고는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 더 이상의 만남이 불가능해 지는 때,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들이 오가는 가운데 아침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때. (...) 지금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뿐."이라고 했고, 프루스트에 대해서는 "그가 지상에 다녀간 이후에는 어떤 것들을 단순히 다시 한다는 게 불가능해져 버렸다. 그는 우리 재능의 한계를 그어 준다."라고 하며서, "예술의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문학이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믿게 하지만, 진실은 그 정반대이다. 삶이 무정형적이라면, 문학은 형식적으로 잘 짜여 있다."라고 짚고 있다. 또한 그녀는 '사강'이라는 필명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슬픔이여 안녕>은 엘뤼아르의 시 <눈 앞의 삶>에서, <한 달 후 , 일 년 후>는 라신의 비극 <베레닛>에서, <신기한 구름>은 보들레르의 시 <이방인>에서 따왔다. 자신의 문학적 토양이 된 선배 작가들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랄까.
드물게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일이 풀린 방향이 흔하고 대중적이었을 뿐. 멍석 깔고 목에 힘주는 이들이 미치지 못하는 사물의 핵심에 닿아 버리는, 재능과 성실성이 만나는 이들 말이다.
그녀가 집중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고 미묘한 사람 사이의 감정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엄정하고 깊숙하고 철저하다.
개인적으로는 줄곧 성인의 삶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좌중우돌의 지극히 문학적인(!) 삶을 살았다 해도, 남녀의 심리와 개인의 심리를 통해 인간의 어떤 보편적 심리층의 단면도를 제시함으로써, 기질과 숙명의 그래프를 그려 냄으로써 프랑수아즈 사강은 저 라신의 반열에 오른다. 프루스트가 그어준 자신의 한계 그 끝에 도달한다. 페스트균처럼 뻔한 결말로 독자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멜로드라마에 머무는 대신, 갑자기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지는 각성의 '엔딩'을 선사하고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강을 다시 읽는다. 2008년 봄, 김남주(옮긴이).
"드물게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일이 풀린 방향이 흔하고 대중적이었을 뿐. 멍석 깔고 목에 힘주는 이들이 미치지 못하는 사물의 핵심에 닿아 버리는, 재능과 성실성이 만나는 이들 말이다."
가볍고 감각적인 그녀의 감정 묘사와 문체, 남들의 삼각 관계 이야기를 내가 지금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읽고 나니 읽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행로와 불행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는 그 인물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프랑수아즈 사강을 다시 읽게 되면서 내가 그동안 나만의 편견에 갇혀 보지
못했던, 그들이 왜 대중의 열광을 얻어 냈는지를, 그것의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대중성은 결국 그들이 모두를 공감하게 하는 보편적이면서도 우리 본성과 삶에 대해 본질적인 이야기를 썼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고, 문학의 주변에 절박하게 머무는 사람들 외에도 바쁜 일상을 쪼개야 하거나 책을 안 읽던 사람들도 그들의 책을 들게 만드는 두 작가의 힘에 대해 나도 모르게 과소 평가 하고 있었다. 마치 비틀스나 퀸 처럼 너무 대중적이기에 일부만 알면서 다 아는 것 같다고 착각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나이 들어서 다시 진지하게 읽어본 이 두 작가는 나에게 청춘의 한페이지가 아니라, 청춘과 노년 사이 삶의 정 가운데에 다시 만난 지침서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그들을 보내주어야 할 때가 아니라 다시 소환해야할 때. 그들의 작품이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결국 그들이 그 마음가짐으로 노년을 나름대로 잘 사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오로지 '사랑'을 향한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정치적 선동이나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어제 친구와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프랑수아즈 사강이 노년을 앞두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기존의 관계도 정리 되고, 새로운 관계는 만들기 더더욱 힘들 것이라는, 그리고 노안의 습격으로 그나마 관계에 의지 하지 않고도 친구가 되어주고, 삶을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책 마저도 멀어질 것이라는 조금 슬픈 이야기.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마흔살과는 다른, 이삼십대 보다도 더 풍요롭고 생기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남아 있는 나날들도 이 마음을 끝내 지켜낸다면 다가올 그 노년의 슬픔들에 지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의 식단을 완벽하게 신경쓰고, 지금 다니는 학원 외에 더 보충해야 할 과목의 학원을 알아보는 대신 일주일에 한번씩 열릴 오후의 '플랫화이트 북클럽'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신경쓰면 되는 것이다. (내가 육아에 성실히 몰입하기 보다 오히려 자유로워 졌을 때 감사하게도 아이들이 더 잘 성장하는 증거를 보여주기도 했으므로. 물론 아이들은 삶의 기복과 자신의 민낯을 그만큼 감당해야 했지만.) 우리가 삶의 순간 마다 맞닥뜨리는, 갈등을 유발하는 금기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삶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나고 용기를 얻는다.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 강석경의 <젊은 느티나무>에 나오는 말을 빌려 고해하고 싶다. 아아, 나는 프루스트를, 청춘의 마음을, 나 자신을 더 사랑해도 되는 것이었다. ‘사는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나의 시간, 가을 날의 오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