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나는 일상을 위해서
'살맛나다'
이 표현은 무척 진부하고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그런 정서의 단어를 골라야 한다면 선뜻 고르기 쉽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아이가 논술 수업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사회에서 인정을 잘 받지 못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갖고 있어도 주변에 사랑해주고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살맛이 나는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고 쓴 것을 발견했다. 아이의 '살맛나다'는 표현이 신기해서 마음에 남아 있던 차에 마침 어제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면서도 같은 표현을 발견했다. 남자 주인공 시몽은 사랑하는 여자 폴에게 "내 열정과 애정이 있어요. 이것은 내게는 아무 소용 없지만 당신에게 준다면, 나로 하여금 다시 사는 맛을 느끼게 해줄지도 모르죠." 라고 말한다. ‘살맛나다’는 낡은 표현이 아니라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쓰는 표현이었다. '살맛나다'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다'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해주기, 같이 있어주기, 열정, 애정 등이 필요한 것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과 기억에 있다는 것, 그 사람이 나를 떠올리는 순간에 나는 멀리 있어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신기하고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는다. 한편 꼭 누군가의 마음이나 기억에 있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스치거나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비의지적으로도 공통의 경험을 쌓아 간다. 그 순간들은 언제 꺼내질지 모른 채 모두 우리의 깊은 곳 안에 잠들어 있게 된다. 결국 우리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호의는 누구와도 주고받을 수 있다. 살맛나게 하는 호의를.
작은 호의들에 감사하고, 작은 호의들을 주저하지 않고 건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요즘 내가 적극적으로 건네는 작은 호의는 응원하는 젊은 피아니스트들과 출판사의 인스타에 좋아요, 를 열심히 누르는 것이다. 정말 의미가 있을까 싶은, 안해도 되는 일을 굳이 함으로써 '세상에 사랑을 뿌리고' 있다. 그렇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누군가를 '살맛나게' 하지 않을까.
호의의 표현에 대한 충동이 생길 때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표현할 줄 아는 태도가 소중함을 나이들 수록 느낀다. 그 누군가가 건네준 호의 덕분에, 외롭고 힘들 때에도 어느새 마음에 불이 켜지는 순간, 내 주변이 순식간에 온기로 채워지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힘들었던 삼십대의 순간들에 대해서는 어떤 호의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히 무수히 많았을텐데)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마음만큼은 내가 스스로 꼭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요즘 자주 이야기되는 '마음 챙김'을 잊지 않기. 그래야 호의를 호의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호의가 진정으로 나를 돌봐주고 살맛나게 하는 것 같다. 주저하지 않고 호의를 건네고, 사랑을 뿌리고,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를 느껴보기- 사랑에서 소외된 존재(카프카의 <변신>)와 사랑에 미친 존재(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들의 이야기 덕분에 어떻게 '살맛나게' 살지를 자꾸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내부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의 표현이다. 사랑의 마음, 그건 사랑의 행동과 동의어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