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 너머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과 [코로나 사피엔스]의 '결단'
- '신문명'의 '혁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 너머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데서 나왔다."
- [포노 사피엔스], <혁명 전야 -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온다>,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는 이후 10여 년 사이 70억 지구 인구 중 30억 명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신문명' 적응에 적극적인 부류들은 "앞으로 스마트폰이 대세일 것"이라 주저없이 예상했으나 이 정도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인류 문명을 잠식하리라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이란 '예상'은 될 수 있을 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예측'은 불가한 것일테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권위자'로 불리는 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 최재붕은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포노 사피엔스'가 몰려오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로 규정한다.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뜻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데 마치 뇌와 스마트폰이 생체적으로 연결된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후속작 [호모 데우스]를 통해 예측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진화하는 '신인류'의 모습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들고다니는 '게임기'에 불과했던 스마트폰의 '유희성'을 생활화하여 삶의 전영역으로 확장시켜 네덜란드 사상가 요한 하위징어의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개념의 정점에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나 인터넷과 PC 게임을 하며 자란 '밀레니얼 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존의 '오프라인' 소비 영역이 '온라인' 시장으로 획기적 전환을 하게끔 하는 '무한욕망'의 소비자이자, 디지털 플랫폼 신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다양하고 강력한 '팬덤'을 이룬다. 아마존, 우버, 카카오 등은 이런 '팬덤'을 포착하여 '킬러콘텐츠'를 만들어 전산업을 문어발처럼 장악하고 거대한 '디지털 지주회사'가 된다. 현재 이들 '신인류'가 우리의 문명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보편적 인식이 되어 있다.
2020년에 '팬데믹(pandemic)' 증상으로 전세계를 덮친 전염병인 '코로나19(사스-코로나바이러스2)'로 인해 직장의 '비대면 업무'나 '재택근무' 등 노동환경의 변화와 학교의 '온라인 수업'이 급격히 도입되는 지금, 산업이나 교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의 운영방식 또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강제하고 있어, 사람들은 이후의 문명을 '포스트-코로나(Post-corona)'로 명명하며 더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또한 진단하고 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름 짓자면 '호모 코로나리우스(Homo coronarius)' 정도가 가능하나,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학명의 규칙이 무너진 합성어가 전세계에 통용되는 점을 감안하여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음에도 본 용어를 과감히 사용하였다."
-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CBS 시사 프로그램 <정관용의 시사자키>에서 작금의 '코로나 재난'에 관한 국내 석학들과의 인터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제목은 2020년 4월에 방송에서 처음 불린 '코로나 사피엔스'다. 이 명칭은 '학명'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 '포노 사피엔스'식 명명에 따르는데,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지었다는 '포노 사피엔스'식 작명의 기원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 추측되는 바,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전영역을 포괄하며 아우르는 '인류의 전역사'로서,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자연사적 고찰'이 이 역사관의 기본 바탕이다.
"시장혁명은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실입니다... 자본이 선택한 문명의 표준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입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신인류의 '욕망'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설정한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이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 특히 기성세대는 신문명을 빨리 배우고 습득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성세대는 구한말 서구의 신문명에 대한 편견으로 나라를 망친 '쇄국주의자'와 같은 운명이 된다고 한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나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 신인류는 이미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포노 사피엔스'로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과학의 진보를 토대로 한 인류의 '진화'를 역설한 유발 하라리식 '빅 히스토리'의 계보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섣불리 반박했다가 '사피엔스'의 범주에서 쫓겨날 것만 같기에.
다만, '사피엔스'의 진화를 다루는 '빅 히스토리'의 연장선에 있음에도 [포노 사피엔스]의 독자는 '사피엔스' 일반이 아닌 혁신적 '기업가'들에 국한되어 있는 듯 하다. '신인류'가 촉발하는 '혁명'은 '시장혁명'이므로 기업은 애플,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세계 5대 기업'의 사례를 따라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 개발에 발빠르게 참여하면서 이와 관련된 신기술에 필요한 부품의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을 통해 중국의 알리바바 등과 함께 '아시아 7대 기업'에 선정된 한국의 삼성전자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할 기업의 표본이 된다. 삼성 재단의 대학교수가 기업들에게 행한 강연을 토대로 쓴 [포노 사피엔스]가 보기에 생존권 보장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머리띠'와 '이념투쟁'에 다름 아니며, 급격한 산업개편을 조절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는 '신문명'의 진보를 가로막는 구태로 보이는 듯 하다. 한편으로, '포노 사피엔스'의 '소비 욕망'은 '상수'이므로 이에 따라 급격하게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하고 법으로 규제하려는 국가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낙오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피엔스]에서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포노 사피엔스'의 '욕망'에 의한 '4차 산업혁명'은 더욱 가속화하므로 '기성세대'는 더이상 '포노 사피엔스'의 '신문명' 흐름에 역행하면 안된다고 강력 주장한다.
그리하여 [포노 사피엔스]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은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길만이 남게 된다.
물론, [포노 사피엔스]의 결론은 "그래도 사람이 답이다"라고 끝맺으나 그 '사람'은 '무한욕망'의 소비자들과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혁신'적 기업가들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스타일난다'라는 디지털 소매기업을 로레알 자본에 거액으로 판 기업가는 우리 사장님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배달의 민족을 독일 거대자본에 높은 가격에 팔고 국내 라이더들 수수료를 후려치려는 기업가 또한 [포노 사피엔스]의 추천글을 썼다.
한편, '코로나19'는 '포노 사피엔스'의 '시장혁명' 와중에 체제전환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생물학적, 화학적 '백신' 외에 우리 사회에서 잘 운용한다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행동방역'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에 전염되는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개발 욕구를 제한하는 '생태방역'을 강조한다. 자연을 침해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박쥐가 인간 사회로 침투할 수밖에 없는 막무가내 개발식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는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와 칼 폴라니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이 생태 재난 위기를 통해 이제는 '시장'에 대한 맹신을 벗어나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도 미국식 '야수자본주의'를 벗어나 유럽을 빗댄 '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엮은 [코로나19]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앨릭스 캘리니코스 등은 바이러스가 자연적으로 지속 전파될 수 밖에 없는 '집단적 축산업'을 강화하고 도시의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빈곤층의 결집으로 사회적 전염을 더욱 불평등하게 퍼뜨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이 기회에 극복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인류는 '신문명'이라는 '욕망의 바다'에서 헤엄쳐 살아남아야 하는 동시에 이 '무한욕망'의 물결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기도 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장악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포노 사피엔스'와 '코로나 사피엔스'의 '욕망'을 본원적인 '절대상수'로만 상정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조정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없어졌지만 결국 나중에는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었다는 지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일자리를 잃은 '혁신'적이지 못했던 다수가 굶지 않도록 어떤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제'와 '해고금지'를 통한 고용보장제도가 절실한 이유다.
"... '포노 사피엔스'가 '문명의 표준'입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문명의 기준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판단은 '데이터'가 합니다..."
- [포노 사피엔스], 최재붕, 2019.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의 저작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에서 '데이터'로만 말하는 '신문명'조차 극소수 부자들에게 초집중되는 금융자산의 정확한 '데이터'의 부재와 그 '불투명성' 앞에 무력함을 지적하고 있는데, 인류 최고의 '불평등체제'로서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이미 '포노 사피엔스'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사피엔스'의 '욕망'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포노 사피엔스'의 '혁신성'은 화수분과 같은 '이윤의 바다'에 다름 아니다.
"... 나는 특히 소득과 금융자산의 평가 및 등록과 관련하여, 오늘의 세계를 특징짓는 경제, 금융 불투명성의 증대를 강조할 것이다. 정보와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를 어김없이 찬양하는 문명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도 있을 이런 사태는 국가 공권력과 통계당국의 책임 회피 문제를 드러낸다."
- 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13장 - 하이퍼자본주의 : 현대성과 의고주의 사이에서>,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
인간의 다양하고 무한한 '욕망'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체제'가 심화되는 상황이라면, '신문명'에 의한 '혁명'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한 '자연사적 고찰'을 넘어 '사피엔스' 다수의 의지로 '인간을 위한 체제'로의 전환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재난조차도 불평등한 지금, 다수의 '사피엔스'에게는 [포노 사피엔스]의 '무한욕망'보다 [코로나 사피엔스]들이 함께 연대하여 기획하는 '체제전환'의 '결단'이 필요하다.
***
1. [코로나 사피엔스], 정관용의 시사자키 엮음, <인플루엔셜>, 2020.
2.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쌤앤파커스>, 2019.
3. [코로나19 -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노동자연대 엮음, <책갈피>, 2020.
4. [자본과 이데올로기](2019), 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 <문학동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