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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Dec 04. 2021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 - 파이지스

러시아혁명의 '백년 동안의 고독'

러시아혁명의 '백년 동안의 고독'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2014), 올랜도 파이지스, 조준래 옮김, <어크로스>, 2017.




"마르크스주의가 레닌을 혁명가로 만든 것이 아니라,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 <1장. 시작 - 1891년 대기근>, 올랜도 파이지스, 2014.



나는 어지간하면 한 번 펼쳐든 책은 다 읽는다. 어려운 책이든 재미없는 책이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듯이 건너뛰지 않고 이해하든 못하든 끝까지 본다. 그러나 모든 책이 그렇지는 않은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대부분 건너 뛰었고, [유러피언]이라는 책은 아예 중간도 못 가서 덮었다. [율리시스]는 난해하기도 했지만 정말 너무 지루했고, 올랜도 파이지스의 [유러피언]은 읽는 동안 왜 이런 이야기를 이런 인물들 중심으로 오랜 기간 고심해서 썼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사실 올랜도 파이지스에 대한 기대로 펼쳐든 책이었기에 실망이 더 컸었던가 보았다.




영국의 역사가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를 알게 된 건, '러시아혁명'에 관한 그의 책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2014)을 통해서였다. 역시 반세기 전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와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역사학자가 분석한 '러시아혁명사'였는데, 1917년 또는 1905년이 아니라 아예 소비에트가 망한 1991년부터 무려 백년 전인 1891년부터가 '러시아혁명'의 시작점이라는 분석 자체가 눈에 띄었다. 즉, '러시아혁명'은 1891년의 러시아 동남부 대기근과 이에 대한 차르 전제체제의 무능한 대처가 불러온 '대참사'라는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지하조직', '음모', '폭력'과 거리가 먼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이 레닌을 혁명가로 만든 것이 아니라, 러시아 특유의 지하조직과 전위정당, 레닌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들의 머리통을 후려갈겨야 할" 폭력혁명의 전통이 마르크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 시작이 바로 '차르' 체제였고, 그 객관적 배경이 바로 '1891년 대기근'이었다.





"만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유럽의 노동운동이 선택한 중도적 개혁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치상황은 그들을 극단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지하혁명 운동의 지도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던 것은 바로 차르 정부였다."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 <1장>, 올랜도 파이지스, 2014.



마르크스주의는 보통 '폭력혁명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사실 자본주의가 발전되기 전이었던 농업 제국인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 볼셰비키 소비에트 혁명을 지도했던 레닌주의와 결합한 '마르크스-레니니즘(Marx-Leninism)'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사실 노동자 보통선거권이 부르주아-지주 계급연합에 의해 거부되던 19세기의 노동자 계급에게는 '폭력'으로 체제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 말고는 사람답게 살 방도가 없었다. 20세기에 노동자 민중들이 보통선거권으로 투표용지와 도장을 들었다면, 19세기에는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20세기 노동자 보통선거권 쟁취로 유럽의 사회주의 진보정당은 대중정당으로서 '의회주의' 전술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다수화'를 목표로 할 수 있었고, 그 과학적 배경은 자본주의 고도 발전의 결과 '생산력'의 '사회화'가 '생산수단'까지 '사회화'하는 사회주의 체제로의 필연적 전환이었다.

한편,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공황과 체제의 이행을 암시했지만 만년의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의 '물질대사'를 연구하는 자연과학 공부의 심화와 함께 게르만의 '마르크공동체'와 러시아의 전통공동체 '미르'를 연구하면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지 않은 사회에서도 '생태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쨌든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다수설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과학적으로' 체제 이행이 된다는 학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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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세기 초 자본주의 후진국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1891년 대기근이 닥치고 그 이듬해 콜레라와 티푸스 같은 전염병으로 50여 만명의 다수 농민이 죽어가도 차르는 자본가들의 곡물 수출을 허용하고 독려하면서 자본의 이윤 증식을 비호했다. 사람 사는 러시아를 바라는 톨스토이와 체호프를 비롯한 수많은 진보적 인사들은 황야의 인민들에게 돌아가(브나로드 운동) '혁명'적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이 1867년에 독일어로 첫 출간되고 5년 후인 1872년에 플레하노프라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했을 때, 영문판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는 '인민주의'의 동력으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실천했다. 러시아의 차르 체제로는 자본주의 '정상적'인 경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 뿐더러 '정상적'인 의회주의 정치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1920년에 레닌이 "1917년 혁명을 일으키는 데에 없어서는 안되었을 '최종 리허설"(같은책, <2장>)이라고 규정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후 조직된 입헌군주제 의회인 '두마'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차르의 귀족 출신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은 영국보다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을 모델로 러시아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무자비한 러시아 차르의 체제에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같은책, <3장>).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결사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달리 무장한 전위부대가 되어야 했다.

결국, 레닌의 '폭력혁명'을 촉발한 것은 다름아닌 '차르'였다.



레온 트로츠키(L.Trotsky)가 "군주정이 민중의 목에 두 번 다시 올라타지 못하도록 격하게 토해냈다."([러시아혁명사], <5장>)고 묘사한 1917년 2월 '부르주아 혁명'으로 차르 체제를 종식시키고 들어선 러시아 케렌스키 정부는 이미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 의회인 '두마'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자발적'으로 들불처럼 결성된 다수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소비에트(평의회)'와 병립하는 '이중권력'의 상황이었다. 자유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속 밀어붙였고 러시아 민중들은 전쟁터에서 죽느냐 혁명의 내전에서 죽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도시의 노동자와 각 지방의 농민들은 물론 병사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평의회인 '소비에트'로 계속 활발하게 뭉쳤고 이런 '이중권력'의 정세에서 소비에트의 힘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능가했다. 1917년 10월 혁명의 주역인 레닌과 트로츠키는 대중의 '자발성'이나 자본주의 고도발전의 사회주의 필연적 체제 이행을 믿지 않았고 볼셰비키의 전위적이고 주도적인 혁명적 실천을 강조했으나, 사실 트로츠키는 1905년부터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소비에트 지도자였고, 레닌은 1917년 독일로부터 러시아로 귀국하는 봉인열차에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발표하면서 즉각적인 무력혁명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유럽과 같은 대중정당이 아니라 전위적 지하조직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볼셰비키(다수파)들은 이렇게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다수 민중들의 소비에트의 평등과 평화 운동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건국한 사회주의 정권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인 이유다. 미국의 러시아 출신 역사학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Rabinowitch)는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의 의지적 실천보다는 '소비에트'의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혁명적 동력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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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와 스탈린 사후 '스탈린 비판'을 시전한 흐루쇼프나 1991년까지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한 고르바초프 모두 사실은 '레닌주의자'였다. 스탈린이 교조화시킨 '레닌주의', 즉 실상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다시금 1914~1917년의 '레닌주의'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91년은 '대기근'의 1891년이나 '피의 일요일'의 1905년, '제1차 세계대전' 전야인 1914년이나 '이중권력'과 '이중혁명'의 1917년과 달랐다.

그렇게 '레닌주의'의 부활은 실패했다.





"러시아인들이 공산주의 체제의 사회적 트라우마와 질환으로부터 치료받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정치적으로 혁명은 죽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혁명은 100년 동안의 그 폭력적인 사이클 속에 휩쓸린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사후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

-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 <20장. 심판 - 혁명의 후기>, 올랜도 파이지스, 2014.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항한 스탈린주의 소련의 '대조국전쟁'은 사실 러시아 민중의 대규모 시체 더미 위에서 펄럭인 피의 깃발이었다. 히틀러 나치군의 동진을 막은 동부전선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정의의 반(反) 파시즘 전쟁'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2천5백만 소련군이 죽어가며 지켜낸 것은 결국 그들의 조국이 아니라 스탈린의 권력이었을 수도 있다.  이후 세계의 1/3을 미국과 나눠먹은 소련은 스탈린의 국가였고 그 스탈린은 1917년 10월 혁명 초기 인민위원회의 초대 '민족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가 주장한 사회주의적 우애와 평화에 기초한 '민족해방'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식민지'만을 양산하다가 결국 민중들에 의해 연쇄적으로 해체되었다.

다시금 '레닌주의' 혁명정신을 부활하기에 스탈린 이후 소련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스탈린 시대에서 나고 자라며 교육받은 소비에트 민중들이 바라는 국가는 '자유'와 '평등'의 사회주의 세상이 아니라 기존 차르 체제와 같은 '러시아 대제국'이 되어 있었다.

이는 차르나 스탈린 못지 않은 지금의 러시아 푸틴의 절대권력과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한 러시아 정교회의 '정교일치' 국가로 이어졌다.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은 철학자이나 정교회 사제와도 같은 자로 차르 체제 말기의 라스푸틴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다.



1991 소련 해체  '민주화' 러시아연방은 '전범 재판' 같이 스탈린 시절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를 법원을 통해 사법적으로 단죄하려고도 했다.  재판은 2 세계대전 후의 '전범 재판'과는 달리 '피의자' 없는 희귀한 재판이었다. 소련공산당은 대법원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들은 스탈린의 '일국 공산주의' 버리지 않았다. 불법화된 '만년여당' 소련공산당은 '만년야당' 러시아공산당으로 부활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적 실천을 봉쇄했다. 아직도 다수 러시아 민중들은 스탈린주의를 '좋은 시절'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억하는 스탈린의 조국은 '자유' '평등', '우애' '평화' 사회주의가 아니라 차르의 대제국이었다.


그렇게 1891년부터 1991년까지 '러시아혁명'은 러시아 민중들의 '제국적 추억'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주의적 본질'을 다수가 알아주지 않는 '백년 동안의 고독' 속에 잠기게 된다.



***


1. [혁명의 러시아 : 1891~1991](2014), Orlando Figes, 조준래 옮김, <어크로스>, 2017.

2. [E.H.카 러시아 혁명 1917 - 1929](1979), E.H.Carr, 유강은 옮김, <이데아>, 2017.

3. [1917년 러시아혁명 –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1976), A.Rabinowitch, 류한수 옮김, <책갈피>, 2017.

4. [러시아혁명사](1932), L.Trotsky, 볼셰비키그룹 옮김, <아고라>, 2017.

5. [유러피언](2019), 올랜도 파이지스, 이종인 옮김, <커넥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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