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사이토 고헤이의 '인류세의 [자본론]'
- [지속불가능 자본주의](2020)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 사이토 고헤이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완성할 수 없었다.
1883년에 죽은 그가 1867년에 출간한 [자본론] 제1권은 '상품'이라는 '개별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체제라는 '보편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서술방식은 "개별은 보편"이라는 헤겔 논리학의 '변증법'이었다.
1867년의 [자본론] 1권은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시기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전 '독일 이데올로기'나 '철학/경제학 초고' 시기의 '철학'적 단계와 단절되는 '과학'적 단계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준비단계는 1851년 망명지 영국의 대영도서관에서 작성된 마르크스의 24권 '런던노트'였다.
마르크스는 미완의 발췌록과 노트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돌아갔고 그의 사후에 평생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자본론] 2권(자본의 순환), 3권(자본의 총생산과 지대, 이윤 등), 그들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칼 카우츠키에 의해 4권에 해당되는 '잉여가치 학설사'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부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신세(人新世/인류세:Anthropocene)'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부르는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연대하여 '자본의 전제(專制)'에서 인류의 유일한 고향 지구를 지켜낸다면, 그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인신세'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자본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한 '인신세의 자본론'이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마치며>, 2020.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사이토 고헤이(1987~)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과 편지, 연구노트 등 일체 출간을 위해 'MEGA(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 작업에 참여하는 학자다. 그가 독일에서 출간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였다. [자본론]을 준비하던 마르크스의 방대한 연구노트와 발췌 등을 '훈고학'적으로 추척하여 마르크스가 말년에 기획하다가 미완으로 남긴 '생태사회주의'를 이어서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논문의 영문판은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에게 수여된다는 아이작 도이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는 박사논문이었거니와 마르크스의 초고들의 발췌를 기본으로 했으니 상당히 딱딱하고 문헌적이며 어찌보면 교조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했음에도 동일하게 '성장주의'였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말년에 자연과 인간의 원활한 '대사'와 교류를 기획했던 '생태주의'였으며 그러므로 기후위기의 시대에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지와 후계자에 의해 편집되고 요약되어 속간된 [자본론]이 아니라 당대부터 성장 제일주의였던 자본주의와 투쟁하던 '자연과학'이었던 생태주의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자본론]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론] 연구를 이르는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고, '생태사회주의'로서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제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다시 살아난다. 2017년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라는 딱딱한 논문을 벗어나 사이토 고헤이는 2020년에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라는 대중서를 냈는데, 그 부제는 '인신세의 자본론'이고 국역은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다.
'인신세'는 사이토 고헤이의 일본식 작법인 듯 하다. 1995년에 노벨 화학상를 받은 파울 크뤼천이 썼다는 '인류세'를 지칭한다. 정해진 번역어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명칭으로 지금의 신생대 중 인류에 의해 지구가 장악된 시기를 일컫는 일종의 비유적인 용어다. 번역자는 고헤이의 원문에 따라 '인신세'라 쓰나 내게는 '인류세'가 익숙하니,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는 결국 '인류세의 [자본론]'을 뜻한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후계자들을 제치고 이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자본론]을 쓰겠다는 젊은 학자의 자신감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망친 지금의 '인류세'는 '자본세'라 불러야 마땅하나, 인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인류와 자연이 원활한 교류를 해야 하므로 그냥 '인류세(인신세)'로 부르면서 자신이 연구한 말년의 마르크스 [자본론] 연구를 토대로 '탈성장 코뮤니즘'의 실천을 당장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학자지만 '이론'적 비판에 머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분석만 하고 있다가 지구 온도가 2~3도 이상 오르면 한 세대 이내 지구의 대부분은 사막화되고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자본가들만 살아남거나 여차하면 그 소수만 우주 밖으로 탈주하게 된다.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 민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장과 이윤을 위해 인간의 노동은 물론 근본적으로 지구와 자연을 끊임없이 비틀어짜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당장 뒤엎는 실천을 해야하며, 그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무기를 이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가 말년에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쓰가 발표한 '3.5퍼센트 수치'는 '3.5%가 먼저 진심으로 실천하면 다수에 의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법칙이라는데, 우리는 이미 역사속 '민중항쟁'과 혁명을 통해 보아왔다. 사이토 고헤이가 예시한 전세계적 사례에서는 빠졌지만 우리의 2016년 촛불항쟁의 시초도 거의 '3.5%'였을 게다.
그래서 사이토 고헤이의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 말하는 당장의 실천 또한 기다릴 것 없이 '3.5%'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뤄지는 마르크스 재해석의 핵심개념 중 하나는 '커먼(common)' 혹은 '공(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커먼'이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富)를 가리킨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라는 두 마르크스주의자가 [제국]이라는 책에서 제기하여 단숨에 유명해진 개념이다... '제3의 길'인 '커먼'은 수도, 전력, 주택, 의료, 교육 등을 '공공재'로 삼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 '인신세'의 마르크스>, 202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에서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초고들을 추적한다. 1844년의 '파리노트'에서는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포이어바흐로부터 영향을 받은 '청년 헤겔학파'의 철학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노동'에 기초한 사회혁명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획한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정국에서 [공산당선언]으로 역사유물론의 기초를 잡았지만 현실의 혁명은 실패했고, 1849년 영국 망명 이후 작성된 1851년의 '런던노트'에서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철학자'에서 '정치경제학자'로 진화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으로서 [자본론]은 자본주의 총생산 분석의 틀은 잡았으나 마르크스는 이 [자본론]의 기획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을 통해 생산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과 그로 인한 노동의 '소외', 교환가치를 매개로 하면서 인적 관계를 물적 관계로 은폐하는 '물신화(물상화)'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노동으로 이어지는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의 왜곡은 지구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적 약탈로 이어지지만 지구환경이 망한다 해도 결코 멈추지 않는 자본의 자기증식 경향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작업은 막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국가, 그리고 국제정치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자본론]의 대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기후위기 '인류세'에서는 더 이상 연구만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지구와 인류문명의 멸망으로 멈추기 전에 다수 대중의 '3.5%'부터 시작되는 당장의 실천으로 이 자본주의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온 다음해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을 심도깊게 공부한다. 그는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나 당시 그가 연구하던 '자연과학'은 '지대'에 관한 연구를 심화시키기 위해 참고하던 '농업학'이었다. 유스투스 본 리비히와 칼 니콜라우스 프라스라는 농학자들을 우리는 잘 모른다. 이들은 '인클로저' 운동를 비롯한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농축산업에 의한 토지생산성 약탈을 우려했고 마르크스는 이들의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통찰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자본론] 연구에서 "너무나 큰 이론적 전환"([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이 이루어졌고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미완으로 남았다.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남긴 그것을 넘어서 마르크스가 완성하지 못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다시금 잇는 실천에서 그 유산을 이어받아야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은 한가한 이론적 선택이 아니다.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우리 다수대중에겐 다른 선택지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에 맞서 미국에서조차 젊은이들 과반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이 체제의 '지속성장'을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먹고 사는 게 제일 우선"이라고 선전하던 이 자본주의 체제는 다수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을 궁핍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까지 모두 경제성장으로 번 돈으로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자본주의적 희망은 그 실현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하다. 그리하여 현재 자본주의가 이룬 경제성과를 배분하는 'FALC'도 등장했다. 아론 바스타니의 [완벽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선언(FALC)](2019)은 바로 자본주의적 공공재를 절대다수가 재전유하여 불평등 체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매우 낙관적인 전망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아론 바스타니의 주장은 그 바람직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생산력(기술발전)'의 함정에 걸린 "가속주의라는 현실도피"([지속불가능 자본주의], <5>)에 불과하다. '노동의 종말'이나 '엔트로피 법칙' 따위로 '미래학자' 행세를 하는 제레미 리프킨 같은 학자가 내놓는 대안들이나 '그린 뉴딜' 또한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기반한 '가속주의' 또는 '기후 케인즈주의'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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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나 '생산력(기술) 발전'이 아니라 '탈성장'이며 다수들의 연대에 기반한 '연합체(association)'다. 지금의 성장으로도 다수 인류가 충분히 번영을 이루며 살 수 있으니 후진국(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자연과 노동력에 대한 선진국(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약탈과 착취를 멈추고 소수에 독점된 '커먼(common)'을 다수가 재전유하는 '연합'이 필요하다. 이야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다. '탈성장'을 지향하는 다수 개인들이 연합하여 지구가 망하든 말든 자본주의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기만 하다가 안되면 지구를 떠나겠다는 소수의 발상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커먼(common)'이라는 용어 또한 정해진 번역어는 없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1998), [어셈블리](2017)를 통해 다수대중인 '다중'(multitude/mass worker/people)'이 '공통적인 것(common)'을 재전유하는 '연합(association)'을 이야기한다. 즉 '커먼'을 더 많이 만들어 봐야 결국 소수가 독점하는 '결핍의 자본주의'를 벗어나, 현재의 '커먼'과 공공재를 그것을 만든 다수가 재전유하는 '풍요의 코뮤니즘'으로 이행시키는 열쇠는 '평등'과 '탈성장'을 공유하는 전세계적 연합체인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지향하는 '자/개/연(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의 현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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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이 당사자로서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바로 '생산'일 것이다. 그러니 '변혁'을 형한 첫걸음은 '생산(노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7.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 2020.
[21세기 자본]의 '자유주의'에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참여사회주의'로 이행한 토마 피케티에 대한 사이토 고헤이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여기에 기후위기 문제에 기반한 '생태주의'를 결합하되, 피케티처럼 마르크스를 구닥다리로 보지 않고 지속적으로'현대화'시키는 당장의 실천을 위해 그 이론적 기초를 추적하는 것이 사이토 고헤이의 지적 여정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쓰는 '인신세(인류세)의 [자본론]'의 결론은 '노동'과 '생산'에 여전히 기반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 :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멈추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물질대사'로서의 '사용가치'가 양적이고 '물신화(물상화)'된 '교환가치'보다 우선될 것.
2) '노동시간 단축' : '노동일' 단축과 '생산혁신'을 통해 '교환가치'의 양적 생산영역이 아닌 '사용가치'의 질적 생산영역인 여가노동(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것.
3) '획일적인 분업폐지' : 노동자가 생산의 일부만이 아니라 생산과정 일체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물을 함께 전유할 것.
4) '생산과정의 민주화' : 노동자 자주관리와 상호부조에 기초한 민주적인 생산과정은 '경제성장'의 덫에 빠지지 않는 '탈성장'의 기본 운영구조이므로 더디더라도 생산과정 일체를 민주화할 것.
5) '필수노동 중시' : '교환가치' 우선의 '물신화'를 극복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돌봄(감정)노동과 공공재 생산의 '필수노동'은 기계화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중시하고 지켜낼 것.
막연한가?
언제 어느 시절에도 '변혁'과 '혁명'은 그래 왔다. 그럼에도 '인류세'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인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환경의 운명을 책임지는 임무는 우주 먼 별에서 그랜다이저를 타고 온 '듀크프리드' 왕자나 소수 독점자본가와 정치권력이 아니라 화성으로 도망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대다수에게 있다.
사이토 고헤이는 '소비주의'적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부터 플라스틱 줄이기와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 등을 실천하면서 더 나아가 진지하게 '탈성장'과 다시금 '평등'을 곱씹어 봐야겠다.
[자본론]의 전체적인 윤곽은 잡았지만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 복원에 머리를 싸맨 채 도서관에 처박혀 '자연과학(생태학)'과 게르만 '마르크공동체', 러시아의 '미르' 등과 같은 '지역공동체' 등을 공부하며 여전히 '런던노트'를 쓰던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커피숍에서도 플라스틱 빨대는 받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쓰는 '인류세의 [자본론]'이다.
***
1.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2.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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