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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Nov 21. 2021

[범죄소설의 계보학](2018) - 계정민

추리소설의 '변증법'과 '리얼리즘'

추리소설의 '변증법'과 '리얼리즘'

-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어린 시절 친구의 집에 있던 '셜록 홈즈' 전집은 검은색 표지의 얇은 단편이 50권 정도의 한질을 이루고 있었다.


1984년에 그리 친하지 않았던 같은 반 급우의 집으로 자주 놀러간 이유가 '84 태권브이' 책받침을 계속 보고 싶어서였다면, 1985년 즈음 학교도 달랐던 아주 어린 시절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간 건 오로지 검은색 표지의 '셜록 홈즈' 단편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집에는 노란색 표지의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위인전집' 각 50권씩 100권이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당시 나는 '셜록 홈즈'의 신세계를 만나 '독서'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사실 세계문학전집은 TV에서 방영하던 일본만화와 전집의 삽화 중심으로 건성건성 읽었을 뿐, 4학년 '독서반' 특활시간에는 6개월 내내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만 들고 갔음에도 결국 다 읽지도 못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을 당시의 어린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정확한 연도는 지금에 와서의 추정일 뿐, 내가 단편소설이나마 '책'이란 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게 된 건 오로지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덕분이었다. 이실직고 한다면, 친구가 잃어버린 셜록 홈즈 한 두 권은 내가 반납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 책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사뭇 궁금하다. 아마도 50권의 단편 중 엄선한 나만의 '베스트 컬렉션'이었겠다.


이후 오락실만 전전하던 내가 다시 '책'이란 걸 펼친 게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도의 애거서 크리스티 장편소설이었다. 동네 형의 어둑한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해문출판사>의 추리소설 몇 권은 내 인생 최초로 완독한 장편소설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내 인생의 명작이다. 곁가지로 읽었던 엘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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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단편의 호수에서 물에 뜰 수 있도록 한 것은 코넌 도일의 '홈즈'였고, 장편의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 '포와로'와 '미스 마플'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나보다 젊었을 마약쟁이 스포츠맨 '셜록 홈즈'와 얼핏 내 나이 쯤일 멋진 콧수염의 키 작은 '에르퀼 포와로', 언제까지나 수다스럽게 뜨개질을 하는 노처녀 할머니로 남아 계신 '마플 양'은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나에게는 이들이야말로, 사회악을 응징하는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나는 '뉴게이트 소설'의 전복성이 초기 자본주의 체제의 잔혹성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뉴게이트 소설' 이후에 등장한 '(고전) 추리소설'은 '뉴게이트 소설'의 급진적인 흐름을 분쇄하고 되돌리려는 보수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했다. 추리소설은 지배계급에 대한 도전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범죄에 대한 처벌을 통해 기존 체제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나는 추리소설이 '뉴게이트 소설'의 전복성을 무력화시키려는 지배계급의 입장과 함께 한다고 보았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머리말>, 계정민, 2018.


19세기 영국의 '실버-포크 소설'과 '댄디즘 소설'을 재조명한 계명대 영문학과 계정민 교수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2021)에 관한 서평을 쓰다가 영문학사의 비주류 소설을 소개하는 저자의 연구에 이끌려 그의 2018년작 [범죄소설의 계보학]을 읽게 되었다. 역시 당대 소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영문학사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다수가 잊혀진 '추리소설'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저자는 문학이 토대로 하는 사회적 배경에 관한 탄탄한 관점을 이 책에서부터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배경은 바로 '계급투쟁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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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민 교수는 '추리소설'만을 다루지 않는다. 더 큰 범위로 '범죄소설'이라 분류되는 이 장르는 18세기 말과 20세기 초중반을 통과하면서 사회문화적 배경을 투영한다. 이 책의 제목 '범죄소설'의 '계보학'을 따라가는 영문학사의 여정이다.


1. '뉴게이트(New-gate) 소설' : '변증법'의 시작



"뉴게이트 소설의 부상은 형법 개혁운동으로 대표되던 변혁적 움직임과 함께했다. 뉴게이트 소설은 범죄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기인하며 범죄자 개인에 대한 처벌은 부당한 계급적 탄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범죄를 하류계급에서 주로 발생하는 전염성 강한 질병으로 정의하고 범죄의 박멸을 위해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의 필요성을 주장한 지배적 범죄담론을 전복시키려 한 것이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1. 뉴게이트 소설>, 계정민, 2018.


18세기 영국의 중죄인들이 수감된 '뉴게이트' 감옥에서 집행된 공개처형은 대중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아마도 중세 이단자 화형식과 같이 법을 어긴 죄인에 대한 응징을 공개하면서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고 대중들에게 공포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장치였을 것이다. 1773년에는 이 사형수들의 전기를 [뉴게이트 캘린더]라는 제목으로 대중에게 배포했다. 지배질서에 도전하지 말라는 지배계급의 선전물이었겠지만, 시대는 프랑스 대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뉴게이트 캘린더]에서 다룬 중범죄자들은 19세기에 이르면 불워-리턴 같은 작가들에 의해 발표된 '뉴게이트 소설'을 통해 부당한 지배질서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대혁명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지에게 '사유재산'은 신을 대신했고 이를 침해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대혁명의 배신으로 버림받은 하류계급은 19세기 영국에서 형법 개정운동을 전개했고 '뉴게이트 소설'이 보여준 전복성의 배경은 '사유재산의 신성화'와 '잔혹한 형벌의 완화'라는 '계급투쟁'이었다.

'뉴게이트 소설'은 범죄소설 계보학에서 '변증법'의 시작이었다.


2. '고전 추리소설' : '부정'의 단계



"추리소설에서 분석과 추론을 통해 범죄를 해결하여 사회체제를 수호하는 인물은, 하류계급 출신 경찰이 아니라 상류계급 출신 탐정인 것이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2. 추리소설>, 계정민, 2018.


'뉴게이트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범죄자였다. 그러나 그 주인공들은 결코 지배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한 채 장렬히 처형당하거나 파멸한다. 영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히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뉴게이트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은 '전복성'과 '보수성'의 타협이었다. 초기 자본주의 빈민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고발하면서 한편으로 주인공을 범죄의 소굴에서 구출한다. 이 과정에서 범죄자를 추적하고 단죄하는 '추리소설'의 씨앗을 내포하는데, 추리소설의 '변증법'에서 '부정'의 단계 또한 내포하는 맹아이기도 하다.



이제 이 '변증법'의 부정의 단계로서 '(고전) 추리소설'의 주인공인 '탐정'이 본격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셜록 홈즈와 에르퀼 포와로, 미스 마플은 물론 디킨스의 연구자로서 [모르그가의 살인]이라는 최초의 '추리소설'을 쓴 에드거 앨런 포의 탐정 뒤팽은 모두 상류계급 출신이다. 이들이 백인남성 또는 미혼의 노처녀 할머니인 이유는 기존 지배계급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찰이나 여성 탐정처럼 '생계'가 아닌 '지적 유희'로써 범죄를 수사한다. 여성 탐정은 사회활동을 하는 본인을 비하하면서 결국 결혼을 통한 '가정의 천사'로의 은퇴를 꿈꾸는 반면 노처녀 할머니 탐정은 이런 혐의에서 벗어나 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 모리아티 교수가 잉글랜드에 격렬히 저항한 아일랜드인인 이유는 식민지 개척과 지배가 한창이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외국인에 대한 영국인들의 배제와 공포가 녹아있다. 실제로 작가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는 제국주의자였고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상류계급을 옹호했고 식민지 출신 인도인들을 짐승화했으며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다. 그들의 소설 속 탐정들은 범인은 색출하되 결코 사회모순을 고발하지 않는다. '뉴게이트 소설'에서 사건의 전말을 고발하던 범죄자들은 이제 '(고전)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에게 일체의 발언권을 빼앗긴다.

청소년기 나에게 추리소설 작가들이 가르쳐준 '정의'는 곧 지배질서의 다른 말이었다.

'(고전) 추리소설'은 범죄소설 계보학의 '변증법'에서 '부정'의 단계였던 것이다.


3.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소설' : '부정'의 '부정'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 탐정의 재현이 이전과 극명하게 달라진 것은,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회질서와 정의의 회복과는 거리가 먼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결말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고전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의 개입에 의해 혼란과 불의가 사라지고, 질서와 정의로의 이행으로 서사가 종결된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의 분투에 의해 개별범죄가 해결되어도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다가올 거대한 불의와 혼돈에 대한 불안으로 서사가 종결되는 것이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3.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계정민, 2018.


무대는 1920년대 미국으로 넘어간다. 1차 세계대전으로 국제정치 권력관계는 재편되었고 세계 자본주의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다. 20세기 초 금융자본주의 시대 신흥 강대국 미국의 화려한 번영은 '재즈 시대'로 불렸고 유럽의 귀족적 탐정들은 신대륙의 생계형 터프가이 탐정들에게 바톤을 넘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 소설은 완숙된 계란노른자처럼 딱딱하고 비정하고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리얼리즘'이다. 추리소설 또한 '부정의 부정'을 거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되는데, 이 '변증법'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정-반-합'으로 완성되는 해겔식 '변증법'일 수 없었다. 끊임없이 부정되고 또 부정되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과정 자체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더이상 상류 계급이 아닌 거리의 터프가이 탐정과 이런 남성들을 성적으로 유혹하여 이득을 취하다가 결국 파멸하고 마는 여성악당인 '팜므 파탈'이다. 귀족적 향수가 잦아든 20세기 초 미국 '프롤레타리아' 탐정들은 시정잡배처럼 굴러먹다가 불굴의 의지로 사건은 해결하지만 역시나 '정의' 실현보다는 사적인 복수에 의존하고, 저자에 의하면 이들의 대적자로서 '팜므 파탈'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가계급과 똑같다. 그러나 '하드보일드 소설'은 사회 절대악인 자본가계급 대신 그들을 닮은 하류계급 출신 '팜므 파탈'만 응징하고 만다. 사건이 해결되어도 자본가는 여전히 이익을 취하고 세상의 지배질서는 변함없다. 탐정의 모습이 '부정'되고 악당의 형상이 '부정'되지만 부조리한 세상이 궁극에 '부정'되지 않는 점은 '(고전) 추리소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종속적 여성 탐정으로 부각되던 젠더 문제는 '팜므 파탈'의 탐욕과 파멸로 인해 더 후퇴하기도 한다.



저자인 계정민 교수는 이러한 '범죄소설의 계보학'을 통해 '변증법'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전 장르와 이후 장르 사이의 '대립("공격")'과 '타협("협상")'의 관계로 설명한다.

18세기 부르주아 대혁명배경 속에서 등장한 '뉴게이트 소설' 체제 전복성은 19세기 노동계급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배계급의 반격으로서 '(고전) 추리소설' 유행시켰고 20세기 금융자본주의 패권을 배경으로 '정의' 실현 대신 가엾은 여성만을 파괴시키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전화된다.


결국 이 추리소설의 '변증법'이 또 다시 어떻게 대립하고 타협하며 전환될 것인가는 '추리소설'이라는 '문학의 요충지'가 얼마나 시대를 사실적으로 반영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범죄소설은 계급, 민족, 인종, 젠더를 향한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이 경합하고 충돌하고 타협하는 '문학의 요충지'로 존재해 왔다. '뉴게이트 소설', '(고전) 추리소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라는 범죄소설의 흐름 속에서 뒤에 나타난 장르는 앞서 나온 장르에 대해 공격의 칼을 휘두르기도 했고, 협상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 [범죄소설의 계보학], <맺음말>, 계정민, 2018.


추리소설에서도 역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


-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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