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포크'와 '댄디즘'이 영원하지 않듯
'실버포크'와 '댄디즘'이 영원하지 않듯
-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계정민, <소나무>, 2021.
"실버포크 소설이 가져온 변화 혹은 폐해는 넓고도 깊었다. 노동계급과 소작농 집단을 제외한 영국인들이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패턴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이들 모두는 짐작하지 못했다. 동경과 모방의 대상인 귀족들은 이미 구별짓기를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는 사실을."
-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1-1. 실버포크 소설>, 계정민, 2021.
우리 사회 세대론을 상징하는 용어로 '금수저-흙수저론'이 있다. 재벌을 비롯한 상위 자본가 계급의 자녀들은 태어날 때 '금수저'를 물고 나오고, 다수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은 '흙수저' 또는 아예 수저 자체가 없다는 비유다. 아주 소수인 '금수저'보다는 못하지만 부유한 상층 부르주아들은 '은수저'로도 분류된다. 그들은 사회체제와는 무관하게 본인의 '능력'에 대한 '댓가'로 부를 축적했다고 생각하며 자녀에게 '교육' 자본과 '부동산' 자본을 세습하는 '세습중산층' 사회의 주축이다.
19세기 초 영국 문학 중 '실버포크(Silver fork)' 소설이 있다. 당시 몰락해 가던 대토지 소유 귀족 계급의 생활방식을 세부적으로 묘사한 소설들이었단다. 영문학을 전공한 나도 사실 몰랐다. 18세기 영국 소설에서 상류계층을 풍자했던 '코믹(Comic)' 소설과 또 다르게 그들을 비꼬았던 '벌레스크(Burlesque)' 소설은 들어봤다. 헨리 필딩이라는 '벌레스크' 소설가는 자신의 풍자소설 [조셉 앤드류스]의 '서문'에서 '코믹'은 '자연스러운(natural)' 풍자인 반면, 본인의 '벌레스크'는 '부자연스러운(unnatural)' 형태로 세태를 풍자한다고 규정했다. 필딩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모방(imitation)'했다고 책표지에 쓰고 있는데, 실제로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행실은 기묘하고 기괴하다. 돈키호테처럼 현실의 인물이라면 할 수 없는 우스꽝스런 모습들로 가득하다. 영문학에서는 이후 19세기 영소설에서 찰스 디킨스의 '사실주의'로 넘어가던 기억이 있다. 물론 전공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아 내가 빼먹었을 수도 있겠다.
계명대 영문과 계정민 교수는 19세기 영국 소설에서 등장했다가 사라진 '실버포크' 소설 이야기를 소개한다.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2021)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은 19세기 영국의 '실버포크' 소설과 이에 따른 '댄디즘'의 부상 및 몰락을 그리고 있다. 부제로 '댄디즘'의 핵심인 '패션의 권력학'을 썼지만, 책의 내용은 '패션'보다는 근대 이후 계급문화의 흐름을 짚고 있다.
'실버포크(Silver fork)'는 생선요리를 먹을 때 '은으로 된 포크'를 쓰는 계층을 이른다고 한다. 상층계급의 생활양식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소설 부류였는데,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급부상하던 산업(상업)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선거권 확대를 통해 정치적 주류가 되었음에도 장악할 수 없었던 기존 대지주 귀족 계급의 '문화자본'을 따라할 수 있게 한 일종의 '지침서'였다고 한다. 소설의 플롯 자체는 흡사 지금의 막장 드라마와 같았을 것인데, 묘사 자체가 너무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라 은둔작가 에밀리 브론테 조차도 당대의 '실버포크' 여소설가 고어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단다. 덕분에 상류층의 생활상을 직접 보지 않고도 간접경험했고 자신의 소설쓰기에 활용할 수 있었음에 대한 감사의 편지였다. '실버포크' 소설 주인공들은 귀족적 삶을 동경하고 따라하려던 부르주아 또는 자본주의 발전으로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서 돈은 없지만 귀족적 문화가 몸에 배인 젊은이로 우연히 거대한 유산을 받아 귀족적 '실버포크' 인생을 완성하거나 몰락하는 내용들이라고 한다. 영국 소설 계보에서 소수에 해당했을 이 '실버포크' 소설은 영문학자 계정민 선생의 이 책에 의해 세밀하게 분석되고 소개되고 있다.
영문학사에서 유명한 토머스 칼라일이나 윌리엄 새커리 같은 비평가/소설가들은 이 '실버포크' 소설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문학이 담아야 할 역사와 철학, 사상을 소홀히 한 채 상업적 인기에만 영합하는 '속물(snob)'들이라는 것일진데, 이런 속류 소설들을 출판기획하고 뻥튀기 서평까지 곁들여 돈을 번 헨리 콜번은 지금까지 문학계에서 조롱과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지만 저자에 의하면 콜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학이 가게 될 길을 조금 앞서 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문학(예술)성'과 '상업성'의 관계를 보면 이해할만한 이야기다. 물론 저자의 이력이나 각종 사실관계를 부풀리거나 속여서 '서평'을 먼저 뿌렸다는 출판기획자 콜번의 사기 마케팅은 앞서도 너무 앞섰을 테다.
"돈으로 '휘감은' 중간(부르주아) 계급은 상류사회 진입을 위한 예비단계는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예선통과자'에게는 본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 계급은 유일하게 남은 무기인 문화자본으로 최종 방어기지를 구축했고, 구축한 문화요새의 전위에는 '댄디'가 서 있었다. '댄디'가 '허영심 많은 젊고 경박한 맵시꾼'이 아니라 귀족 계급이 선포한 문화전쟁의 선봉대인 까닭이다."
-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2-3. 댄디의 탄생>, 계정민, 2021.
이제 본격적으로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고 말한 주체가 등장한다. 그들은 '댄디(Dandy)'들이었다. 자신의 옷차림과 '패션', 치장된 육체를 타인들에게 '전시'하던 귀족 계급 남성들이 바로 '댄디'들이었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와 노동의 영역에는 결코 발을 들이지 않는 몰락한 귀족주의가 '댄디즘(Dandyism)'이었다. 그래서 '실버포크' 소설은 '댄디' 소설이었다.
물론 산업혁명 이전 대지주 귀족 계급은 대부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면서 '정직, 성실, 근면' 등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강조되었고, 실제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전담했음에도 이런 지배윤리로 무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도저히 귀족들의 '무위'적 생활방식을 진실로 따라갈 수 없었다. 몰락하던 귀족들은 이런 신흥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진정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재산과 시간을 몸 치장하는데 허비하고 바쁘게 다니는 부르주아 계급(중간계급) 사이에서 '거북이를 데리고 산책하기' 등을 시전하던 '댄디'들을 그래서 부르주아들은 '감히 넘볼 수 없었다'. 몰락하는 귀족들은 '무위'와 '권태'로 무장한 '댄디즘'으로 시대에 대항했지만, 결국 자본주의 발전과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이라는 역사적 경향을 되돌릴 수 없었다. 중국 역사학자 이중톈의 전공인 [위진풍도]는 5세기 위진 남북조 시기 진취적인 이민족 북조에게 밀려 남하한 한족 남조의 '사족'들의 '무위'적 삶을 '위진풍도'라 하였다. 몰락해 가던 귀족 자제들이 일은 안하고 몸치장과 고담준론, 음주향락에 빠지고 남성들이 연약하고 흰 피부에 하루 종일 화장하며 칼이나 붓 대신 부채나 들고 다니다가 허약한 몸으로 길거리에서 실신하는 행태는 19세기 영국의 '댄디'의 모습 그대로다. 실리보다 명예를 앞세우는 '결투'를 하기도 했지만 영국의 '댄디'들은 여성화된 남성이었다는데, 귀족들이 양성평등의 진보성이 있었을리는 만무하고 그저 '성실, 근면, 노동'의 새로운 지배윤리에 저항하고 "감히 넘볼" 필요 조차 못 느끼게 만들려는 최후의 발악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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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의 5세기 '위진풍도'가 이후 [삼국지연의] 등의 문학에서 제갈량의 모습 등으로 부활했듯, 몰락한 '실버포크'의 '댄디즘'은 부르주아 계급 뿐만 아니라 '혁명전사'가 될 다수 노동자 계급의 집단적 욕망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1840년대는 가난의 문제와 '빈곤의 문화'가 압도적으로 부각된 시기였다. 소비와 과시로 요약되는 귀족 계급의 생활양식은 더 이상 찬탄과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분쇄해야 할 시대착오적인 악습으로 규정되었다. '실버포크' 소설의 몰락은 이제 예정된 수순이었다."
-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3-6. 실버포크 소설을 감시하기>, 계정민, 2021.
영국의 '곡물법'은 1846년에 폐지되었다. 곡물 수입을 제한하고 귀족들 땅에서 나온 곡식 만 비싸게 유통시킴으로써 대토지 소유주의 이익만 늘리고 다수 민중들은 기아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곡물법'을 존속시킨 귀족들은 더이상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증오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1840년대 노동자 혁명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실버포크'와 '댄디' 또한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했다. 찰스 디킨스 같은 소설가는 초기 영국 자본주의 현실을 그리는 영국 근대소설의 전형이 되었고, 아일랜드 식민지의 현실을 그리려는 제임스 조이스 같은 굵직한 영문학 소설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 '실버포크' 소설가들 조차도 '댄디즘'을 버렸다. 그러나 '댄디즘'은 사라지지 않았다.
1851년 영국 수정궁 박람회는 산업혁명으로 전성기를 향해 기관차처럼 치달리는 영국의 산업과 생산품들을 전세계에 전시했고 계급의 '혁명전사'가 되어야 했던 다수 노동자 계급은 물론 식민지 '해방전사'가 되어야 했던 식민지 민중들까지 자본주의 상품 소비의 거대한 대열에 포섭되었다. 몰락 귀족의 사치스런 '댄디즘'을 "감히 넘볼 수 없던"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적 공급과잉 상품을 무기로 몰락한 소수 귀족은 물론 부상하는 다수 노동자 계급과 식민지 민중들을 사로잡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 상품들을 모두가 "넘볼 수 있게" 하는 환상을 심어 다수 민중들이 자본가들의 정치경제적 독점권력을 "감히 넘볼 수 없게" 만들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수많은 정보와 자산이 교류되고 공유되는 지금, 소수 자본가들의 생활방식과 문화자본 일체 또한 오래전 '댄디즘'처럼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게" 존재하던 소수의 권력이 보다 많은 다수의 점유를 통해 '사회화'될 수 있는 기반도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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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실버포크'와 '댄디즘'이 영원하지 않듯,
영원한 체제도, 영원한 계급도 없다.
세상에 "감히 넘볼 수 없는" 것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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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 - 패션의 권력학], 계정민, <소나무>, 2021.
2.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3. [Joseph Andrews](18세기), Henry Fielding, <N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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