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실천'은 '해방'이다
'이데올로기'의 '실천'은 '해방'이다
- [20세기 이데올로기], 윌리 톰슨, 2011.
"지배적인 '사상(이데올로기)'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사상으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그 자체일 뿐이며, 따라서 어느 한 계급을 지배 계급으로 만들어주는 관계들의 표현이고, 따라서 그 계급의 지배 사상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3.>, 1845~1846.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면 "망상과 관념과 도그마와 환상적인 존재들([독일 이데올로기], <서문>)"로서 물질적 세계를 떠나 존재하는 척 하는 '허위 의식'이었다. 그 전형은 독일의 사변철학자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유물론'으로 인류를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최초의 '과학'적 시도였다.
"이데올로기란 한 주어진 사회 내에서 역사적 존재와 역할을 지닌 하나의 표상(이미지들, 신화들, 경우에 따라서는 관념이나 개념들) 체계(고유한 논리와 엄격성을 지닌)라는 정도로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 이데올로기는 사회들의 역사적 삶에 본질적인 구조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은 대부분의 경우 이미지들이거나 때로는 개념들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은 무엇보다도 '구조'들로서... '지각되고-수용되고-체험된' 문화적 대상들이며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대중의 표상체계로서) 이데올로기의 '계급'적 기능을 논할 때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바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피착취 계급을 지배하는 데 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이 세계와 체험한 관계를 현실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지배 계급으로 형성되는 데'에도 봉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 1965.
1965년,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라는 저작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였다. '대상'을 가지고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과 말 그대로의 '허위의식'이지만 물질적 힘을 지니는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이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인 '철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1. 20세기 '극단의 시대'의 이데올로기들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권력에의 의지와 결부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네 가지(자유주의/보수주의/공산주의/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지적 토대를 다루지만, 주된 관심은 이데올로기들의 역사적 적용과 작용을 고찰하는데 있다. 이론을 논의하긴 하겠으나,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실천(praxis)'이다...
... 혁명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가 지닌 강점과 매력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자유주의는 17세기 영국에서 등장한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 기초한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도 완벽하게 잘 돌아갈 수 있으며, 빈번히 그래왔다...
... 실지로 보수주의는, 토지 소유 및/또는 그와 연결된 교회와 장교군단과 같은 전통 기관들로부터 수입을 얻고 있으며 기존 상황의 변화를 결사반대하는 사회 계급 및 지위의 이데올로기에서 기원했다...
... 19세기 중반 유럽에 새로 등장한 이데올로기에서는 자유주의를 유산 부르주아지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낙인찍고, 스스로도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그와 동시에 '보편성'을 주장했다.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바로 사회주의인데,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변형태가 그러했다...
... 무엇보다도 파시즘 자체는 위기 즉 전쟁과 부차적 사회혼란 그리고 경제붕괴 및 문화적 불안이라는 위기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 [20세기 이데올로기], <서론: 개념 정의 및 개요>, 윌리 톰슨, 2011.
영국의 역사학자 윌리 톰슨(Willie Thomson:1939~)은 1991년 영국공산당이 해체될 때까지 활동한 사회주의 역사학자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부터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1991년까지 기간을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로 규정하며, 제1~2차 세계대전의 1914~1945년을 '대참사의 시대'로, '자유주의' 진영이 추축국 파시즘에 승리한 후 냉전을 통해 자본주의/공산주의 경제번영을 이루던 1945~1973년을 '황금시대'로, 세계경제 위기로 경기가 하향선을 그리다가 결국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진 1973~1991년을 '위기'로 구분한다. 각 시기를 각 부로 나누고 각 부의 첫 장에 '경제 및 사회여건'을 다룬 후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 네 가지 이데올로기들의 역사를 소개하는 저서가 바로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다. 그는 20세기 세계사에서 이데올로기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지만 역사에 적용된 그 '실천(praxis)'적 형태를 강조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역사 속 중앙집중식 계획경제 또는 명령경제에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 불가능했던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는 저자 윌리 톰슨은 인류 보편의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위 네 가지 '이데올로기'들의 특성을 서술한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는 '허위 의식'이자 사변적 '관념'에 불과했던 '이데올로기'는 20세기 루이 알튀세르에게는 그럼에도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힘을 지니면서 역사유물론의 '과학'에 의해 구분되는 '철학'의 지위를 획득한다. 21세기에 노구의 역사학자가 보기에도 '이데올로기'는 인류사에 매우 중요한 '사상'을 의미한다. "의식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된 모든 이데올로기는... '해방'을 약속"(같은책, <3-15>)하는 이유다.
2.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예외적으로 '해방'에 역점을 두고 있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해방이란 개인을 사회의 규율로부터 구제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사유재산'은 개인의 인격과 긴밀하게 엮여있다."
- [20세기 이데올로기], <2-7. 우파 자유주의>, 윌리 톰슨, 2011.
자유주의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기본 사상으로서 신화나 종교가 아닌 인본주의 사상의 시초였다. 부르주아의 부상과 함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며 사유재산을 신성시했다. 토마 피케티는 자유주의를 아예 '소유주의'로 부른다. 자유주의는 '해방'을 향한 모든 이데올로기의 뿌리다. 그러나 보통선거권 쟁취의 정치적 평등은 지향했으되, 경제적으로 자본의 자유로운 시장을 옹호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경제적 토대로서 자본의 영역에서는 철저히 반민주적이다. 자본주의 최고단계에서 더이상 진보적이지 않은 자유주의는 경제 위기를 맞은 1970~80년대에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주의와 유착하여 '신자유주의'가 된다(같은책, <3-12>). 우파 자유주의인 신자유주의와 좌파 자유주의인 사회민주주의는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개량하는 주요한 두 이데올로기다.
3. 보수주의
"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 때문에 그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앙시앵-레짐(구체제)을 옹호하기 위한 논증을 준비해야만 했다."
- [20세기 이데올로기], <1-3. 보수주의>, 윌리 톰슨, 2011.
보수주의는 하나의 정립된 사상이 아니다. 그냥 지배 이데올로기 일반이다. 근대 이전에는 왕정과 이에 결탁한 가톨릭으로 그만이었다. 그러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사상으로서 자유주의가 부상하고 시대정신이 되자 이에 반발하여 결집된 구 지배 계급의 대항 이데올로기가 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토지 소유 귀족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부르주아적 프로테스탄티즘에 맞선 가톨릭 구교 세력들이 주축이 된다. 이후로 '기독교' 등 지배 종교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한 자들이 '보수주의'를 앞세웠고 결국 기존 질서 유지와 보존을 본질로 하는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필연적으로 유착하여 '신자유주의'가 된다. 기존 질서와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는 보수주의는 언제 어디서든 '파시즘'과도 결탁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2차 대전에서 왕정복고 보수주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벗이었다.
4. 공산주의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뒤이어 소비에트 국가가 살아남지 못했다면, 이전의 식민지 세계에 있던 대부분의 국가는 여전히 식민지로 남아있을 것이며, 중국 역시 반(半)식민지 상태로 남았거나 조각난 제후국들의 집합이 되어있을 것이다. 게다가 냉전 기간 서유럽 주민들에게 '공산주의'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고 하는 위협 덕분에, 그런 위협을 중화시키기 위해 자본의 포식적 본능을 견제하고 노조의 세력을 용인하며 적절한 복지체계에 자금을 지원하여 복지국가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었다."
- [20세기 이데올로기], <3-13. 공산주의>, 윌리 톰슨, 2011.
공산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역사 속 현실체제를 이른다. 저자는 사회주의 일반을 다루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 1991년 소비에트연방에 이르기까지의 현실 공산주의의 '실천'을 바탕으로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유로코뮤니즘 등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를 묶어서 서술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는 사유재산을 신성화시키며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설파하는 반면, 사회주의는 인류 보편의 '해방'을 주장하며 등장했고 정치경제 체제의 변혁을 통해 해방을 쟁취하려던 '과학적 사회주의'가 한때 세계의 1/3을 차지했음에도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한 체제임을 돌아본다. '과학'을 이야기했지만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적 '공상'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의 한계다. 새로운 체제를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없는 한 '반세계화' 운동과 같은 전세계적 다수 대중투쟁도 시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노년 사회주의자의 냉정한 평가로 마무리된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던 영국의 보수주의자 마거릿 대처의 슬로건은 "대안은 없다(There's No Alternative)!"였는데, 자본주의 체제가 건재하고 새로운 대안체제가 등장하지 못하는 한 '자유주의'가 주류 이데올로기가 된다.
5. 파시즘
"파시즘을 정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특징 같은 것은 없지만, 의사혁명론, 권위주의, 포퓰리즘적 극단적 민족주의는 군사화된 함의들과 함께 파시즘 전체를 거의 모두 포괄한다."
- [20세기 이데올로기], <1-5. 파시즘>, 윌리 톰슨, 201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계급 전쟁에서 어느 편도 우위에 서지 못했을 때 등장하는 세력이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의 조카가 등장한 '보나파르티즘', 20세기 '국가사회주의'를 내건 무솔리니를 보고 옥중의 그람시가 고대 로마의 공화정에서 등장한 케사르(시저)에 빗대어 명명한 '케사리즘', 우리 역사를 포함하여 등장한 '군사정권'들. 이들은 군사조직을 기반으로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이며 의사(사이비) 혁명적이지만 본질은 독점자본의 정치적 대변자였다. 경제 위기와 대량 실업의 재난을 배경으로 등장한 이들은 살기 힘든 다수 노동자민중들의 분노를 군사적 전쟁이나 테러로 대리표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그랬고, 공화정을 무력화시킨 모든 군부독재의 모습이 그랬다. 사상적으로 일관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자들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고대 로마 단결의 도끼묶음에서 착안하여 만든 '파시스트당'의 이름에서 유래한 '파시즘'으로 통칭되는데, '반공주의', '인종주의', '군국(군사)주의', '(총통)전체주의', '(신화적)신비주의' 등을 내세우는 세력 일체를 '파시즘'으로 보면 된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일 히틀러, 일본 천왕주의, 스페인 프랑코, 우리의 군부독재정권 일체가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보수주의와 가장 가까운데, 경제 위기의 피를 먹고 자란 파시즘의 '혁명'은 다수의 해방을 위한 그것이 아니라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고 사적이익을 빨아먹으려는 쿠데타이기에 그렇다. 역시 자유주의자들 또한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존속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파시즘과 손을 잡는다. 전간기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의 체제 위협을 두려워하여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맺고 경제교류를 했다. 파시즘은 계급투쟁 과정에서 위기가 닥치면 언제든 창궐할 수 있는 독버섯이다.
6. 이데올로기의 '실천'은 '해방'
"그러한 이데올로기들 중에 지금까지 가장 가공할 만한 것은 공격적인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지난 200년 동안 그 힘이 크게 변해왔지만 언제나 중요하게 남아 있었던 일종의 '정체성 정치학'이었다. 냉전이 진행된 몇 십 년 동안은 양쪽 진영 모두 민족주의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개별적인 공산주의 조직들이 붕괴되거나 변형되기 훨씬 전에 국제 공산주의 조직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민족주의의 힘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 [20세기 이데올로기], <3-15. 1991년 이후>, 윌리 톰슨, 2011.
윌리 톰슨은 현대사에서 자유주의/보수주의/공산주의/파시즘의 이데올로기 '실천사'를 통해 현재는 '자유주의'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지만, 자유주의 또한 '유토피아'적 공산주의 못지 않게 그리스도 재림의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유토피아적 측면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데올로기가 어떤 측면에서든 "해방을 약속"하는 한 체제가 변혁되고 대안의 가능성이 있다면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경험은 위기와 재난이 그러한 희망을 없애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같은책, <3-15>)고 쓰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민족주의'는 이러한 '20세기 이데올로기'들의 전반적인 투쟁 속에서 지역적이고 국지적 운동의 기본 이념으로 기능하나 이 책에서는 본격적인 이데올로기로서 다루지 않는다. 그저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는 식민지 민중들의 해방 이념이었던 반면, 극단적 민족주의는 인종차별주의를 토대로 한 보수주의이자 더 나아가 파시즘의 형태였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상투적이지만, 역사 속에서 '해방'을 향한 '이데올로기'의 '실천'적 힘을 믿는다면, 위기와 재난은 인류의 '희망'을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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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 Willie Thomson, 전경훈 옮김, <산처럼>, 2017.
2.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박재희 옮김, <청년사>, 1991.
3.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 루이 알튀세르, 고길환/이화숙 옮김, <백의>,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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