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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Nov 06. 2021

[민족](2013) - 아자 가트/알렉산더 야콥슨

'민족 현상학' : 시민적 민족주의 vs. 종족적 민족주의

'민족 현상학' : 시민적 민족주의 vs. 종족적 민족주의

- [민족](2013), 아자 가트/알렉산더 야콥슨, 유나영 옮김, <교유서가>, 2020.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민족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민족'의 주권자를 '군주'에서 '인민'으로 교체한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민족에 대중적 에너지와 충성심을 불어넣은 건 덤이었다... 전면적 '근대화' 과정은 '민족주의'를 출범시킨 게 아니라 '해방'시키고 '변화'시키고 '강화'하는 동시에 그 정당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그러니까 '대중주권(민주주의)'은 '민족주의'에 기여하는 동시에 '민족주의'가 '해방'될 출구를 제공했다."

- [민족], <6. 근대 : 해방되고 변형되고 강화된 민족주의>, 아자 가트, 2013.



한때 '민족'과 '민중'이 '대립'되는 개념으로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국가와 사회의 주인은 '민중'이었는데 소수의 권력자들이 앞세웠던 '민족'과 '민족주의'는 다수 인민/국민/민중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군부독재정권에서 '해방'을 위한 가장 주요한 가치는 '민주주의'였고, '민주'를 중심으로 '민족'과 '민중'의 운명은 엇갈리는 것만 같았다.


'민족주의'도 시대를 풍미한 '이데올로기'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윌리 톰슨은 자신의 저서 [20세기 이데올로기](2011)에서 20세기 '극단의 시대'를 관통한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사회주의)', '파시즘'의 역사적 계보학을 그리면서 '해방'을 약속하는 이데올로기의 실천을 서술한다. '자유주의'가 '승리'한 듯 했던 1991년 이후 "가장 가공할 만한" 이데올로기로서 "공격적인 '민족주의'"(윌리 톰슨, 같은책, <3-15.>)를 언급하지만 정작 [20세기 이데올로기]에서 '민족주의'는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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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족주의' 또한 다른 주요 이데올로기들 못지 않게 '해방'을 약속하는 실천적 이데올로기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아자 가트(Azar Gat)는 [민족(Nations)](2013)이라는 책을 통해 '시민적 민족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의 대립체계의 틀로 '민족의 현상학'을 서술한다. '민족주의'는 보통 근대화의 산물로 여겨지는데, 아자 가트에 의하면 '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전자는 '시민적 민족주의'이고, 후자인 아자 가트의 관점은 '종족적 민족주의'에 가까운데 실질적으로 저자의 입장은 '절충주의'의 모양새다. 즉, '민족'은 아주 오래전 선사/원사 시대부터 '종족'의 모습으로 존재해 왔고, 근대화의 산물인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가 '해방'되고 '변형'되며 '강화'되었다는 주장이다(아자 가트, 같은책, <6>). 지금의 '민주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는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나치즘 같은 '파시즘'에 의해 배타적 인종주의 형태로 '변형'되고 '강화'되며 특정 민족의 '해방'만을 주장하는 왜곡된 모습이 된 결과 '민주주의'의 적(敵)이 되었지만, 원래 '민족'은 '종족성', '인족'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이야기다. 다분히 이론적인 책이지만 그만큼의 이론적인 근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선사시대와 고대로부터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세계 각지의 종족과 국민(민족)국가의 역사적 현상을 따라 서술하는 일종의 '민족 현상학(現象學/phenomenology)'이다. '종족성(ethnicity)'에서 출발한 인류가 '인족(people)'을 거쳐 궁극에 '민족(nation)'으로 완성되는 장구한 '현상학'. 책이 불필요할 만치 장황하고 두꺼운 이유는 대사상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대한 오마쥬 또는 유발 하라리, 토마 피케티 같은 현대의 인기 사상가들에 대한 '민족'적 도전일 수 있겠다.



"민족국가는 전근대 국가 중의 일부였지 전부가 아니었고 심지어 대부분도 아니었다. 나머지는 더 넓은 공간을 여럿이 나누어 가진 소국들이었다. 하지만 제국들도 있었는데, 한 '인족'이나 '종족'이 팽창해서 다른 인족이나 종족들을 지배하는 경우가 가장 전형적이었다... 민족태를 정치적 종족성의 특정한 형태로 보는 이 책에서 제국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제국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찍부터 어디에나 싹트고 있던 '민족(nation)'국가들을 우세한 무력으로 파괴한 강력한 엔진이었다. 많은 민족국가들이 제국이라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 사라졌다... 둘째 이유는,... 거의 모든 제국은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특정 '인족(people)'이나 '종족(ethnicity)'의 제국이었다. 그 인족/종족의 군사력과 정치적 지배력이 제국의 주춧돌이었다."

- [민족], <4. 전근대 세계의 종족, 인족, 국가, 민족>, 아자 가트, 2013.



역사학자이자 이스라엘 방위군 예비역 소령인 아자 가트가 보는 '종족적 민족주의'에 가까운 '민족'은 오랜 세월 핍박받고 떠돌다가 근대화의 결과로 근동에서 땅따먹기 민족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유대' 민족주의의 그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절충주의'는 근대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아무리 유대 민족주의에 사상적 뿌리를 두었더라도 '종족주의'에 머물 수 없는 까닭은 '민주화'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민족 현상학'의 주체인 '종족(ethnicity)'은 '인족(people)'을 만난다. 역자가 말하기로도 어색한 번역어인 '인족'의 원어는 'people'이다. '민중'이나 '인민'은 '민족'적 색체가 적기 때문에 선택된 번역어겠지만 내가 읽기로 아자 가트의 '인족'은 '민중(인민)'에 다름 아니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씨족과 부족 등의 '종족'은 평상시에는 서로 싸움을 멈추지 않던 원수들이었으나 사회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레 공동체를 형성하고 외부의 다른 종족에 대항하여 비슷한 종족들끼리 단결하면서 연맹체나 초기 국가를 만들었다. 모든 역사의 소국들이 연맹체가 되고 사유재산과 잉여가치의 축적을 위한 군사력으로 고대국가가 되는 과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국가'의 출현에 관한 아자 가트의 현상학은 여기까지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의 정치경제학적 분석틀을 따른다. 그러나 [민족]의 저자 아자 가트는 결코 '계급투쟁의 역사'를 말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다. 미리 말하자면, 아자 가트의 [민족]의 결론은 "종족/민족 감정이 '자유주의'적이고 계몽된 상태로 유지되기만 한다면, (민족 감정과)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모순된다고 보지 않았다"(같은책, <6>)라는 명제에 들어 있다. 아자 가트에게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같은 말이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힘으로 '민족주의'는 비로소 '해방'된다. 그래서 아자 가트의 [민족]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인족(people)'이 된다. '민중'은 곧 '민주주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민족적 친밀감, 정체성, 연대감이... 매우 의미있는 정치적 힘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주의적, 이분법적 이론화의 근본적 오류다... 민족현상에 큰 힘을 부여하여 이를 의미있는 정치변수에서 '민족주의 시대'의 핵심에 위치한 지배적 정치변수로 바꾸어놓은 것은 '대중주권', 시민권, 시민적-법적 평등, '민주화', 그리고 지역 정체성의 약화라는 교의였다."

- [민족], <5. 전근대 유럽과 민족국가>, 아자 가트, 2013.



'종족성'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아자 가트는 부정하겠지만 모든 '종족'은 계급사회의 정치권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고 국가권력이 된 후로는 '민족'으로 치장했다. 물론 근대 이전에는 '민족'을 대표하는 정치권력이 '군주(왕권)'였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민주화' 이후 국가의 주권이 형식상이나마 '민중(인족/people)'의 것이 되었다. 아자 가트의 '민족주의'에서 '인족'이 중요한 개념인 이유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나 제국도 기본 이데올로기는 공통 언어와 종교에 기반한 "범문화적 유대감"(같은책, <6>)을 공유하는 '민족'이었고, 이집트를 포함하여 고대 세계에서 이민족 왕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해당 '인족'들이 믿는 '민족주의'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 '민족적 민중'이라 할 수 있는 '인족'들에 의해 언제 쫓겨날지 몰랐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유럽 최초 '민족국가'의 원형이었던 고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또한 방대한 영토를 정복했던 제국이었지만 여러 지역을 직접 지배할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나 로마를 포함한 대제국의 권력자들은 '민족'이 여러 개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해당 지역의 실질적 주인은 그곳에 사는 해당 '인족'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을 차지한 이민족들은 '한족'으로 동화되었는데 해당 지역의 다수 '인족'이 한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에 따르면, "과거의 농민들에게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찬성했던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들 못지 않게 엄연히 '조국(민족)'이 있었던 것이다"(같은책, <5>).


프랑스 대혁명을 필두로 한 근대 '민주주의'가 등장한 이래 건설된 '국민국가'는 바로 이 '민족국가' 또는 '민족'에 기반한 제국이 해체되고 발전한 근대적 '민족국가'였다. 근대국가는 더 이상 '군주'가 주인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라고 헌법에 명시했고, 이 '국민'이 바로 '민족'으로 뭉친 '인족'들이었다. 아자 가트는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 관한 서술도 이어가고 역시 이스라엘 역사학자 알렉산더 야콥슨은 [민족]의 7장에서 '민족'과 '국가', '종족성' 관련한 헌법적 측면을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챕터 같지는 않으므로 건너뛰어도 무방할 듯 하다.



"근대 민족주의의 쇄도는 인민이 자신들의 선택을 표출하고 행동에 옮기게 해준 민주화, 자유화 과정의 한 작용이다... 계몽주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은 민족주의의 해방적 측면과 공격적, 폭력적인 측면을 둘 다 인식해 왔다. 전자(해방적 측면)를 극대화하고 후자(공격적 측면)를 억제하려면 그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민족], <결론>, 아자 가트, 2013.



국가는 오래전 고대로부터 '종족'과 '민족'에 기반해 왔고, '민주주의'가 등장한 근대 이후로 다수 '인족'의 힘을 기반으로 '국민(민족)국가'를 형성해 왔다. 아자 가트의 '민족주의'는 이 과정에서 현대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민족주의(인종주의)로 인해 부정적 변화는 겪었지만 결국 '자유주의'와 함께 할 때 '전 인류에 대한 사랑'과 '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거의 동의어인 이스라엘 역사학자 아자 가트로서는 근대의 '시민적 민족주의'와 전통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적절히 절충시킨 최적의 '민족주의'가 되겠다. 그러나, 부족이 국가가 되고 제국의 팽창과 국민국가의 출현에서 '계급투쟁'의 인류 역사를 보지 않으려 하는 유대인 '자유주의자' 아자 가트와 알렉산더 야콥슨의 '민족 현상학' 너머로 본다면, '민족'과 '민중'의 역사적 길항에서 '종족'이나 '민족' 같은 개념보다는 어색한 번역어이기는 해도 '인족(people)'에 더 방점이 찍힐 수 밖에 없다.


'인족(people)'의 정체는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의 주체인 '민중(인민)'이다.


***


1. [민족(Nations) - 정치적 종족성과 민족주의, 그 오랜 역사와 깊은 뿌리](2013), Azar Gat/Alexander Yakobson, 유나영 옮김, <교유서가>, 2020.

2.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 Willie Thomson, 전경훈 옮김, <산처럼>, 2017.

3.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F. Engels. 김대웅 옮김, <아침>, 1987.

4. [정신현상학](1806), G. W. F. Hegel, 임석진 옮김,<지식산업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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