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헌트의 경제사상사](1979~2011) - E.K.Hunt
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E.K.Hunt, 1979~2011.
"경제를 바라보는 사상과 관점을 헌트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이분법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라는 것이다."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옮긴이의 말>, 홍기빈, 2015.
1.
백발의 교수는 학생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독백하듯 강의를 이어나간다. 경제학과 전공필수 과목이라 수강생의 대부분은 경제학과 학생들이었을 거다. 영문학과는 나 혼자였다. 수학적 공식과 증명은 나오지 않았다. 얼핏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조용한 강의였지만 가급적 수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묘한 일이지만 '경제학'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수학'이 아니라 '역사학'과 함께 듣는 '경제학', 1994년 2학기에 영문과 2학년인 내가 들었던 경제학과 강의는 '경제학사(經濟學史)'였다. 재미있었지만 학점은 'B'였다. '경제학'에 자신이 생겨 내친 김에 1995년 3학년 1학기에 신청한 경제학과 교양필수 '경제학 원론(原論)'은 주류 미시경제학을 나 나름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관점에 입각하여 노트하고 '비판'적 시험 답안지를 제출한 결과 'C+'을 맞았다.
제대 후 복학해서는 난 더 이상 경제학과 강의를 신청하지 않았고, 주로 국문학과 전공 강의를 기웃거렸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칭했지만 (정치)경제학에 역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난 후의 내 꿈은 '소설가'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문과 강의는 경제학보다 재미있었다.
그래도 내게 '경제학'은 일종의 아픈 손가락과 같이 애잔하다.
잘 하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기 보다,
애초부터 이해할 '머리'가 없어 아쉬운 그런.
2.
"경제사상사에서 빈번하게 되풀이되는 주제 하나는 '자본주의'가 과연 '조화'를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갈등'을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라는 것인데, 이것이 이 책의 중심주제가 될 것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서문>, E.K.Hunt, 1979.
'경제학'에 아주 잠시 관심을 두었던 이십대 초반 한때 나의 관심사는 '자본주의'였다. 당시는 아직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마저 읽지 못한 상태였는데, 1990년대 초반의 대학 분위기에 편승하여 선배들을 따라 '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습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철학'을 지향했다.
'경제학사'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경제학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비판을 목적으로 했던 '비주류' 경제학 사상들과 그 기원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답안지에 자본주의 '비판'을 잔뜩 써서 내도 'B'는 맞았다. 그러나 다음 학기 '경제학 원론'은 달랐다. 수요-공급 곡선과 '한계효용',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기조정적 시장을 이해하고 변론하지 못하면 그냥 'C'였다.
'미시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크고도 험한 산이었다.
미국의 급진적 정치경제학자인 유타대학 경제학 교수 E.K.헌트(Emery Kay Hunt : 1937~)는 그의 나이 사십대 초반이었을 1979년에 [경제사상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 초판을 낸다.
이후 헌트는 2008년 세계 자본주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동료학자 마크 라우첸하이저(Mark Lautzenheiser)와 함께 책의 말미에 <오늘날의 경제학> 몇 장을 추가 증보하여 2011년 3판까지 발표했고, 아마도 1980년대 담배연기 자욱한 반지하 자취방에서 초판을 학습했을 우리 사회 진보적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선생이 2015년에 이 3판을 번역했다.
헌트의 입장은 명확하다. '중립'적이거나 '불편부당'하지도 않다. 대놓고 자본주의 '비판'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정의하고 계급투쟁을 이야기하며, 아담 스미스부터 현재의 주류-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서술한다. 역자 홍기빈 선생에 의하면 헌트가 영미권 경제학자라는 한계로 인해 유럽의 막스 베버와 조지프 슘페터, 북유럽 사민주의 사회의 '제도주의' 경향들을 다루지 않아 아쉬운 점은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결로 주류 경제학에 대항하고 반론을 펼친 소스타인 베블런(같은책, <12장>)과 피에로 스라파(같은책, <16장>) 같은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어 경제학에서 "정녕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소중하게 붙들어야 할 진실의 고갱이가 무엇인지"(같은책, <옮긴이의 말>) 고민하는 이들에게 "꼭 읽으라고 간곡히 권하고"(같은책, 같은곳) 있다.
E.K.헌트의 이 250년 경제학 역사 이야기책 제목은 '경제학사(History of Economics)'가 아닌 '경제사상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이다. 즉, 경제학에 관한 헌트의 기본 관점은 '개인들의 교환'이 아니라 '노동가치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그것이다. 따라서 '신고전파'라 분류되는 주류 경제학이 가정하는 '합리적 개인'이 아닌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렇기에 헌트의 '경제학' 역사는 추상적인 경제학 '이론'(Economics)의 역사가 아니라, 경제학 '사상'(Economic Thought)의 '역사'(History)가 된다.
역자는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헌트의 [경제사상사]는 경제학을 "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라는 주제를 화두로 둔다고 말한다. 저자 E.K.헌트는 <서문>에서 현재 자본주의 특정 사회체제를 "과연 '조화'를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갈등'을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라는 질문에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어떠한 대답을 제출했는지가 그의 [경제사상사]에서 '중심주제'가 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경제사상사]에서 '경제학'은 '사회적 생산'이며, '자본주의'는 계급간 '갈등'을 향해 가는 체제이다.
"공리주의 이데올로기는 토지와 자본 또한 노동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품을 생산하며, 따라서 토지 소유자와 자본가도 노동자가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생산요소 덕분에 나온 생산물의 가치 등가물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훈련...
인간 노동이 상품의 지위로까지 추락한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에서만 여타의 상품이 인간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으며 그래서 인간들이 생산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산을 행하는 것인양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공리주의 경제학에서 생겨나는 반(反)계몽주의일 뿐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19. 오늘날의 경제학 III :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부활>, E.K.Hunt/Mark Lautzenheiser, 2011.
본인을 "편파적이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같은책, <19장>)이라고 공언하며 신고전파 주류경제학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 철학을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는 저자 E.K.헌트는, 내가 읽기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저자가 마르크스를 [경제사상사] <9장>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요강(그룬드뤼세:Grundrisse)]과 [자본론(Das Kapital)] 중심으로 각별하게 다루는 것은 물론, 개인들의 '효용'을 중심으로 한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기본 관점이 사실상 사회적 생산의 기본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으로서의 '노동가치론'이라는 점, 마르크스에 대한 헌트의 유일한 비판이 자본주의 '종말론'의 '잘못된 예측' 한 가지 뿐인 점, 마르크스의 후예로서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20세기초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본원축적론'의 관점에서 탁월하게 분석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 규정한 레닌까지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같은책, <13장>) 등이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주요한 특색이다. 이는 물론 개인 '효용'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의 '자기조정성'을 갖는다는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제국주의'를 탐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18~19세기 전통적인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효용'과 '한계주의(marginalism)'로 치환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 '갈등'을 '합리적'인 개인들의 '조화'로 '살균처리'해 버린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에 철저히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파적"인 헌트는 '경제학'을 '사회적 생산'의 '노동가치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를 '갈등'의 체제로 분석한다.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류경제학이 '신고전파'인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고전파'의 정치경제학 이론과 '공리주의' 철학을 '신비화'시켰기 때문인데, '신(新)'을 접두사로 쓴 사상 일체는 기존 사상을 '신비화'시키고 '교조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고전파'의 정치경제학을 경제학이라는 '과학'으로 수치화했고, 생물처럼 유기적인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의 '자기조정성'이라는 신화로 만들었다. 주류경제학은 '수학'과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상 현체제인 자본주의를 '종교'로 하는 신학에 불과하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 폴 새뮤얼슨 같은 경제학자들은 '신고전파'이기는 했으나 자본주의 체제의 '갈등'을 인정한 '절충주의'였는데, 그들의 '철학' 사상은 영국의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 등 자본주의 체제 변호론자들로 이어지며 정리되는 '공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였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 일체를 '효용'과 '쾌락'으로 치환하고 일반화시킨 '공리주의'는 경제학을 '노동가치'가 아닌 '효용가치'로만 파악하므로 "압정이든 시든", "자본가나 지주든 노동자든" 그 어떤 차이나 일체의 '갈등'을 탈색시키고 만다. 사회적 관계가 탈각된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의 효용과 쾌락만 남은 '공리주의' 철학은 실재하지 않는 개인만을 상정하고 있기에 현실을 변호하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쓸모없는 공허한 철학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천년왕국의 천상에 자리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철학이 '공리주의'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에서 '유효수요론'으로 주류경제학의 한 분파로 편입된 케인스주의는 '신고전파'의 '자기조정' 시장을 기각하고 정부의 시장조정 기능을 강조하며 이후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되었고(같은책, <15장>), 폴 새뮤얼슨은 '신고전파'의 '미시경제론'과 '케인스주의'적 '거시경제론'을 '절충'하여 주류경제학의 양대 기둥이 되도록 역할을 했다(같은책, <18장>). 그럼에도 이들의 철학은 공통적으로 '공리주의'였으며 '노동'보다는 '(한계)효용'에 주목했다.
자본주의 신화에서 '공리주의' 철학은 '반계몽주의' 또는 '반지성주의'에 불과하다.
"(피에로) 스라파가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을 쓴 주된 목적은 신고전파 '한계효용이론'을 대체할 이론으로서 리카도의 '가격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불변의 가치척도'를 찾고자 한 리카도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말하는 '표준산업'의 생산의 기술조건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상품의 가격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경제 전체의 이윤율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18. 오늘날의 경제학 II : 제도주의와 포스트 케인스주의>, E.K.Hunt/Mark Lautzenheiser, 2011.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관한 '과학'적 종합분석으로 인류 사상계에서 지대한 영역을 점하고 있지만,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류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사상을 무시한채 '수학'의 영역에서 따로 놀아왔다. 그런데 1960년대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는 '신고전파'의 '수학'의 영역에서 이들의 '자본이 측정 가능한 생산성을 가진다'는 '신화'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일반균형론'을 깼다고 한다. 즉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존립할 수 있었던 주요 근거들을 '수학'적으로 무너뜨렸기에 이에 당황한 '신고전파'들이 논쟁의 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기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같은책, <9,13,19장>)이나 소스타인 베블런(같은책, <12장>) 등의 비판적 정치경제학은 지금껏 '신고전파' 경제학(같은책, <6,8,10,11,14,17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 자기 주장만 할 뿐 '철학적 토론'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1960년대 이탈리아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에 의해 이러한 '대치'가 깨졌다. 전통적 '노동가치론'에 입각한 스라파가 '신고전파'가 성역화한 '수학'의 영역에서 '표준산업'이라는 '불변의 가치척도' 개념을 가지고 '자본측정성'과 '일반균형성'의 오류를 증명했다고 하는데, 사실 헌트도 인정하듯이 이러한 '수학'의 증명과 논쟁 과정은 일반인에게 매우 난해한 과정이므로 [경제사상사]에서 상세히 다룰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소략하게 소개되고 있는 스라파의 '표준산업' 중심 증명식을 내가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저자는 물론 역자가 높이 평가하는 피에로 스라파의 업적은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에게 '수학'적 찬물을 끼얹었고 그들 자체적인 반성과 '이론'적인 수정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1979년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초판의 피날레가 피에로 스라파가 아니었을까 싶게 헌트의 스라파 평가는 매우 높다.
비록 자본주의를 좀더 '인간적인' 체제로 수정하게끔 했던 마르크스주의와 케인스주의였지만 주류경제학이 이를 통해 채용한 것은 '이론'적 수정이 아니라 '정책'적 수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추정되는 이 책의 저자 E.K.헌트는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이론'적으로 무시하고 침묵하는 마르크스보다, '수학'의 전장에서 정면으로 반론하고 논쟁하는, 그리하여 결국 적들의 학문적인 수정까지 이끌어낸 피에로 스라파를 그의 비판적 [경제사상사]에서 무심하고 건조하게 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역자인 홍기빈 선생 또한 이 책의 <16장> 피에로 스라파 이야기를 적극 추천하고 있다.
스라파는 '잉여가치론'을 수용하지 않았기에 비판적 정치경제학자였음에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신만의 독자적 힘으로 '수학'의 전장에서 강력한 '신고전파' 대군을 물리친 역전의 경제학자였다. 21세기 현재는 다시 '주류경제학'과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토론이 사라진 시대로 회귀했다고 이 책의 <19장>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여전히 주류경제학이 '수학'의 천상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천상의 '효용'이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한, 현실에서 다수 사람들이 생산해내는 '노동'의 가치와 만나는 날은 없을 듯 하다. 그럼에도 역시 여전히도 천상으로 직접 올라가 '수학'의 무기를 들고 자본주의 십자군들과 싸울 '이단적 경제학(heterodox economics)'이 절실하다.
비록, 그 전투의 생생함을 절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반인의 지능을 지닌 나지만, '수학'의 영역에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전사들을 기다리고 응원한다.
3.
"나는 편파적이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 E.K.Hunt, [경제사상사], <결론 :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 1979.
백발이었지만 그리 늙어보이지는 않았던 1994년 2학기 '경제학사' 교수님의 성함은 잊었다. 그리 활력 넘치는 강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저 교수가 경제학과 '비주류'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내심 했고, 강의내용에 '비판적 정치경제학'이 많이 언급되어 나는 나름대로 그 강의에 'A+' 이상을 줬다. 비록 내가 받은 결과는 'B'였지만 내가 돌려주는 평가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뭐 'B' 정도면 틈틈이 제도 밖으로 땡땡이를 치고 싶어하던 그 당시 나의 평균으로 따졌을 때 그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스스로를 "편파적"이라고, '비판적 정치경제학자'로 공공연히 선언한 헌트는 [경제사상사] 초판(1979)을 마무리하는 절인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에서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를 이루는 인간 보편의 필요욕구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인간관을 인정하는 '사회적 관점'을 재차 강조한다.
아마도 피에로 스라파와의 '수학'적 전투를 거쳐 수정되면서 절충주의(폴 새뮤얼슨)와 오스트리아학파(프리드리히 하이에크)/시카고학파(밀턴 프리드먼)로 '양분'(같은책, <17장>)되는 '정통파 경제학' 이야기에서 마무리되었을 1979년 초판의 결론은 헌트의 자본주의 비판 '12개 테제들' 아닐까 싶다.
중복되기도 하여 12가지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헌트가 보는 자본주의는,
1) 갈등과 착취 기반 시스템, 2) 계급투쟁의 근본성, 3) 노동의 상품성으로 인한 소외, 4) 시장의 무정부성과 만성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성, 5) 정서적 파편화로 인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로의 왜곡, 6) 멈출 줄 모르는 소비주의, 7) 공공성 부재, 8) 소외계층 만연, 9) 체제 영속의 도구로서의 교육, 10) 오로지 이윤만이 목적이기에 발생하는 기후위기 등으로 정의된다.
이후 2008년 세계 자본주의 체제위기를 거쳐 <18장>의 '제도주의'와 '포스트 케인스주의', <19장>의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부활이 마크 라우첸하우어에 의해 증보된 듯 한데, 40년이 더 지난 3판에서도 헌트의 초판 결론은 변함이 없거나 오히려 더 강화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비록 '경제학'과 담을 쌓은지 오래지만, 설령 마르크스주의 '잉여가치론'을 따르지 않더라도 지금의 체제만이 아닌 좀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비판적 정치경제학'과 '노동가치론'은 언제고 환영하고 응원할 것이다.
매우 방대하고 어렵지만 경제학 '백과사전'처럼 항상 곁에 두고 사안마다 찾아보고 참고하는 '경제사상사' 한 권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 든든하다.
수년 전 사놓고 곁에만 두고 있다가 이제야 이해가 되든 안되었든 통독이나마 마쳤다는 점도 물론.
어쨌든,
1994년의 청년이었던 내가 '경제학사'에게 'A+' 이상을 주었듯,
2022년의 중년인 나는 '경제사상사'에게도 'A+' 이상을 주었다.
"... 나는 중립적이지도 불편부당하지도 않다. 나는 자본주의가 인간 합리성의 절정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증가시킴으로써 대단히 중요하고 진보적인 기능을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자본주의의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결국 퇴행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되었다. 오늘날 존재하는 시스템은 인간들이 스스로의 잠재적 가능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을 체계적으로 좌절시킨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며 비합리적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결론 :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 E.K.Hunt, 1979.
***
- [E.K.헌트의 경제사상사](1979~2011), E.K.Hunt/Mark Lautzenheiser, 홍기빈 옮김, <시대의창>, 2015.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789244168&navType=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