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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Jul 08. 2023

[판타 레이](2021) - 민태기

- 만물유전(萬物流轉) : 소멸되지 않고 전환되는 힘

만물유전(萬物流轉) : 소멸되지 않고 전환되는 힘

- [판타 레이], 민태기, 2021.





"'판타 레이(Panta rhei)'와 '보텍스(vortex)'라는 개념을 가지고 근대 과학사를 들여다보면 혁명과 낭만의 시대에 탄생했던 물리학, 화학, 생물학, 다양한 공학 분야와 그 선구자들의 고민과 논쟁을 보다 일관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과학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이 시기를 주저없이 '판타 레이'의 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 [판타 레이], <프롤로그>, 민태기, 2021.



1.


13세기에 이탈리아 상인 폴로 부자형제들이 동방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을 만났을 때, 이 동아시아 대륙의 황제에게는 진정 더 필요한 게 없었다. 동양은 이미 기원전에 종이를 발명했고 중세에는 화약을 개발했으며 결국 동서양 문명을 매개했던 오스만 투르크는 대형 화포로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서양 '르네상스'의 기점이다.

13세기 서양 상인들은 동양을 동경하였고, 동방 '황제들'의 사치향락은 이방인들에게는 막대한 이익의 기회이기도 했다.


18세기에 영국의 대사 조지 매카트니가 청나라 건륭제를 만났을 , 청나라 황제는 '짐은  이상 필요한  없노라'라며  서양인을 무릎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려 했지만 매카트니 경은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서양의 과학기술 발전을 알지 못했던 동아시아의 '황제'나 중앙아시아의 '술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양의 과학에 무릎을 꿇었다.



"1776년 3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진다. 같은달, 수년간 자신의 특허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제임스 와트의 첫번째 증기기관이 완성되고, 같은해 7월, 제퍼슨과 프랭클린이 기초한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이 세 사건으로 서양에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 [판타 레이], <2-5.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는 1776년>, 민태기, 2021.


서양은 18세기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동양을 이미 넘어선지 오래였다.



2.


한국형 우주항공기 발사체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 민태기 박사가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근현대 과학사를 엮은 책 [판타 레이(Panta rhei)](2021)는 비단 '과학'의 역사만을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인 '판타 레이'는 '모든 것은 운동한다'는 뜻의 '만물유전(萬物流轉)'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나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않는다'며 만물의 흐름과 변화를 정의한 바로 그 '만물유전'의 법칙이다. 저자는 이를 테마로 서양 근현대사를 조망하는데 이 책의 부제는 '혁명과 낭만의 유체 과학사'다.



"데카르트는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신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만 작용하는 기계적인 인과율을 과학의 기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데카르트에게는 행성을 움직이는 힘의 전달매개로 우주를 가득 채운 유체 '에테르'가 필요했고, '에테르'의 소멸하지 않는 운동인 '보텍스'가 행성운동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뉴턴은 유체의 점성저항을 도입하여 유체운동은 지속하지 못하고 소멸한다고 지적했다. 대신 행성은 '에테르'의 '보텍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스스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중력이 작용하려면 물질의 접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자력이나 전기력에도 마찬가지로 힘의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 [판타 레이], <3-15. 원격통신의 시작>, 민태기, 2021.


근세 당시는 과학자와도 같은 의사였던 철학자 데카르트는 만물이 직접 접촉을 통해 상호 운동을 하니 물체 사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물질'로서 '에테르'를 상정했고 물질운동의 기원으로서 역동적인 소용돌이 '보텍스'를 만들었다.

과학자 뉴턴은 연금술에도 정통했고 당시에는 '신비주의자'로 오인받기도 했는데 물질의 직접 접촉 없는 역학(물리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직접 접촉은 마찰과 저항으로 그 힘이 소멸될 수 밖에 없으므로 직접 닿지 않고도 소멸되지 않는 힘으로서 '만유인력'과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 역시 과학자들간 논쟁을 통해 '신비주의'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만물에 '보편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인정받으면 이는 '과학'이 된다([판타 레이], <2-6>). '에테르'는 이제 사라졌지만 뉴턴의 '만유인력'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현대과학의 총아 '양자역학'은 그렇게 '과학'이 되었다.

한편, '보편성'을 지향하는 '과학'은 궁극적으로 '보편성'의 학문인 '철학'으로 수렴된다.

'과학'과 '철학'의 결합과 융합은 필연이다.


근대의 과학사는 '에테르'의 존재와 그 증명의 반복이었다. 데카르트는 '에테르'를 만들었고 뉴턴은 이를 극복하려 했으며 결국 '에테르'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현대 과학은 '파장'의 양자역학으로 다시금 이 '에테르'와 '엔트로피' 등과 같이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를 부활시키고 있다. 그 명칭이 무엇이 되었든 '소멸되지 않고 전환되는' 힘의 실체로서의 그것 말이다.

철학적 '유물론' 또한 이 모든 역학의 원천들로까지 '물질'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과학을 부정할 수 없는 현대철학에서 이제 '관념론'은 신학과 종교 뿐이다.


[판타 레이]에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온갖 수학 천재들, 과학과 실험의 대가들이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 외에도 철학자와 경제학자, 정치가와 음악가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 책을 보면 인류의 역사가 이들 소수 지식인들의 손에 좌지우지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알만한 유명인사들이 깨알같이 역사적 장면에 '갑툭튀'로 등장한다. 자동차회사를 차리게 되는 포르셰는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사라예보 총성으로 죽은 합스부르크가 페르디난트 공의 운전병으로 근무했고, 찰스 다윈을 배에 태워 원양항해를 할 수 있게 한 토머스 헉슬리는 '고디바 부인'을 그린 유명화가 존 콜리어의 장인이자 [멋진 신세계]를 쓴 유명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였으며,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은 각국의 지배권력으로 흩어진 영국 빅토리아 왕조 가문 후손들간의 이익다툼이기도 하단다.

굳이 이런 인맥관계들만 본다면 세상은 소수의 잘난 지들끼리의 역사로도 보일테지만, 이는 이 책이 유명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과학사'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심심치 않게 칼 마르크스도 등장시키고 있다.

1848년 유럽혁명을 서술하면서 [공산당선언] 언급을 잊지 않고, [성경] 다음으로 인류가 많이 읽은 책이 [자본론]이라고 소개하며(3위는 [어린왕자]), 책의 마지막 문장 또한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발췌한 글을 인용한다. 즉, '과학'은 개별 학문이 아니라 인류의 전체적이고 통합적 사고의 산물이며 과학사 자체가 세계사라는 결론(같은책, <에필로그>)을 강조하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판타 레이]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정치경제학에 적용한 '가치 보존'의 법칙과도 같고,

뉴턴 전문가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일반 이론]은 뉴턴의 [프린키피아(수학 원리)]에 대한 오마쥬와도 같다.


"패러데이가 죽은 해(1867년), 칼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자본론]을 출판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정치)경제학에 (제임스) 줄의 (열역학) 성과를 반영하여 '노동'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화폐'가 되고 '화폐'가 '상품'으로서의 '노동'을 구매하는 과정을 보존량으로서의 '가치'가 형태를 바꾸어가며 전환된다는 물리학적 개념으로 분석한다...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은, 같은 시기 동년배 사업가 줄의 연구를 잘 알던, 맨체스터에서 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고용하고 기계로 돌아가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자본가' 엥겔스의 관점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잉여가치설'의 핵심은 사용자가 구매한 '동력(노동력)'과 실제 수행되는 '일(노동시간)'이 동일한 물리량이 아님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후 잉여가치설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은 '노동시간'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 [판타 레이], <3-17.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전환되는 것>, 민태기, 2021.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던 1936년, 케인스 불후의명저 [고용, 이자와 화폐에 대한 일반 이론]이 출판된다. 케인스의 사상이 집대성된 '일반 이론'이라는 명칭은 당시 과학계 최대의 화두였던 아인슈타인의'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따 왔다. 뉴턴 역학이 상대성이론의 특수한 형태이듯이 '시장 경제학'이 케인스의 일반 이론의 특수한 형태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인슈타인이 뉴턴 역학을 부정하지 않았듯이 케인스 역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으며, '일반 이론'에서 정부의 시장 개입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인 조치로 한정했다. 케인스는 공황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사회주의 이념에 절대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자본주의를 구원했다."

- [판타 레이], <5-31. 유동성과 경제 대공황>, 민태기, 2021.



3.


"코페르니쿠스의 레볼루션과 뉴턴 이후 과학이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배경에 무관하지 않았듯이, 경제학 역시 현실 정치와 결합한 지배계급의 관점이 철저히 투영되었다."

- [판타 레이], <5-31. 유동성과 경제대공황>, 민태기, 2021.


과연 '천재'들인 과학자들이 이끈 역사에 관한 이 '과학사' 책은 어려운 수학과 과학의 원리는 물론 철학과 정치경제학 및 음악까지 아우르는 매우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가히 저자 민태기는 만물박사에 '천재'와도 같다.

굳이 이런저런 유명인사들을 연결시켜 소개하나 싶기도 하지만 저자가 '참고로,...' 라며 언급한 이야기들은 어디가서 깨알같이 아는 척 하기에 알맞는 이른바 '알쓸신잡' 사전과도 같다.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적 정의나 공식, 과학이론 등은 이해가 안되더라도 읽고 넘기지만, 과학사의 배경이 되는 유럽 근현대사는 이 책 [판타 레이]가 한 권의 세계사 책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이 책 [판타 레이] 또한 '낭만주의'와 '혁명'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를 우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만물유전'의 '판타 레이'로 관통하는 세계사에서도 역시, 나는 만물의 '혁명'적 전환을 본다.


본래 천체의 '회전'을 의미하던 '레볼루션(revolution)'이 지금과 같이 '혁명'을 뜻하게 된 건 1688년 영국 '명예 혁명'에서부터라는데(같은책, <1-1>),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과학 성과가 세계사에서 '혁명'적 전환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 것 또한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과 사상과의 관계를 증명한다.

저자 민태기 박사는 "분명한 것들이 사라져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역사의 '혁명'적 원리에 따라 과학사에서도 "마지막 유체 에테르가 사라지며 새로운 과학이 출발한다"는 말로 이 책 [판타 레이]의 마지막 <5부>를 연다.



'만물유전'의 요점 역시 '혁명'의 역사다.

'혁명' 또한 "소멸되지 않고 전환되는'([같은책, <3-17>) 힘이다.


***


- [판타 레이(Panta rhei)], 민태기, <사이언스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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