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용원 Jul 20. 2024

에코, 안녕. - 2024. 7. 17. (수)

- 중세의 시간을 지나다

중세의 시간을 지나다

- 에코, 안녕.





1.


에코가 앓아누운 건,

장인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였다.


장례 중간에 서류 좀 찾으러 나 혼자 새벽에 집에 잠시 들렀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4일장을 마저 치르고 온 나와 처를 보더니 바로 누워버린 거였다.


우리는 더위를 먹은 것으로 생각하고 작년처럼 금방 털고 일어나길 바랐다.



2.


수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장인께서는 서서히 쇠약해지시더니 요양병원에 들어가신지 일주일만에 돌아가셨다. 2년 전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던 폐암 말기의 내 아버지께서도 요양병원 입원 3일만에 돌아가셨는데, 요양병원이란 것이 원래부터 죽으러 가는 곳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곧 죽을 사람이 버틸만큼 버티다가 들어가는 곳이라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두 아버지 모두 요양병원에서 오래 버티시질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장인의 죽음을 겪고 나니 저 정도 수준이면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겠다 싶은 단계는 이제 대충 알 것 같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을 앞둔 자식은 쉽사리 죽음을 떠올리지 못한다. 나는 지금 상태 그대로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을 끝내 하지 못할 것이며, 시아버지의 죽어가는 모습을 함께 보아왔던 나의 처, 은미 또한 정작 본인의 아버지인 내 장인의 임박한 죽음을 보지 못했다. 은미 역시 2년 전의 나처럼 아버지가 요양병원 들어가면 기력을 어느정도 되찾을 거라 믿었단다.


사실 나는 장인의 죽음이 보였다. 죽음이 임박해 오던 내 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던 거다.

아마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다른 사람들도 자식인 내가 외면하려 했던 2년 전 당시 내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으리라.


밉든 곱든,

그게 삶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어쩔  없는 관념 또는 이념일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집 강아지 송에코는 2018년 7월 27일생 순종 알래스칸 말래뮤트다.


우리 둘째딸 은규가 열두 살 생일선물로 대형견을 키우고 싶다 하여 아빠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 이 정도 쯤이야 못해주겠나 하는 생각에 즉흥적으로 데려왔다. 2018년 9월 말 추석 즈음 태어난지 만 두달 된 강아지를 데려왔으니 2024년 올해로 만6세, 햇수로는 일곱살 된 노처녀 암컷이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1414212720&referrerCode=0&searchKeyword=%EC%97%90%EC%BD%94


비록 즉흥적인 결정이었기는 했어도,

내가 딸에게 준 열두 살 생일선물은 단순히 '대형견'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더랬다.

그랬음에도, 결국 내가 에코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만 셈이지만.



강아지 시절 처음 3개월만 집 안에서 살았고,

몸집이 커져서 바로 마당으로 쫓겨났지만,

에코는 지난 7년간 든든한 덩치와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집과 가족을 지켜준 우리집의 마스코트였다.

마을에서 우리집은 '저 큰 강아지 키우는 집'으로 알려졌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610085231&referrerCode=0&searchKeyword=%ED%9D%91%ED%98%B8


그런 에코가,

죽었다.



3.


장인 어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던 2024년 7월 6일 토요일은, 프랑스 중세문화역사학자 자크 베르제의 [중세 후기 유럽의 식자들](1997)이라는 책을 읽고 서평까지 쓰고 난 후 이제 진짜 서양 중세에 한 번 깊이 빠져들어볼 요량으로 자크 베르제의 선학인 자크 르고프의 [서양중세문명](1964/1984)을 펼쳐들었을 때였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67


장인어른의 장례를 치르고 대략 열흘 뒤 따라간 에코를 경황없이 반려동물 장례서비스에 맡겨 화장하고 난 후에야 읽은 내용이지만, 중세의 시간은 오로지 신의 전유물이었기에 중세 사람들 대부분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면 주체적으로 시간을 계산하거나 판단할 수 없었단다.


고대 철학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그 역동성 또는 반동적이기는 하나 순환성으로 시간을 설명하기도 했지만, 그런 사상을 이교도로 판단했던 중세 가톨릭 세계에서 시간은 고대식 순환형이나 근대식 나선형이 아닌, 직선형이었다. 즉, 시간과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처음과 끝을 정해놓았다는 뜻이다.

중세 가톨릭의 신은 세상을 유년기부터 청년기를 거쳐 노쇠기까지 6단계로 정했는데, 중세 당시는 언제나 마지막 6기인 노쇠기로서 세계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모습인 '성삼위일체'로서 주재하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거라는 일종의 중세 지배계급의 끝판 지배전략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을 통해 중세의 교권과 세속왕권은 민중들을 협박했고 면죄부를 팔았으며 결국 스스로도 구속되었다.

교황은 모르겠으나 세속의 군주와 영주 및 귀족들은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 비로소 부를 죄악으로 여기고는 종말을 떠올리며 참회했고, 농민반란 또한 세계 종말 후 다가올 '천년왕국'을 혁명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구세주, 메시아, 미륵불 사상같은 그런거다.



"신의 시간은 연속적이고 직선적이다...

모둔 순환적 신화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시간관은 '운명의 수레바퀴'다. 오늘 위대한 것이 내일은 몰락할 것이고 지금 보잘 것 없는 것이 운명의 순환으로 인해 곧 정상에 이를 것이다. 그것들의 변양들은 무수하다...

운명의 수레바퀴라는 실망스러운 반동적 신화가 중세 서양의 정신세계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중세적 사고는 순환적 시간을 거부하고 시간에 비순환적인 직선적 의미를 부여했다. 역사가 시작과 끝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이러한 시작과 끝은 실증적인 동시에 규범적이고, 역사적인 동시에 신학적이다...

세계가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제6기는 따라서 노쇠기다. 중세적인 모든 사고와 감수성에는 기본적으로 이 같은 비관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세계가 죽어가는 가운데 종말에 이른다."

- [서양중세문명], <2-6. 공간과 시간의 구조(10~13세기)>, 자크 르고프, 1964.



현대에 사는 나는,

세계는 여전히 나선형으로 운동한다고 본다.

고대처럼 순환하지 않고 그렇다고 중세처럼 정지되어 있거나 직선으로 뻗는 게 아니라,

우연하게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듯 하지만 꼭 순환적으로 같을 수는 없이 나선형으로 흐르는 게 시간의 유일한 필연성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양가 아버지들과 가족 같던 개의 죽음을 겪고 나니,

나의 시간만큼은 나선형보다는,

직선적인 중세의 시간인 것만 같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1490463533&referrerCode=0&searchKeyword=%EC%97%90%EC%BD%94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246335255&referrerCode=0&searchKeyword=%EC%86%8C%EB%85%80%EA%B0%80%EC%9E%A5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387788853&referrerCode=0&searchKeyword=%EA%B2%AC%EC%A3%BC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512905967&referrerCode=0&searchKeyword=%EA%B0%95%EC%95%84%EC%A7%80


에코와 함께 뛰어놀던 공원과 골목길, 대문을 열면 배를 긁어달라고 드러눕던 우리집 마당은 그대로인데, 그곳에 함께 있던 나와 나의 아이들, 그리고 에코는 더 이상 그 공간에 없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그 시간들이 그렇게 앞으로만 가는 나의 뒤로 또 뒤로 계속 쌓여만 간다.

이제 다시 내게는 없을 그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애틋함이 어쩔 수 없이 나를 '비관주의'로 인도한다.


그래서 요 며칠 나는,

하염없는 중세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4.


2년 전 아버지는 외삼촌은 물론 백부와 숙부까지 데려가셨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 시골에 누워계셨던 외삼촌이 돌아가셨고, 그 후 채 일년도 지나지 않아 역시 병원에 계시던 숙부와 백부가 연이어 돌아가셨다. 그 시기는 내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생명체가 죽어서 영혼은 아니라도 다른 '물질'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고 내가 생각하게 된 건 제사를 통해 조상신을 섬기는 유학 또는 성리학에 관한 나 나름대로의 해석 때문이었다. 내게 삼봉 정도전의 급진적 성리학은 유교라는 종교적 관념론이 아닌 '유물론'의 철학으로 여겨졌다.

억지스럽지만, 또 다른 '물질'이 된 아버지의 영향력이라고 생각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29


그래서인지 몰라도 장인의 장례를 치른 후, 연로한 내 어머니가 짐짓 염려되기도 했는데, 우리 에코가 대신해 줌으로써 기력이 꽤나 쇠약해진 어머니를 지켜줬다고,

나는 그냥 생각하기로 한다.



사람만큼 영리했던 순종 알래스칸 말래뮤트.

사실은 한국에서 태어난 토종늑대였음에도 북극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매년 갈수록 갱신되던 폭염에 힘들어하던 우리 에코.


지난 7년 동안 변함없이,

우리집 마당에서 가족들을 지켜줬고,

귀가하는 가족들 모두를 한결같이 반겨줬던,

몸무게 64kg에 덩치는 나보다 크던 우리집 수호신,

에코가 마지막으로 우리 어머니를 지켜줬다.


고맙다, 에코야.

우리 에코, 안녕.




5.


이제,

자크 르고프의 책을 마저 읽어치우고,

중세의 비관주의적 시간을 얼른 벗어나야겠다.



(2024년 7월)


https://m.blog.naver.com/beatrice1007/223518618810?afterWebWrite=true



매거진의 이전글 [글자 풍경](2019) - 유지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