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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15. 2020

[사기열전(史記列傳)] - 사마천(司馬遷)

"기화(奇貨)를 얻은 자가 세상(世上)도 취(取)하는가"

기화(奇貨)를 얻은 자가 세상(世上)도 취(取)하는가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를 통해 보는 고사성어(故事成語)
: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기화가거(奇貨可居)의 예측불가(豫測不可)한 논리(論理)
 
 
“농사를 지으면 몇 배의 이익이 남습니까?”
“글쎄, 열 배쯤 남을까.”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이익이 몇 배나 되겠습니까?”
“그야, 백 배는 되겠지.”
“그렇다면… 임금이 될 사람을 사 두면 이익이 몇 배가 될까요?”
“그야 계산할 수 없을 정도겠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末) 한(韓)나라 양책(陽책) 땅에는 여불위(呂不韋)라는 대상(大商)이 있었다. 그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조(趙)나라의 한단을 중심으로 전국시대 열국(列國)을 두루 다니면서 값이 쌀 때 물건을 사두었다가 가치가 오를 즈음 다시 되파는 ‘매점(買占;사재기)’의 방식으로 천금(千金)의 재산을 모은 위인이었다. 또한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秦始皇)의 친아버지로  의심받는 인물이기도 하였는데, 위의 대화는 어느날 한단에 갔던 여불위가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子楚)를 우연히 본 후 그를 ‘기화(奇貨)’로 여기고는 집으로 달려가 역시 뛰어난 장사꾼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나눈 대화이다. 여불위는 이야기한다.
 
“농사를 지어서 얻는 이익이란 그저 추위에 떨지 않고 배 곯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차 나라의 대권을 잡을 왕을 키워 주면 그 혜택은 두고두고 이어질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에는 진나라의 왕자가 인질로 와 있습니다. 저는 이 ‘기화’를 사 놓겠습니다.”
 
‘기화(奇貨)’란 진귀한 상품, 즉 뜻하지 않게 찾아낸 귀한 물건을 의미하는데, 보통사람은 중시하지 않더라도 전문가의 눈에는 매우 가치 있어 보이는 것으로서 당장에는 값어치가 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높은 값을 지닐 만큼 충분한 잠재가치(潛在價値)가 있는 것을 이른다.
당시 진(秦)나라는 소양왕 제위기간, 태자였던 안국군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정비(正妃)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적자(嫡子)가 없던 터, 조나라에 보잘 것 없이 인질로 잡혀있던 자초를 화양부인의 적자로 만들어 장차 진나라 왕위에 올린 후 진나라 전체 국토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을 여불위는 한 것이다. 그의 기발한 안목을 보여주는 이 일화에서 성어(成語) 하나가 유래한다.
 
奇貨可居 (奇:기이할 기 / 貨:재물 화 / 可:옳을 가 / 居:살 거)
기이한 물건은 저축해 두는 것이 좋다. 혹은 좋은 물건을 사두면 장차 큰 이득을 본다는 뜻이다.
 
조나라에서 조차 냉대를 받으며 궁핍하게 지내던 진나라 왕자 자초(子楚)를 ‘이는 좋은 재물이니 거두어 둘만 하다(奇貨可居)’라면서 찾아간 여불위는 당장에 자신의 계책을 이야기하는데, 처음에는 심드렁하게만 받아들이던 자초도 여불위의 계획대로 되기만 한다면 진(秦)나라의 땅 절반을 주겠노라 약속을 하게 된다. 이에 여불위는 자신이 모은 재산의 절반인 오백금을 자초에게 주어 조나라 고위관리들을 매수(買收)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절반 오백금을 가지고 진나라 화양부인의 언니에게로 간다. 화양부인 자매는 평소에도 여불위가 뇌물을 주어 이권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던 사람들이었다. 뇌물이 오고 가는 사이에 진실이란 없는 법. 여불위는 자초가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아들로서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긴 하지만 조나라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고 있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안국군과 화양부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짓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화양부인도 시간이 지나 ‘색이 시들면 사랑도 식어(색쇠이애이;色衰而愛弛)’ 태자 안국군의 총애를 잃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초를 양자로 맞아 적자로 삼음으로써 후사를 도모하라고 하여 화양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후 여불위는 인재들을 많이 규합한 것으로 유명한 전국시대 4공자(조나라 평원군, 제나라 맹상군, 초나라 춘신군, 위나라 신릉군)를 본떠 널리 식객들을 불러모아 진나라에서 세력기반을 만들고 마침내 자초를 진나라 태자로 삼는 것에 성공하는데, 안국군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자초가 이어 장양왕이 되니 드디어 여불위는 승상(承相)이 되어 낙양 지방에 있는 10만 호의 땅을 하사받게 된다. 그러나 장양왕 자초 또한 재위 3년 만에 죽어 열세살의 태자 정(政)이 왕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전국시대를 끝장내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제(秦始皇帝)이다. 그런데 그는 여불위가 자초에게 시집보낸 자신의 애첩 조희(趙姬)가 나은 아이였고 그녀가 자초에게 시집갔을 때는 이미 임신 2개월 여 된 상태였다고 하므로 알게 모르게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라 여겨질 만 한데, 실제로도 진왕 정이 등극한 후 여불위는 승상보다 높은 상국(相國)에 오르게 됨은 물론, 옛날 춘추시대(春秋時代) 최초의 패자(覇者)였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자신의 참모 관중(管仲)을 아버지와 다름없다고 하여 부른 명칭인 ‘중부(仲父)’로 공공연하게 불리며 그 권세(權勢)가 가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학자 계연(計然)이 말했듯, “귀한 것이 극에 달하면 도리어 보잘 것 없어지고, 보잘 것 없는 것이 극에 달하면 귀해진다”는 세상만사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순리(順理) 또한 여불위의 ‘기화가거(奇貨可居)’가 애초에 담고 있는 철학(哲學) 아니었던가. 여불위 또한 이러한 이치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는데, 장양왕 자초의 죽음 이후 진왕 정의 어머니 조태후와 다시금 정을 통하게 되고 들통날 것이 두려워 그녀의 정부(情夫)로 맺어주었던 노애가 스스로의 권세를 주체하지 못하여 일으킨 난이 진압된 후인 기원전 235년, 자신의 친아들일 지도 모르는 진왕 정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고 스스로 독주를 마심으로써 생을 마감하게 된다.
 
진시황을 둘러싼 ‘친자논쟁(親子論爭)’은 우리 역사에서 고려 말(高麗 末) 공민왕(恭愍王) 시기 승려 신돈(辛旽, ? ~ 1371)이 고려 32대 우(禑)왕의 친아버지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일어난 구귀족(舊貴族) 세력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세력 사이의 '폐가입진(廢假立眞)' 논쟁과 닮아있다.

'폐가입진(廢假立眞)'이란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고려사회 보수적 구세력인 권문세족(權門勢族)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던 우왕을 왕(王)씨가 아닌 신(辛)씨로 몰아붙인 개혁적 신진사대부 세력들의 주장에 있어 그 사실의 진위(眞僞)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러한 정치적 공세는 더 이상 개혁적 정치가가 아니라 ‘요승’으로 전락해 버려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사회개혁의 걸림돌이 되었던 신돈을 구세력과 싸잡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에 의하면 신돈은 고려 말 왕실을 어지럽히고 세상을 혼탁하게 만든 ‘요승’으로 묘사되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부패한 구세력이었던 귀족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평민으로 만들어주는 등 사회개혁에 앞장섰으며 개혁적 신진사대부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성균관(成均館)을 중건하여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유교사상(儒敎思想)이 고려사회 개혁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도록 장려한 정치가였다. 조선초기 세종의 교지를 받아 김종서, 정인지 등에 의해 편찬된 [고려사(高麗史)], <신돈전(辛旽典)>의 한 대목을 보면 신돈이 전격적으로 발탁된 배경에 대해 알 수 있다.
 
“처음에 임금(공민왕)이 재위한 지 오래되었는데 재상들이 뜻에 맞지 않으므로 일찍이 말하기를 ‘권세있는 신하와 명문대가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주고, 초야의 신진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가 귀현해지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대족과 혼인하여 처음의 뜻을 버리며, 선비들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사사로운 정을 따르니 이 세 부류는 모두 쓰지 못하겠다. 세상을 떠나 초연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머뭇거리며 고치지 않는 폐단을 개혁하려고 생각하였다”
 
원래 편조(遍照)라는 법명의 승려로서 왕사를 맡고 있던 그는 반원(反元)정책을 내건 개혁군주 공민왕으로부터 발탁되어 속세로 나와 신돈이라 이름짓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통하여 토지 및 노비에 관한 개혁의 실질적 모습을 그려나가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그 자신 승려임에도 ‘공자(孔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라고 하며 유교를 장려함으로써 신진사대부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인데, 보수적 귀족세력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면서 개혁적인 정책을 통해 사회변화를 도모했던 신돈 또한 보수세력의 완강한 저항과 높아지는 권세 사이에서 자기조절을 하지 못하고 부정축재 및 사치향락을 일삼아 결국에는 사회개혁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고 끝내 반역죄로 처형당하였으며, 여불위와 마찬가지로 왕의 ‘친부(親父)’라는 역사적으로 오랜, 그리고 미스터리하기 그지없는 ‘정치공세’를 받게 된다. 물론, 여기서 고려 우왕과 중국의 진시황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 그 군주가 결과적으로 어떤 군주였느냐는 평가와는 상관없이 세습이 기본이었던 오래 전 왕권시대에 왕족이 아닌 사람이 왕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은 왕실의 피가 혼탁하다는 의미 자체로 이미 부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을 테니.
 
[사기(史記)]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典)>을 끝맺으면서 사마천(司馬遷)은 말한다. “공자(孔子)가 말한대로 ‘명성만 있고 실질이 없는 자’가 바로 여불위 아닌가” 하고.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장대한 계획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지만, 그 문장 자체가 지니고 있는 예측불가(豫測不可)한 논리(論理)는 물론 왕권(王權)의 중앙집중(中央集中)이라는 체제개편이 불가피했던 전국시대 말기의 당시 정세(政勢)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진시황의 왕권강화 정책의 대표적 희생자가 된 여불위를 통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것이 극에 달하면 귀해지고, 귀한 것이 극에 달하면 다시금 보잘 것 없어진다’는 변증법적 세계관(辨證法的 世界觀)의 긴장선(緊張線) 위에 재차 서게 된다.
 
(2004년 1월)


- 고사성어 발췌 :

1. [史記], <列傳>, 司馬遷 著, 김진연 編譯, <서해문집>, 2002.

2. [史記列傳], 司馬遷 著, 김원중 編譯,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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