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자연스레 정리되었다. 만남도 전화도 없이 카톡으로만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엔가 남자 친구에게서 밤늦게 답장이 왔고 나는 아침에 답장을 했다. 그는 이모티콘으로 답을 했고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그런 간단한 답장에도 내 일상을 조잘거리거나, 그의 일상을 물었지만 그런 작디작은 반응이 반복되니 나도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잠수 이별을 한 것 같다. 마무리는 해야 한다 생각하는 성향이라 만남으로든, 전화로든 관계를 정리해 왔었는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만남을 묻지 않으니 우리는 약속이 잡히지 않았고, 전화를 싫어하는 그가 전화 할리 없었다. 카톡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좋은 마음으로 보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주 조금의 원망이라도 하는 날에는 나에게 돌아올 비난들을 생각하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사실 그가 다가오지 않은 것이 헤어짐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의 싸우는 방식 때문이었다. 내가 상처받았다 하면 '피해의식', 상대 탓을 멈추고 나의 감정을 설명하면 '감정핑계', 반성을 하면 '착한 척, 가식', 울면 '세 살 먹은 어린애.'라 하였다. 나는 싸울 때 그런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데 이 사람은 마치 준비해 둔 말처럼 아주 빠르게 정의를 내렸다.
내가 먼저 기분 상하지 않냐 여러 번 물어도 괜찮다던 사람이, 화가 나면 자신의 감정에 신경을 안 쓴다면 화를 냈다. 괜찮다 해서 몰랐다 하면 '사람 마음은 다 똑같은데 몰라주는 내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은 거'라 했다. 나의 감정을 얘기해도 비난적인 단어와 함께 튕겨 나오고, 표현한 적 없는 본인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 직접적인 감정의 소통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사이가 좋을 때도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만남과 전화에서 거리를 두고, 그로 인해 일상적인 소통 또한 너무 적었다. 가끔은 친밀감이 덜 느껴져 불편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답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을 얼마 간 계속 만났던 이유는 이 상황들이 친해지는 과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약속들 때문이었다. '결혼하면 나는 집, 직장만 오가는 사람일 거다.', '나는 내 사람에게 잘한다.', '나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곧 전화와 잦은 만남을 해보겠다.' 했다.
내가 조금만 기다리면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다. 당장 자상한 사람도, 응급실에 간 나를 걱정하는 사람도, 전화와 만남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결혼하면]이라는 단어는 나를 자꾸만 기다리게 했다. 내 마음속에서도 내 성에 안 찬다고 천천히 오는 애정을 나무라지 말자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결혼에 입장하기 위해 대기석에서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결혼 욕구가 넘친 나머지 지금 힘들더라도 결혼을 한다면 그건 잘 되었다는 결과겠지 라는 생각으로... 결혼하지 않은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기간으로 허무하게 보내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 날 지루한 대기석에 앉힌 건 남자친구일까? 앉지 않겠다 거절하면 될 것을 나의 미래를 위해 나 현재를 포기한 건 나 자신이다.
결혼한 삶을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으로 규정한다면, 비혼이 될지도 모르는 내 삶에 행복은 없는가를 생각해 본다. 결혼을 바라보며 지금은 의미 없는 삶인 듯 살아가는 게 내게 좋은 일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럼 나는 앞으로 지금을 소중하게 여겨야지 생각해 본다. 좋은 풍경을 보면 그걸 즐기고, 친구들을 만나면 그 만남을 소중히 하고, 여가시간이 생기면 휴식할 수 있음에 행복을 느껴볼 것이다.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면 좋은 곳에서 즐거운 대화를 하고, 맛있는 걸 함께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그 사람이 결혼할 만한 사람인가, 내게 상처 줄 사람인가 살펴보느라 애쓰지 말고, 그와 함께 있을 때 내 마음이 어떤지를 살필 것이다.
내가 편안한지, 즐거운지, 행복한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제일 잘 안다. 오지 않은 미래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를 잘 보내고 싶다.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