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조각

"못된 생각이 없다"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세상

-백희나 그림책 《알사탕 제조법》을 읽고

by 김예린

거실이 소란스럽다. 요가 매트가 깔리더니, 아홉 살 아들이 의자를 끌고 와서 들어보지 못한 말을 큰 소리로 외친다.


“개똥벌레 자세! 티티바아사나!”
“엄마, 나 봐봐 성공했지?”


아들은 어정쩡하게 두 다리를 의자에 걸쳤다. 바닥을 짚은 손과 팔은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아들의 시선은 의자 위 놓인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알사탕 제조법』에 고정돼 있었다. 백희나 작가의 전작 그림책 『알사탕』은 주인공 동동이가 신비한 알사탕을 깨물 때마다 평소에 듣지 못했던 소파, 반려견, 아빠 등 주변 존재의 속마음을 듣게 되는 마법 같은 이야기다. 『알사탕 제조법』은 그림책 『알사탕』의 세계관을 이어받아, 마음의 소리를 들려주는 나만의 알사탕을 만드는 비법을 담았다.
아들은 책장을 넘기며 알사탕 만드는 방법을 진지한 표정으로 보더니, 그림책을 가지고 와 내 앞에 폈다. 그림책 첫 장에는 알사탕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비밀이 적혀있었다.

‘이 알사탕은 간절한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해 주는 신비한 알사탕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만이 만들 수 있으며, 마음이 깨끗한 자만이 알사탕의 효능을 느낄 수 있다.’ 『알사탕 제조법』(2024), 백희나

“엄마, 마음이 깨끗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순수하다는 거?”
“순수가 뭔데?”
국어사전을 찾아 읽어줬다.
[순수, 純粹: 못된 생각이나 욕심이 없는 것_보리 국어사전]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해맑게 외쳤다.
“난 못된 생각이 없으니깐, 순수한 거네?!”
해맑게 이야기하는 아들에게 ‘그럼, 우리 아들은 순수하지’라고 답했다. 아들은 알사탕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림책에 담긴 알사탕 제조법 속 요가자세와 비법을 따라 할 작정이다. 요가 자세에 몰두한 아들은 보며, 씁쓸한 질문 하나가 남았다.
‘지금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순수한가?’

지난해와 최근까지 뉴스를 가득 채운 사건은 하나같이 순수함과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참사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모욕. 여성 공직자에 대한 무분별한 외모 비하, 전국의 소년상을 찾아다니며, 소녀상에 ‘철거’ 마스크를 씌우는 단체. 무분별한 차별과 혐오가 줄이었다. 누군가의 눈물을 비웃으며 자신이 더 우월한 존재인 양 의기양양한 모습에서 ‘못된 생각이 없는 상태’는 찾기 불가능했다. 이러한 모습은 온라인을 넘어, 일상에서도 목격됐다. 한 카페에서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나누고 있는 베트남 출신 여성들을 보고, 출신 도시를 물어가며 외모를 평가했다. 무례함을 무례인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외치는 풍경 앞에서 한숨만 나왔다.
거리를 나서면 ‘자신의 편의’를 내세운 욕심 가득한 풍경을 마주했다. 웃음소리와 함성으로 가득한 학교 운동회를 두고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고, 걷기가 싫어 장애인 주차구역 등에 불법주차를 일삼았다. 쓰레기통을 찾기 귀찮다는 이유로 음료 컵을 길바닥에 고스란히 두고 갔다. ‘나만 편하면 그만’은 지금 우리 공동체의 현주소였다.

사전 정의대로라면 '순수'는 대단한 도덕적 성취가 아니다. 그저 못된 생각이나 욕심이 없는 상태, 내 마음의 결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용기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에서 ‘순수’는 어리숙함과 무능함의 동의어가 돼 버렸다.
팔을 부르르 떨면서도 "엄마, 나 성공했지?"라며 활짝 웃는 아들의 얼굴 위로 『알사탕 제조법』 속 문장이 겹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알사탕의 효능을 느낄 수 있다’라는 그 판타지 같은 설정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강력한 현실의 무기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이 만들어 낼 '알사탕'을 기꺼이 받아먹으려 한다. 그 달콤한 순수가 나에게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전염되기를 바란다. 약아빠진 세상에서 조금은 미련해 보이더라도, 올해는 계산기 대신 진심을 꺼내 드는 '순수한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이의 흔들리는 요가 자세처럼 조금 어정쩡하고 어리숙하더라도, 그 안에는 세상을 정화하는 맑은 힘이 살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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