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시간이 지나기 직전 그녀가 터벅터벅 사무실로 걸어 들어온다. ‘나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건드리지 마’ 아우라를 한껏 내뿜으며.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 그녀의 감정을 모르는척하거나 그녀의 감정 상태에 맞춰주거나.
난 늘 후자였다. 그녀 때문에 요동치는 나의 감정은 숨기고 널뛰는 그녀의 감정에 맞추기 위해 늘 평온한 척했었다.
누구도 시킨 적 없지만 그녀의 감정 상태를 살피며 눈치를 보던 나와 그게 당연했던 그녀. 시간이 지나 희미해질 만도 한데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기만 하다. 아마도 후회 때문일 것이다. 본인의 감정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그녀의 미성숙함을 탓하지 않고,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해 버린 그때의 나의 미성숙함에 대한 후회.
난 어렸을 때부터 눈치가 빨랐다. 다른 이들의 감정을 잘 읽었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알아차렸다. 그런 나의 눈치력(?)은 그간 대체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눈치력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는 것이다.
눈치를 채다와 눈치를 보다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동사 하나로 같은 눈치가 너무나 다른 의미가 된다. 나의 선택에 따라 내 행동의 주인이 ‘나’에서 ‘남’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꽤 크다.
난 타인의 감정을 잘 알아차렸던 만큼, 또 타인의 부정적 감정이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걱정하며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바로 내 눈치력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얼핏 낮은 자존감 때문인가 싶지만, 또 달리 보면 엄청난 자의식의 과잉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남들은 나에게 크게 관심도 없는데 나 때문에 화가 날 일이 뭐 그리 많겠는가.
이런 모순적인 행동의 원인을 생각해 보니 난 참 모순적인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내가 바라보는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데 그런 나를 남들이 좋아해 주길 바랬다. 스스로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니 남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맞출 수밖에 없다.
문득 내 인생에 과연 ‘나’는 얼마나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맞추며 눈치를 보느라 정작 난 무색무취의 내가 되어버린 걸 아닐까, 그런 선택들을 통해 과연 내가 얻은 건 무엇일까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과거 나의 선택들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남보다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지금의 난 어떤 모습이었을까? 적어도 남몰래 흘린 의미 없는 눈물들은 없었을 것이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만족감 덕분에 많은 일에 자신감을 갖고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때도, 지금도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늦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살리라 마음먹어본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도 남보다 나에게 집중하여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교만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가지는 것이란 걸, 그리고 주변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내는 힘을 가지는 것이란 걸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