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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Apr 03. 2019

등 뒤에 남겨두고 온 추억들에 대하여

드라마 <길모어 걸스>, 그리고 이적의 <숫자>

<길모어 걸스>는 30대의 젊은 엄마 '로렐라이', 그리고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미혼모로 낳아 기른 10대의 여고생 딸 '로리'가 미국 코네티컷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잔잔한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큰 인기를 끌었던 <가십걸>(Gossip Girl)이 고등학생 이야기임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인 소재들로 가득찼던 것에 비해, <길모어 걸스>는 아기자기하고 조금은 심심한 '건강식품' 같은 드라마였습니다.


<길모어 걸스>는 '로렐라이'와 '로리'의 성장 서사입니다. 시즌 1에서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으로 등장하는 '로리'는 중반부 즈음 자신의 꿈이었던 예일대학에 입학하고, 드라마는 이 과정을 따라가며 어린 '로리'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철없는 엄마 '로렐라이'는 시즌마다 남자친구를 바꿔가며(?) 사귀기도 하고 크고작은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길모어 걸스> 시즌1 포스터




<길모어 걸스>는 다른 미드에 비해서 대사량이 굉장히 많은 편이고, 의학드라마나 추리드라마처럼 특이한 소재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한 대화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로리'와 엄마 '로렐라이'는 한시도 쉬지 않고 미국 특유의 농담과 비유적 표현들을 쏟아냅니다.

그래서, 미국에 한 번 가보지도 못한 채,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애쓰던 제게, <길모어 걸스>는 가장 좋은 영어공부 자료였습니다. 예컨대, 혼자 옷장을 뒤지며 옷을 찾다가, 갑자기 <길모어 걸스>에서 봤던 비슷한 장면이 떠올라 혼자서 역할극 하듯이 대사를 외는 식이었죠.

그래서 그런지, 이제 와서 드라마를 다시 보니 저의 영어 말투는 '로리'의 말투를 아주 많이 닮아있네요. (물론 수준은 훨씬 못 미치지만요 ^^;)


당시 저는 'Global Leader'라는 실체 없는 꿈을 마취제 삼아, 고통스러운 대학입시 생활을 견뎌내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일대 진학을 꿈꾸는 고등학생 '로리'는 저 자신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훨씬 사랑스럽고, 똑똑하고, 예쁜 버전이었지만 말이죠.


영원히 이루지 못 할 영어에 대한 짝사랑. 가보지 못한 미국에 대한 (어쩌면 사대주의적인) 동경. 나와 비슷하지만 훨씬 근사해보이는 모습의 주인공 '로리'. 이 모든 것이 버무려져서 저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길모어 걸스>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길모어 걸스>를 오랜만에 넷플릭스에서 다시 발견했습니다. <길모어 걸스> 오리지널 시리즈는 2000년에 방영을 시작해서 2007년에 시즌 7으로 막을 내렸는데, 2016년에 넷플릭스에서  <길모어 걸스 : 한 해의 스케치>라는 제목의 특별편을 제작했더군요. 

오리지널 시리즈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후, '로렐라이'와 '로리'의 1년을 계절별로 담아냈는데, 오리지널 시리즈의 에필로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길모어 걸스 : 한 해의 스케치> 공식 예고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겨울>, <봄>, <여름>, <가을> 4편으로 제작된 특별편을 하나씩 시청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 전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볼 때와 다른 점은, 시리즈 한 편에 맥주 한 캔을 곁들였다는 것.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로리'는 고등학교를 무사히 보내고, 원하던 대로 예일대에 진학했고, 저널리스트라는 꿈을 키워가는 반짝반짝한 2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만에 다시 만난 특별편의 '로리'는 어느덧 30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갑갑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머나먼 미국 고'로리'를 롤모델이자 친구로 삼았던 저도 30대가 되었구요. 


젖살이 통통했던 스무살의 '로리'는,  날카로워진 광대와 턱선을 가진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로리'의 언니로 보일만큼 젊고 아름다웠던 엄마 '로렐라이'의 턱선은 세월만큼 무뎌져 있었습니다.


앳되고 당찬 명문대생 '로리'는 서른두살의 프리랜서 기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로리'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로리'와 첫키스 같은 비밀이야기를 나누던 소꿉친구 '레인'은 남편과 알콩달콩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친구와 연인 사이 그 어디쯤에서 맴돌던 '로렐라이'와 '루크'는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었고, 피쳐폰 시절 'No Cellphone' 경고가 붙어있던 '루크'의 카페에선 손님들이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묻고 있었습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많은 것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꼭 제가 나이든 그 만큼, 함께 나이든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반가웠습니다. <길모어 걸스>에서 희망과 위안을 찾던 그 시절의 제 모습, 그 감정들, 그 시절 저의 우울과 열심과 고뇌와 행복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저는 잠시 그것들에 압도되었습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세상을 빛낼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았던, 무럭무럭 꿈을 먹고 살던 스무살의 '로리'는, 삼십대에 들어서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을 이루지 못했고, 여전히 자기만의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로리' 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다가 자리잡지 못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삼십대들의 무리'('thirty something gang')도 등장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저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예일대를 졸업한 '로리'가 갑자기 화려하고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된다거나 하는 아름답고 박제된 결말이 아니라 좋았습니다. 회사를 퇴직하고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저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고,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고민과 숙제를 안고 사는 제 친구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반가움과 씁쓸함의 감정이 동시에 저를 스쳐갔습니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로리'는 고등학교 시절 남자친구를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남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둘은 아주 반가운 얼굴로 안부를 나눕니다. '로리' 자신과 엄마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로리'는 남자에게 "네 이야기를 써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남자가 어떤 이야기를 쓰려고 하느냐고 되묻자, 로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야기합니다. "네가 최고의 남자친구였다는 것. 자상하고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 내가 조금 더 성숙해서 너를 만났더라면 좋았겠더라는 것. 그 때에 널 몰랐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라는 것."


드라마 상으론 단지 몇 분에 불과한 장면이었지만, <길모어 걸스> 전(全) 편을 외우도록 본 저는, 그 짧은 대사에서 로리가 그와 함께 겪었던 모든 장면을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제 연애도 아니고, 제 전남친도 아니었지만 그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제 과거도 아닌 어떤 것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한 향수와 그리움을 느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굽이굽이 지나 무사히 30대가 된 '로리', 그리고 '로리'를 통해 본 저 자신에 대한 기특함이었을까요. '로리'와 제가 모니터를 넘어 함께 보낸 '그 시절들'이 일렁였습니다.




추억에 푸욱 빠져 <길모어 걸스>를 보다가 저는 뜬금없이 이적의 <숫자>라는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이적 <숫자> 뮤직비디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모두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생각을 멈추려고 해봐도
내 안에 나도 모를 작을 방이 있나봐

그곳에 웅크린 한 아이가
연필 하나 들고 써내려가는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이제는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네가 걸어왔던 적은 몇 번이었나
우리가 봤던 영환 몇 편.
커피에 시럽은 몇 번 눌러서 넣었나.
우리 처음 키스를 나눴던 시각과
제일 길었던 통화 시간
내게 이별을 선언할 때의 눈 깜빡임.

수없이 많았던 추억들을
감히 세어보려 밤을 지새 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이제는 숫자로만 남은 것 같아

- 이적 <숫자> 中


지나간 연인이 아니더라도, 등 뒤에 남겨두고 온 모든 추억과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는 가사인 것 같습니다.


'로리'와 함께 했던 그 시절 제 기숙사의 방 번호. 기숙사 소등시간 이후 방에서 몰래 영화를 보는 것이 최고의 일탈이었던 밤들. 일분 일초가 아까워 급식실에 기다랗게 줄을 서서 외우던 영단어며 국사의 년도 따위. 체육복과 안경과 질끈 묶은 머리를 하고선, 패션잡지를 뒤적여 대학가면 입고싶은 옷들을 예쁘게 오려 붙여 모았던 비밀스러운 스크랩북.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함께했던 친구들의 얼굴.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장면, 장면들이 제겐 숫자로 남아 있습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반짝반짝했던 그 시절의 어리고 미숙했던 저 자신이 아주 가끔은 그리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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