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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라 Sep 30. 2024

흐르는 빗물처럼

ㅡ정물화 앞에서 인물화 회상

-- 나이 60에 그림이라는 취미를 찾았다. 놀랍게도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나를 찾아왔다. 왠지 새로운 시작의 길조로 여겨진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어찌 지금까지 모르고 살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다.

인물화 그리기가 내 그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장난처럼 자화상을 그리면서 시작되었으니 ‘나르시소스’처럼 자기 자신에게 빠져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 재미있어하니 그릴 때마다 실력이 오르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어떤 그림은 거의 99% 나를 닮기도 한다. 나를 많이 닮은 그림을 볼 때 그 희열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나를 닮은 느낌이 진할수록 뿌듯하고 성취감이 높아진다. 취미생활은 바로 이런 묘미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물을 닮게 그린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신이 하사한 재능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을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발을 동동 구르며 유치할 만큼 좋아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오로지 내 얼굴만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미치도록, 가슴 설레도록 즐겁다. 신기하게도 다른 것은 그리고 싶다는 유혹을 받지 않는다.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렇다.


 이제 생각해 보면 나는 초등학교 때 만화를 많이 봤다. 그 시절 나는 예쁜 인형 그리기를 아주 즐겨했는데 예쁜 것을 한창 좋아하는 학급 친구들이 온통 내게 인형 그려 달라고 손 내밀었다. 많이 그려 주었다.

사실은 짧은 만화책을 내가 직접 제작한 적도 있었다. 며칠 전 통화할 때 친구 자양이는 그 만화를 자기가 재밌게 봤다고 했다. 자양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증인이었다. 그때는 만화가, 가 나의 장래 꿈이었다....   중학교 가면서 인형을 그리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은 초등생이나 할 일이라고 여기면서 바로 끊어 버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50년 동안 나는 미술에 젬병이라고 여기며 그림 근처에는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뭐지? 초등학생 시절 만화그린 그 아이는 재능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오로지 인물화에만 쏠리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가면서 지켜볼 일이다. 이제 이것으로 짧게 잡아도 10년은 즐거울 것 같다. 10년은 이것으로 내 인생을 채울 것 같다. 올해, 연말이 기대되고 미래가 기대된다. ㅎ~

인생이 짧아서 사람은 각자의 재능을 30%도 발굴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

2년 6개월 전,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면서 초등학생 같은 감정으로 위의 글을 써 놓은 것을 노트에서 발견했다.


 요즘 나는 인물화를 쉬고 있다. 물론 인물화에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정물이나 풍경에도 매력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꽃, 과일, 풍경, 기타 사물 등 다른 소재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관심의 범위가 넓어졌다고 해 두자. 불과 2년 만에 그 당시의 시선과 사고와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흥미만큼 잘 안되니 고민도 많다. 다양한 학습이 필요하므로 여러 장르를 연습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은 더 여유를 가지게 된 것 같다. 바쁘지 않게 천천히 하면서...

자화상에 빠져 그것만 할 때는 어찌하면 더 닮게, 더 자연스럽게, 더 멋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신경 썼다면 지금은 소재를 선택하는 일이 조금 더 어려워진 것 같다. 내 수준에 맞는 작품을 해야 하니 단순화된 다양한 풍경을 찾느라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인물화든 정물화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는 않다. 물이 흘러가듯 나도 끊임없이 흘러서 새로운 지점에 도착하면 잠시 머물다 다시 출발하면서 진보와 정착을 반복할 것이다. 두 가지는 모두 도약하는데 소중한 필수 영양분이다. 앞으로 나의 관심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며 어떻게 변화해 갈지 아무도 모른다. 정말 많이 궁금하다.

평범하지만 평화로운 곳에 내 발에 맞는 운동화로 강건하게 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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