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락이월드'잭 다니엘스 편에서 못 다룬 이야기
* 안녕하세요? 14f <주락이월드> 코너를 만들고 있는 조승원 기자입니다. 본업은 25년 차 사회 분야 전문 기자이지만, 개인적으로 20년 넘게 술의 세계를 탐험해 왔습니다. 그 결과물로 '뮤지션들이 사랑한 술'을 다룬 에세이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 예술가의 술 사용법(2017)>,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술을 분석한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2018)>, 켄터키 버번위스키 증류소를 탐방하고 쓴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 등 주류 서적 3권을 출간했고, 이에 앞서서는 mbc 창사 50주년 다큐멘터리 <술에 대하여>를 공동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유튜브 채널에서 영상을 만들다 보니, 시간 제약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드리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생겨서, 이렇게 별도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영상 본편에서 다루지 못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이 공간에서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 아래의 내용은 제가 쓴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예술가의 술 사용법)>과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에서 발췌 요약했습니다.
<주락이월드 4편 - 잭 다니엘스> 본편 영상 보기 ---> https://youtu.be/bE-oD_tgi_o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미국 위스키, 잭 다니엘스를 탄생시킨 창업주 잭 다니엘. 그의 인생 이야기는 미국인들에겐 신화나 전설처럼 여겨진다. 삶 자체가 극적이어서 이런 인물이 현실에 존재했는지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게 다 잭 다니엘 증류소의 마케팅 전략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위스키 홍보를 위해 이야기를 꾸며내 잭 다니엘을 신화 속 인물로 과대 포장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잭 다니엘의 인생을 몇 년간 조사한 전기 작가 피터 크래스(Peter Krass)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부 과장된 게 있긴 해도 많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다.
피터 크래스가 쓴 전기 <신화가 된 사나이 잭 다니엘 (원제: Blood & Whiskey: The Life and Times of Jack Daniel>에 따르면, 잭 다니엘은 1849년에 테네시 작은 마을 린츠버그에서 10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잭 다니엘 출생을 놓고서부터 이런저런 설이 많다. 무덤 묘비에는 1850년생으로 돼 있는 반면, 테네시 주 정부 도서관 기록엔 1846년 생으로 적혀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피터 크래스가 인구 조사 기록과 여동생 일기까지 확인한 결과 1849년생으로 최종 확인됐다.
유년기는 불우했다. 잭 다니엘이 태어난 직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15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졌다. 그러자 새어머니는 어린 잭 다니엘을 버리고 곧바로 재혼했다. 오갈 데가 없어진 잭은 후견인인 댄 콜 (Dan Call)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댄 콜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목사(전도사)이면서 농부였다. 제법 큰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면서 남는 곡물로 위스키를 제조했다. 댄 콜의 농장에는 니어리스 그린(Nearis Green)이라는 흑인도 있었는데, 그가 잭 다니엘에게 위스키 증류 기술을 가르쳐준 인물이다.
니어리스 그린에게 증류와 여과 기술 (차콜 멜로잉)을 터득한 잭 다니엘은 위스키 판매상으로 활약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은다. 그러던 중 25살 때 아버지 유산 1,000달러를 운 좋게 물려받게 되면서 저축한 돈까지 탈탈 털어서 <다니엘 앤 콜 Daniel & Call> 이라는 증류 회사를 차린다. 이때가 1875년 11월 27일이다. 이후 1887년에는 지금 증류소 자리로 옮기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아무리 위스키가 잘 팔려도 하루에 300갤런 이상은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품질 관리를 확실하게 한 게 비결이었다.
잭 다니엘은 마케팅 능력도 천부적이었다. 1892년 잭 다니엘은 10인조 관악기 밴드를 조직해 음악으로 위스키 홍보에 나섰다. 밴드는 거리 곳곳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열거나 술집 개업식과 장례식에서 연주를 하며 잭 다니엘 위스키를 널리 알렸다. 1897년에는 지금 같은 사각형 병을 도입해 크게 히트를 쳤다. 마차에 싣고 달릴 때 둥근 병은 굴러다니다가 깨지기 쉽지만, 잭 다니엘이 고안한 사각형 병은 튼튼하고 안전했다. 이어 1904년에는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베스트셀러인 <Old NO.7>을 출품해 금메달을 거머쥔다. 잭 다니엘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한 결정적인 계기였다.
잭 다니엘스를 사랑한 뮤지션은 정말 한둘이 아니다. 특히 자유분방한 록 음악계에는 죽고 못 사는 마니아가 즐비하다.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요절한 아티스트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그때 사전 조사를 해보니,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록 뮤지션 중에도 잭 다니엘스 애호가가 꽤나 많았다.
만취 상태로 차에서 잠을 자다가 돌연사한 AC/DC 보컬 본 스콧이 대표적이다. 그는 생전에 거의 매일 잭 다니엘스를 폭음했다. 본 스콧은 라이더 (아티스트가 필요한 물품을 정리해 공연 주최 측에 보내는 문건)에도 “잭 다니엘스만 있으면 다른 것은 뭐든 상관없다”고 적었을 정도였다. 보드카 40잔을 오렌지 주스에 섞어 마시고 숨진 레드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 이 전설적인 드러머 역시 평소에 잭 다니엘스를 끼고 살았다. 그런가 하면 커트 코베인도 심각한 잭 다니엘스 중독자였다. 녹음할 때는 작업실에 잭 다니엘스를 놔뒀고, 저 유명한 3집 <NEVERMIND> 앨범 커버 촬영 때는 혼자서 5병을 마시고 쓰러지기도 했다.
‘잭 다니엘스를 안 마시면 록커가 아니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다. 만약 전 세계 전 현직 록 뮤지션을 대상으로 주류 선호도 조사를 한다고 치자. 아마도 잭 다니엘스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할 것이다.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jack daniels & rock”이라고 쳐보시라. 잭 다니엘스를 마시고 있는 전설적인 뮤지션들의 사진이 줄줄이 뜰 것이다. 거기엔 대기실에서 병째로 들이키는 젊은 시절 지미 페이지도 있고, 무대 한쪽에 놓인 잭 다니엘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차드도 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활동한 록커는 대략 둘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잭 다니엘스를 좋아했거나, 아니면 아주 많이 좋아했거나'
잭 다니엘스와 록 뮤지션과의 일화 중에 압권은 당연히 머틀리 크루다. 이 그룹 멤버들의 잭 다니엘 사랑은 아주 지독할 정도이다.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기 전에 일단 동영상부터 보시라. 유튜브에서 “motley crue jack daniels” 라고 검색하면 1987년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 공연 영상이 뜬다. 이 공연 하이라이트는 히트곡 “Ten Seconds to Love”(정규 2집 <Shout at the Devil>에 수록) 간주 부분이다. 베이스 솔로를 마친
니키에게 보컬인 빈스 닐이 잭 다니엘스를 건넨다. 니키가 한 병을 모두 객석에 모두 뿌리자, 빈스는 또 한 병을 가져온다. 니키는 다시 잭 다니엘스 세례를 퍼붓다가 ‘한번 시원하게 마시라’는 빈스의 부추김에 고개를 젖히고 남은 술을 들이켠다. 니키의 1차 음주쇼가 끝나고, 다음은 드러머 토미 리의 차례. 토미는 술이 1/3쯤 남은 잭다니엘 병을 넘겨받은 뒤, ‘묘기 대행진’을 펼친다. 발로는 베이스 드럼을 때리고, 왼손으로는 심벌을 치면서, 오른손으로 잭 다니엘스 병을 들고 그대로 ‘원샷’! 정말이지 대단하다. 술 마시면서 동시에 저렇게 드럼을 치다니...아무리 보고 또 봐도 말문이 막힌다.
2011년 12월. 어느덧 중년이 된 머틀리 크루 멤버들이 CNN 간판 프로그램인 <피어스 모건 투나잇 PIERS MORGAN TONIGHT> (*주 미국 국민 MC 래리 킹이 은퇴하면서,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 미러’ 편집장 출신인 피어스 모건이 맡은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할리우드 록 클럽인 ‘위스키 어 고 고 Whisky a Go Go’에서 녹화한 이 방송에서 머틀리 크루는 특유의 직설 화법으로 비행과 일탈을 털어놨다. 당연히
여자(섹스)와 마약, 술이 주된 화제였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잭 다니엘스 얘기였다.
멤버들이 오지 오스본과 어울려 술 마시던 시절을 떠올리자, 진행자인 피어스 모건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이 한참 잘 나갈 때 말이죠. 투어를 하게 되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갑니까?”
빈스 닐은 주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오후 1시나 2시쯤 일어나죠. 눈 뜨면 바로 잭 다니엘스 병을 집어 듭니다. 그게 깨어나서 첫 번째 일이죠. 그리고는 뭘 좀 먹는데요. 일단 그릇에 사흘 정도 지난 참치가 있어요. 거기다가 시리얼을 넣죠.”
문제는 그다음.
“그런데 어차피 우유가 없으니까요. 그릇에다가 우유 말고 그냥 잭 다니엘스를 넣어서 먹습니다.”
옆에 있던 토미 리도 한마디 거든다.
“그러니까 그냥 시리얼(cap'n crunch*)이 아니라, 잭 다니엘스 시리얼(Jacked’n Crunch)을
먹는 거죠.” (cap'n crunch는 유명한 시리얼 제품 이름)
우리 식으로 빗대서 말하면, 진탕 술 퍼마신 다음 날, 소주에 밥 말아서 해장했다는 얘기이다.
잭 다니엘스 블랙 라벨 병에 찍힌 ‘old NO.7(올드 넘버 7)’은 무슨 뜻인가?
‘old NO.7’이 어떤 의미인지를 놓고, 이런저런 설이 존재한다. 잭 다니엘이 처음 위스키를 만들었을 때, 일곱 번째 통에 넣어 둔 위스키가 제일 맛있어서 7이란 숫자를 붙였다는 말도 있다. 또 잭 다니엘이 레시피를 바꿀 때마다 1번, 2번, 3번.. 이런 식으로 번호를 붙였는데 7번째 시험 제품이 가장 좋아서 이걸 정식 레시피로 채택했다는 설명도 있다. 더 재미있는 주장은 바람둥이였던 잭 다니엘이 자신의 애인이 7명이라는 걸 자랑하려고 장난스럽게 적었다는 것이다. 100년 넘게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올드 넘버 7의 진실은 전기 작가 피터 크래스에 의해 드러났다. 피터 크래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드 넘버 7은 잭 다니엘 증류소의 초창기 과세 구역 고유 번호였다. 즉 잭 다니엘이 증류소를 맨 처음 등록하면서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고유 번호가 ‘4구역 7번’(즉 4번째 구역의 7번째 증류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old NO (과거의 번호)일까?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1876년, 미국 연방 정부가 과세 구역을 합병하면서 잭 다니엘 증류소는 고유 번호가 ‘4구역 7번’에서 ‘5구역 16번(5번째 과세 구역의 16번 증류소)’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당시 잭 다니엘은 자신의 증류소가 5구역으로 합쳐지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5구역 증류소 상당수가 저질의 싸구려 위스키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과 한 묶음이 되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 강제로 과세 구역이 합병되자, 잭 다니엘은 정부 조치에 반항하는 의미로 옛날 고유 번호(old NO) 7을 병에 남겨뒀다고 한다.
사실이다. 미국에선 각 카운티(주 state 바로 아래에 있는 행정구역)별로, 주류 판매 허용 여부를 자율적으로 정한다. 1933년 금주법 폐지 이후 주민 투표를 통해 금주 정책을 계속 유지할지 선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투표를 통해 주민들 스스로 주류 판매를 금지한 지역을 드라이 카운티(dry county)라고 부른다. - 반면 주류 판매가 합법적으로 허용된 지역은 웻 카운티(wet county)라고 한다- 잭 다니엘스 증류소가 있는 린치버그는 무어 카운티에 속해 있는데, 대표적인 드라이 카운티이다. 따라서 린치버그에 있는 음식점이나 가게에서는 -잭 다니엘을 포함한- 저도수인 맥주를 제외한 그 어떤 주류도 팔지 않는다. 잭 다니엘 증류소 방문자 센터에서만 기념품 용도로 주류를 판매하는 게 허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위스키를 만드는 곳에 위스키 마실 술집 하나가 없다니. 그게 말이 돼?’ 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사실이다. 린치버그뿐 아니라, 테네시에는 주류 판매가 허용되지 않는 지역(드라이 카운티)이 제법 많다. 전체 95개 카운티 중에 9곳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곳에서는 맥주를 제외한 그 어떤 술도 팔지 않는다. 또 대다수인 76개 카운티에선 전면 금지까지는 아니어도, 주류 판매에 어느 정도 제한을 둔다. 우리나라처럼 아무 규제 없이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지역(웻 카운티 wet county)은 10곳에 불과하다.
테네시에 드라이 카운티(주류 판매 제한 지역)가 많은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사실 테네시는 전통적으로 위스키로 유명한 곳이었다. 1790년대부터 위스키를 제조하기 시작해 한때는 켄터키에 버금갈 만큼 증류소가 많았다. 그런데 19세기에 금주 운동(Temperance)이 강력하게 펼쳐지면서 1909년에 주류 판매 금지 법안이 주 의회를 통과한다. 그러니까 미국 전역에서 금주법 (Prohibition, 1920~1933)이 시행되기 10여 년 전부터 테네시에선 자체적으로 주류 판매를 금지했다. 금주운동 전통이 워낙 강한 지역이라서 금주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증류산업이 발전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테네시 주 전체에 있는 증류소가 잭 다니엘과 조지 디켈, 딱 두 개뿐이었다. 테네시에서 증류소가 늘어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내가 잭 다니엘스 증류소에 갔을 때, 증류소 부지가 워낙 넓어서 입구가 어디인지 찾지 못했다. 주변을 빙빙 돌다가 겨우 입구로 들어와 방문자 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 밖으로 나왔더니 한눈에 봐도 증류소가 엄청나게 크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잭 다니엘 증류소 면적은 약 72만 8천 제곱미터나 된다. 축구장 100개 크기로, 서울 마곡산업단지 전체와 맞먹는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위스키를 만드는 곳이니 얼마나 규모가 크겠는가. 참고로 잭 다니엘 연간 생산량은 2억 병을 훌쩍 넘는다. 2010년 무렵에 1억 5천만 병이었는데, 몇 년 사이에 5천만 병이 또 늘었다. 이렇게 많은 위스키를 전 세계 160개국으로 수출한다. 연간 매출액도 약 40억 달러(약 4조 8천억 원)에 달한다. 잭 다니엘이 괜히 잭 다니엘이 아니다.
잭 다니엘이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위스키이다 보니, 발효 시설도 거대하다. 대체 얼마나 크냐고? 놀라지 마시라. 4만 갤런(약 15만 리터)짜리 대형 발효조가 무려 64개나 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건지는 켄터키 증류소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버팔로 트레이스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9만 2천 갤런짜리 발효조 12개를 보유한 버팔로 트레이스와 단순 비교하면 잭 다니엘의 발효조 생산 능력은 두 배가 넘는다. 물어보니, 일주일이면 256만 갤런에 달하는 디스틸러스 비어(distiller's beer 발효액)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 여길 먼저 들렀다면 버팔로 트레이스에 갔을 때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잭 다니엘이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나 많이 팔린 데는 ‘콜라’와 섞은 ‘잭콕’ 칵테일이 큰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잭 콕을 가장 맛있는 타는 ‘황금 비율’은 존재할까? 한 마디로 정답은 없다. 자기 취향대로 섞어 마시면 된다. 잭 다니엘 본사에서 추천한 레시피는 <잭 다니엘 : 콜라 =1 : 3> 이다. 즉 잭 다니엘 한 잔을 넣고, 그 잔에 콜라를 부어 석 잔을 따라 넣으란 설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시면 술꾼들에겐 좀 심심하다. 그동안 잭 콕을 족히 3만 잔 이상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필자의 레시피는 두 가지이다. 먼저 상대가 ‘중급 술꾼’일 경우엔 <잭 다니엘 : 콜라 = 1: 2>로 타고, 상급 술꾼에겐 <1:1.5>로 타 준다. 필자가 직접 마실 경우엔 어떻게 하냐고? 개인적으로는 <잭 다니엘 : 콜라 = 1:1>을 가장 선호한다.
잭 다니엘스 증류소 어시스턴트 디스틸러 크리스.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유머를 잃지 않고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잭 다니엘스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제가 쓴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에 담겨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한 권 빌려 보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주락이월드 영상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