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lust.11
2017년 싱가폴 어딘가에서…
싱가폴 금융지대의 빌딩들 사이로 펼쳐져있는 차이나타운은 흥미로운 곳이다. 사기와 범죄의 온상이자, 소박하고 서민적인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여기 오면, 금융업으로 번성하기 전 싱가폴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그 차이나타운 사이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스팟이 몇군데 있는데, 내 싱가폴 생활의 단비같은 곳들이었다. 지금 가게 상호명이 잘 기억이 안나지만, 차이나타운 바로 옆에 있는 클락키역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근대유럽풍 주택거리가 나오는데 그곳 일층에 인도인주인장이 하는 바가 있다. 머리가 길고 굉장히 매끄럽고 부드럽게 생긴 사람이라서 한 번 보면 좀처럼 잊혀지지않는 외모를 지녔다. 그와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그곳에서는 드물게 인도인 주인장이 하는 바고, 내가 좋아하는 IPA맥주를 팔던 곳이라 자주 갔다. 제일 좋은 점은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이란 점이었다. 그 거리 자체가 번화가와 그렇게 떨어져있는 곳이 아닌데도 신기하게 평일이나 주말이나 사람이 별로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 많은 곳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개인적 장애가 있는지라, 사람많은 곳을 잘 가지 못한다. 조용하고 적당하게 나를 즐길수 있고, 조금의 허세를 부릴수 있는곳이라면 나는 항상 만족한다. 나처럼 사람많은 곳을 싫어하고, 혼자 다니는게 습관화 된 사람이라면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리고 또 어느곳이 있던가? 2017년의 싱가폴과 나..아 그 사이에는 물론 내가 처음 맛봤던 제대로 된 위스키와 시가가 있다. 차이나타운역에서 식당가를 지나 조금 깊숙히 들어가면 ‘올드쿠반’이라는 가게가 나온다. 이것도 똑같이 인적이 그렇게 많지 않은 근대유럽풍 주택 2층에 있는데, 도저히 그런건물에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지니고 있는곳이다. 나는 지금까지 적지않은 시가바를 돌아다녔지만, 이 곳만큼 많은 종류의 위스키와 시가를 한 곳에 보유하고 있는 곳은 아직 본적이 없다. 물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곳이기도 하다. 하긴…2달러짜리 음식과 200달러짜리 시가나 위스키 한 잔이 같은 거리에 혼재하고 있는것이 싱가폴의 매력이다. 나는 이 곳에서 피트향 제대로 나는 위스키 ‘Lagavulin’ 을 처음 마셔봤다. 그 때 그 느낌을 잊을수가 없다. 마치 바베큐한 고기향을 마시는 느낌이라고나 할까…그 곳의 서브를 보던 사람중에 필리핀 여성서버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키가 컸고, 외모는 필리핀의 역사의 부분들중에서 유럽의 부분을 더 닮았다. 아 참, 이곳이 나의 조금의 허세를 충족시켜줬다면 물론 짧은 미니스커트에 타이트한 블레이저를 입고 서브를 보던 웨이트리스들도 그 중의 하나였을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자주 시가 한대를 태우면서 책을 읽었었다. 그 때 아마 내가 읽었던 책이 도스토예쁘스키의 ‘악령’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웃기기도 하다 ‘악령’과 ‘싱가폴’이라니 무언가 맞춤맞으면서도 전혀 상반된 두개의 키워드다. 그런데 하루는 그녀가 책에관한 질문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사적인 얘기도 나누게 되었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 하지만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몇번째로 그곳을 가서 몇번째로 그녀와 얘기를 나누던 때였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계산을 하려고 할 때, ‘저는 오늘이 마지막이고, 내일 모레 필리핀으로 떠나요’라는 말의 묘한 뉘앙스였다. 그녀의 눈에 담긴게 뭐였는지 내가 읽을 수 있고, 좀 더 대담했다면 나는 그녀의 연락처를 쉬이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인연이 이어졌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인연이 그렇듯이, 내 경험상 장거리중의 이런 상장거리는 이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아무튼, 싱가폴의 옛적 낭만과, 맛좋은 술과 시가, 그리고 예쁘고 몸매좋은 웨이트리스들을 보고싶다면 ‘올드쿠반’으로 가시라. 단, 지금도 그곳이 영업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곳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싱가폴에서 내 기억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에 갔던 그 바에서도 혼자 맥주를 마시다가 만난 베트남여자가 한 명 기억에 남는다. 이제 왜 내가 이곳이 사기와 범죄의 온상이자, 소박하고 서민적인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지 말해주겠다. 싱가폴은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모여들고,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더 돈을 벌려고 모여드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태생부터가 중국인,말레이인,인도인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에다가 그 곳에서 본토인들이 또 끊임없이 이곳으로 밀려들어온다. 거기에다가 2달러짜리 값싼 오리국수나 치킨라이스등과 200달러짜리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이 정확히 같은 거리에 있는 곳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아 참 내가 그 베트남여자와 그녀의 집에까지 ‘다 됬구나!’ 하는 마음으로 갔을 때 방에서 나온 중국어를 쓰는 두명의 아이들을 보고는 도망치듯 뛰쳐나왔다는 걸 내가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볼 때 이일이나 시가바에서의 일이나 싱가폴이 아니라면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