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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Jan 05. 2022

은평구에 앉아 메타버스 타기

2022.01.05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스스한 채로 은평구에 앉아 메타버스에 탄다. 최근의 내 메타버스는 주로는 통근 버스인데 메타버스는 초스피드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지점 외에 통근이 주는 싫은 마음은 해결해주지 않는다. 은근히 피곤하다. 메타버스 타고 여기저기 싸돌아 다닌 탓이다. 메타버스는 멀티버스 승강장들 사이에서 환승도 자주자주 해야 하니까 생각보다 길을 잃기도 쉽다.


메타버스 타고 출근하면 끝 아닌가 싶지만, 보안이 철저한 회사의 특성상 재택근무를 하면서도 업무 종류에 따라 연결해야 하는 네트워크가 다르고 그렇다 보니 원격으로 중구에 있는 PC 두 대와 집의 랩탑을 오가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잦은 버스 환승이 일어난다. 그래서인지 은평구와 중구를 가로질러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는 느낌이다. 엉덩이는 이케아에서 사 온 저렴한 에펠체어에 두고 아픈 허리를 씰룩이고 있다고 해도 네트워크 상으로는 메타버스 타고 이리저리 신나게 (신나진 않지만) 싸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앗! 줌 미팅이 예약된 시간이다. 다시 메타버스 타고 보안이 따로 설정되지 않은 우리 집 와이파이로 이동할 시간이다. 줌을 켠다. 중구에서, 송파구에서, 서울과 경기도 각 지역에서, 나는 은평구에서 각자의 공간에서 메타버스 대절해서 사람들이 속속들이 미팅에 들어온다. 아, 참! 메타버스용 얼굴 챙길 시간이다! 줌의 비디오 설정에서 '내 모습 수정 필터'의 뽀샤시 효과를 먹인다. 입술 색도 살짝 넣는다. 가벼운 아바타 생성 완료! 자연인 졔졔의 뾰루지는 가려지고 떡진 머리는 뿌연 필터로 기름기가 사라진다. 그러니까 카메라로 보이는 나는 나이지만 내가 아닌 것이다. 


미팅에 참여하고 있는데 미팅 참여 인원 중 하나가 미팅이 지루했나 스페이스 메타버스를 타고 갑자기 우주로 이동한다. '회의 내용처럼 멀리도 가네' 생각하던 중에 우리 집 상전 고양이 셋이 한 번에 소리친다. 고요 속에 이 세계와 저 세계가 구분이 되지 않던 상태에서, 메타버스와 은평구버스로 이 세상이 듀얼버스가 되는 이벤트가 발생했다. "배고파! 밥 달라고!" 갑자기 카메라 앞에 난입한 고양이들도 멀티버스를 타고 중구로, 경기도로 미팅 참여 인원의 집을 향한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은평구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 밥을 챙겨준다. 배고팠나 허겁지겁 밥 먹는 아이들이 식사를 잘하는지 확인하고 한 숨 돌리려는 찰나,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밥그릇이 비었다냥!" 아! 최근 시작한 내 고양이 리조트에 사는 스무 고양이들이 배고픈 시간이 되었다. 핸드폰을 열어 푸시 알람을 터치하고 고양이 리조트에 들어간다. 고양이들은 서로 핥아주고 뛰어놀고 싸우거나 꾹꾹이를 하고 있다. 고양이들에게 츄르를 나눠준다. 쓰담쓰담도 해준다. 아이들 사진도 찍어 둔다.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그 사이 은평구 고양이들은 배 부르고 등 따신지 잠이 들었다.


리조트 고양이들

나도 슬쩍 그 옆에 눕는다. 메타버스 속 나는 팔짱을 끼고 웃는 사진으로 '대화 가능' 버튼을 켜고 채팅창에 존재하고 있다. 그건 사실 내가 아니다. 하지만 급한 답장을 해야 하는 순간 다시 내가 되겠지. 지금은 일단 자연인 졔졔의 등짝을 지져야겠다 생각하는 차에 제페토 부동산에서 연락이 온다. "나만의 집을 꾸미는 공간, 마이하우스 앱이 오픈했어요!" LTE 메타버스 타면 또 순식간에 얼마 전 산 구찌 백이 있는 제페토 세계에 도착하겠지만 조만간 집 꾸미기 완료하면 랜선 집들이해야겠다 생각만 하고선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니 미뤄둔다. 


제페토 속 힙한(?) 나


재택근무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1월 1일 이후로, 실은 정확히 살폈더니 12월 31일 이후로 집 밖에 나간 시간이 3시간, 딱 한 번 밖에 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돈을 주고 하라고 해도 히키코모리는 못할 것 같더니 이젠 잘도 알아서 히키코모리처럼 산다. 식음료는 배달이나 택배로 해결하고 있고, 커피 재고도 집에 쌓여있으니 물만 데우면 되고, 랩탑과 와이파이를 끼고 있으니 일도, 사회생활도 못할 게 없다. (그렇다고 일이나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게다가 머리도 매일 감지 않고, 자고 일어난 옷 그대로 눈곱만 떼고 거실과 화장실 정도만 오가면 되니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 해가 떴는지 비가 온지도 모르는 자연인 졔졔는 은평구의 한 빌라에서 반팔 티셔츠를 입고 14평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도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아무 문제가 없이 산다. 이것이 메타버스 시대의 도래인가, 온라인 상의 삶이 오프라인 상의 삶보다, 온라인 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오프라인 상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길어진다는 그 시대는 이미 은평구에 와있다. 글도 브런치에 쓴다. 브런치에 글쓴이로서의 졔졔라는 자아도, 최대한 솔직하자 싶어도 메타버스 자아다. 내 모습 수정 필터를 쓴 줌 속의 내 모습이나 화려한 화장과 명품 백으로 치장한 제페토 속의 나나, 고양이 리조트 운영을 하며 시간당 몇 조원 씩을 벌어들이는 나처럼 브런치 속 졔졔도 은평구의 자연인 졔졔랑 같은 듯 거리가 멀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이제는 타기 싫어도 집 앞에서 경적을 울려대는 메타버스에 타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멀미가 난다.


버스에서 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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