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승부는... 조작이었다.
"열 마디 딸에게
발렌타인 문자 왔어?"
그 순간
남편의 얼굴이 아들 이야기할 때보다
더 시무룩해졌다.
뭔 일이지 싶어
나는 한마디 더 던졌다.
"아침에 문자 안 왔어?"
구라쟁이 두 눈에
이제는 심통이 가득하다.
"그럼, 당신은 문자 보냈어?
해피 발렌타인이라고
먼저 문자 보내지."
그러자
아침부터 남편은 딸에게
“해피 발렌타인”이라며
하트를 뿅뿅뿅 날렸단다.
그런데 읽고 씹혔다면서
처진 눈이 축 늘어진 채 더 시무룩해졌다.
"당신한테는 문자 왔어?"
순간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침에 나에게 해피 발렌타인이라는 문자와 함께
엉성한 이모티콘이
짧게 하나 왔었다.
아빠한테 받고
나에게만 문자를 보냈나 보다.
하지만
차마 그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었다.
구라쟁이가 다시 한번 물었다.
"당신한테는 왔어?"
순간 당황한 나머지
이번엔
내가 구라쟁이가 됐다.
잠시 멈칫하다가
나는 말했다.
"아니, 안 왔어.
당신한테도 안 왔는데 나에게 왔겠어?"
녹음하느라 바쁘다더니
진짜 바쁜가 보네.
그래도 그렇지.
당신한테는 보내야지.
당신이 대신 혼나준 게 얼만데."
괜히 한마디 더 붙였다.
"나쁜 지집애!"
내가 문자를 받은 걸 모르는 남편은
괜히
나를 위하는 척한다.
“내가 뭐라고 해볼까?”
“전화해서 바쁘냐고 물어볼까?”
툭, 툭 던지듯 말하지만
그 말속에 묻어 있는 건
내 마음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물끄러미 남편을 쳐다보았다.
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승부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아파온다.
이제는 아들 말고
딸 보면서 뭐 좀 하고 싶은데
딸은 감감무소식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은 사람이다.
참다못해
나는 딸에게
'call me'
라고 문자를 보냈다.
5분도 안돼
전화가 왔다
"엄마, 무슨 일이야?
리허설하다 나왔어.
왜?"
순간 짜증이 올라온 나는
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 아빠 문자
읽었어, 안 읽었어?
"어, 읽었어."
참 시크하게
대답한다.
그래서
더 열이 난다.
"그럼, 아빠한테
문자라도 해줘야지.
문자 보내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걸 씹어!
삼천마디한테는
카드며 선물이 우편으로 왔는데
너는 뭐 하느라
답장도 안 해서
아빠를 삐지게 만들어!"
"아빠가 삐졌어?"
"그럼, 안 삐지겠어?
엄마가 전화한 건
모르는 거니까
내색 말고
아빠에게 전화해."
"응, 리허설 끝나고
문자 보낼게.
알려줘서 고마워.
근데 아빠 너무 귀엽다!"
"귀엽다 두 번만 더 하면
아빠 잡겠다."
순간
욱하고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고
쐐기를 박았다.
"다음부터 이런 일로
엄마가 전화하게 하지 마라.
엄마 실망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무룩하던 남편이
딸 이름이 뜬 화면을 보자마자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괜히
찌그러진다.
“어, 왜?”
잠깐의 침묵 뒤
수화기 너머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 해피 발렌타인!
내가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화했어.
미안해.
내년부터는
꼭 챙길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의 얼굴이 환해진다.
마치
전쟁터에 나갔다가
승전보를 들고 돌아온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이구야...언제 철들래.
아니면
저 사람이 원래 이렇게
단순했던가.
나는 괜히 못 들은 척
주방에서 물을 마셨다.
괜히
아까 내가 먼저 딸에게
전화했던 사실이
들킬 것 같아서.
딸과 통화를 마친 남편의 얼굴은
아까와는 완전히 다르다.
의기양양, 기세등등.
"뭐래?"
"어.... 미안하대.
엄마한테도 해피 발렌타인이라고 전해주래.
내년부터는 잘 챙긴다고 하던데...."
"그래서 당신 좋았겠네."
"뭘 좋아, 좋기는."
속으로 좋아 죽겠으면서
애써 감추는 남편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 자식이
둘이라 다행이다.
한 명이라도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사람이
아들이라 기쁘면서도
괜히 또 서운하다.
나도 한 번쯤
딸 부심으로 살아보고 싶은데.
인생은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아들이라도 있어
참 다행인 하루다.
결국 우리는
아닌 척하면서
같은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다.
딸은 모를 것이다.
부모 둘이서
이렇게 소심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이쯤 되면
희소식 말고
그냥 소식이면 좋겠다.
결국 이번 발렌타인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부부라는 이름의 승부는
이겨도
그렇게 기쁘지 않은
그런 게임인지도 모르겠다.
내년 발렌타인에는
조작 승부 말고
진짜 승부를 가려볼까.
내년 그날을 위해
오늘도
밴댕이는
쌉싸름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전열을 정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