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번 트램을 타다
꽃들이 볼륨을 끝까지 올려놓고 있는 봄날 아침, 나는 생명에 가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도심으로 빨려 들어가야 했습니다, 자유로로 접어들자 차가 더 막혔습니다, 흐르는 강물보다 느렸습니다
느린 것은, 느려야 한다, 느려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내 마음뿐, 느림, 도무지 느림이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자유가 없는 것처럼, 느린 느림은 없었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느린 느림, 이문재
스무 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갔다. 술 몇 번 마셨을 뿐인데 2학년, 동아리를 했을 뿐인데 3학년. 이제 대학생활이 뭔지 알 것 같을 때쯤 토익을 해야 할 때, 인턴이 돼야 할 때, 이력서를 써야 할 때라고들 했다.
물론 그 '때'는 나에게 없었다. 겁이 없고 철이 없고 배짱만 있었다. 만약 그런 '때'라는 게 있다면 아직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말하면 아직도? 가 자동 응답 기능처럼 따라붙으면서, 졸업은 언제? 혹시 재수? 아니면 삼수? 뭐 이런 이야기들을 듣는 나이가 돼버린 요즘,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꼭 그래야 되냐며 자신 있게 뱉었던 말 대신, 내가 너무 늦은 건가.. 라는 말이 맴돌았다.
이력서에 쓸 만한 것은 마땅히 없는 나지만 늘 바쁘게 지냈다. 강의가 시작되기 한 시간 반 전부터 이미 지각임을 알 수 있는 통학생의 삶이란. 열차 시간에 맞춰 뛰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였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꼭 해보고 싶었던, 잊지 않고 지내던 것이 있었다. 유럽여행!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면서 겨우겨우 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놓고 나서야 여행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출발 한 달 전. 여행을 취소해야 되나 고민했고, 출발 일주일 전. 여전히 여행비를 벌고 있던 내가,
리스본에 와 있었다.
커다란 배낭과 내 몸 하나만 빼고, 모든 것이 낯섦의 연속이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 소리부터 회색 빌딩의 풍경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알록달록한 건물들, 그 사이의 구불구불 굴곡진 길을 걸었고 -
그러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트램이었다!
크지도 않은 체구에 사람들은 어찌나 빽빽하게 타 있는지, 좁은 길 사이를 지나가는 모습은 위풍당당해서 웃음이 났다. 트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 밖으로 고개를 쑤욱 내밀고,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트램 쪽으로 카메라를 든 채 서로를 맞이하는 그 모습이 왠지 다정했달까.
그다음부터 나도 트램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다리며 카메라를 들어 올리곤 했다. 타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는데 줄이 늘 길어서, 감히 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매일 지하철, 버스 기다리느라 줄은 질리도록 섰는데 여행 와서도 줄 서기는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걷던 중에 트램 정류장의 짧은 줄을 보았다. 그리고 (그 줄에 서야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없이) 어느새 난 그 줄에 서 있었다. 어디선가 트램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했던 글을 읽은 생각이 나서 가방을 몸 쪽 가까이에 붙인 채로 불안하게, 그러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탄 트램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앉아서 창 밖을 한적하게 내다볼 여유는 없었지만, 트램 기사님(?) 뒤에 서서 가며 거리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샤방샤방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낸다. 으잉? 속도를 낸다 싶어 신나하려 했더니만 그럴 틈도 없이 덜컹!
멈췄다.
정말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그런데 이 갑작스러운 멈춤에 대해 (기사님의 별다른 설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전히 창 밖 풍경을 보고, 함께 온 사람과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게다가 그 좁다란 도로 한복판에서의 작고 퉁퉁한 트램의 멈춤에 대해 뒤따라 오던 차들도 익숙하다는 듯 요리조리 잘 지나만 간다.
시동 꺼진 트램에 다시 시동이 걸릴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트램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함께 기다리는 것 같았다. 창 밖의 풍경을 더 찐하게 눈에 담아봐! 하고 말이다. 그 뒤로 여러 번 트램이 멈출 때에도 기다림은 계속 됐다. 낯설지만 한결같은 그 상황이 반복되면서, 서울에선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이곳 속에 있는 난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느리고 싶어도 도무지 느릴 수 없었던, 스스로를 느리다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어느 역을 걷듯이 늘 빠른 걸음으로 지내왔다. 너무 많이 사용되어버린 나는 발이 몹시 부어있었지만 -
느리게 가도 괜찮아
느려도 돼, 괜찮아. 너는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정해진 속도 없이 멈췄다 가길 반복하는 너의 움직임에 맞춰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아름다웠다. 나는 무언갈 해야 할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조바심, 그걸 잠시 내려놓고
느려지기로 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이곳의 빠름에 홀린 듯 살아가는 것 같을 때면 너를 찾는다. 괜찮을까? 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넌 또 같은 답을 건넨다. 속도를 늦추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니까- 그렇게 난 멈췄다가 갔다가를 반복하며 덜컹거리는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지금도 좁은 길 사이를 지나가고 있을 너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나 낭만이 되어줄 것 같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리스본을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