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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 Apr 01. 2022

부모로 산다는 것은

외고에 진학한 나는 집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부산 촌동네에 있는 학교지만 특목고는 특목고다보니, 아이고 학부모고 여러모로 힘이 많이 드는 곳이었다. 갓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인데 집에서 봇짐을 싸들고 기숙사로 들어왔고, 사감 선생은 휴대폰을 압수하여 하루에 한 번 자기 전에 10분~20분 정도만 쓰게 했다. 부모님이 없는 집, 아직 친한 친구 없는 기숙사, 학구열에 미쳐있는 학교, 후배라면 쥐잡듯이 잡던 선배들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생님과의 개인 면담만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시기였다. 


그러다 3월 말, 진로 콘서트 같은 걸 연다고 했다. 학부모님들을 학교에 초대해서, 반 친구들과 부모님이 있는 앞에서 자신의 꿈을 발표하는 행사였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지만, 여차저차하다 나는 그 진로 콘서트에 초대 가수 역할을 하게 됐었다. 아이들의 꿈 발표가 다 끝나면, 부모님께 감동을 드리는 노래를 부르는 ... 


많은 친구들이랑 머리를 맡대고 리스트를 골라봤는데, 결국 선택한 것은 <엄마로 산다는 것은>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msM_6qlQ4


늦은 밤 선잠에서 깨어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부시시한 얼굴
아들, 밥은 먹었느냐
피곤하니 쉬어야겠다며
짜증 섞인 말투로
방문 휙 닫고 나면
들고 오는 과일 한 접시


엄마도 소녀일 때가
엄마도 나만할 때가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엄마,
엄마로 산다는 것은
아프지 말거라, 그거면 됐다 




이미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아직 확실치도 않은 진로 하나를 정확히 정해서, 부모님께, 그것도 다른 학부모까지 다 있는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서울대니 연세대니 중앙대니 이름도 생소한데 그중 또 어떤 학과를 갈지, 거기 가서 뭐가 될지, 고등학교 갓 입학한 애들이 뭘 그리 오래 고민을 해봤을까. 그래도 참 아이들은 이런 저런 불평은 다 하더니, 막상 부모님들 오시니 손을 벌벌 떨면서 열심히도 발표를 했다. "부모님 어디 앉아 계세요"하면 자랑스럽게 저어기 앉아 계신다면서 ... 생각보다 학부모님도 남의 자식들 꿈까지 한 마디 한 마디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들어 주셨다.


나는 진로 발표보다, 노래를 잘 마치는 게 중요했는데 배짱인지 긴장이 전혀 안 되었다. 시작할게요, 하고 MR이 들리자 준비한 대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불렀다. 그런데 후렴을 시작하자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엄마도 소녀일 때가"를 뱉을 땐 몇몇 아이들이 울고 있었고, "아프지 말거라, 그거면 됐다"로 곡을 마치니 아이들과 어머님들까지 거의 모두가 울고 있었다. 너무들 울어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부모님께 가서 안기고, 나는 바람을 쐬러 혼자 밖에 나가 벤치에 앉았다. 저 앞에는 밤바다와 반짝이는 공장 불빛들이 보이고, 운동장은 부모님들 차로 가득하고... 그러다 갑자기 울컥, 어인 일인지 탈없던 하늘에서도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나도 한바탕 울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지나가던 학부모님이 선물로 사왔는데 하나 쓰라며 휴지도 내어주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 부모님은 그 날 두 분 다 오시지 않았다. 우리 딸 꿈이 무엇인지, 듣고 싶으셨겠지만 넘치는 사랑에 비해 넘치지 않는 돈과 시간 때문에. 엄마도 소녀일 때가, 아빠도 나만할 때가 있었을 텐데. 엄마도 엄마의 꿈이, 아빠도 아빠의 꿈이 있었을 텐데. 엄마 아빠도 오늘 여기에 와서 딸의 꿈이 듣고 싶었을 텐데. 오셨다면 기특하다며 안아 주셨을 텐데.




오늘도 어김없이 5시쯤 되니 걸려 온 아빠의 전화. 아무래도 내가 과를 잘못 선택한 것 같아 아빠, 세상이 원하는 걸 내가 안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이라도 수학이든 과학이든 그런 걸 배워야 할까봐. 글쓰고 싶어서 국문과 왔는데 글로는 먹고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러자 아빠는 괜찮단다. 조급해 하지 말란다. 엄마도 아빠도 건강하고 살아 있으니 그래도 행복한 거 아니냐고. 너도 건강하고 오빠도 건강한데 건강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아빠는 그래도 너희가 안 아프니 그걸로 됐다고. 아빠가 보고 싶으면 말하라고, 그럼 내일이라도 서울 올라 가겠다며 허허 웃으신다.



"아프지 말거라. 그거면 됐다" 하는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저 노래 쓴 사람의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은 아닌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이랑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이 노래를 찾아 들으니, 나도 이젠 그때 아이들이 왜 그렇게도 울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우는 것을 보며, 부모님은 또 왜 그렇게도 우셨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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