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의 질문들.

드레스덴 1945: 전쟁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by 박준하

제2차 세계대전 중, 하늘은 전쟁 핵심 무대가 되었고, 비행기는 가장 강력한 전투 도구로 부상했다. 폭격기와 전투기, 수송기는 도시를 파괴하고, 병력을 수송하며, 영공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공중전략의 중심에는 영국 왕립공군(RAF) 폭격기사령부가 있었다.


이들은 독일의 산업 도시들을 겨냥해 대규모 공습 작전을 수행했고, 때로는 1,000대가 넘는 항공기를 동원해 공장, 철도, 기반 시설은 물론, 노동자들의 주거지까지 폭격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는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고 민간인의 사기를 꺾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지역 폭격(area bombing)’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 항공 기술로는 정밀 폭격이 어려웠고, 기상 악화나 구름으로 목표물이 자주 가려졌기 때문에 도시 전체를 타격하는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이는 전술이 아닌 심리전이자, 민간인을 포함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면전이었다.


전략의 핵심 인물은 RAF 폭격기사령부의 총사령관, 아서 해리스 경이었다. 그는 1942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면 공습 전략'을 구사하며, 함부르크, 베를린, 쾰른 등 주요 도시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그의 작전은 도시 전체를 무력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 결과 그는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라는 별칭을 얻는다.


해리스는 자신의 전략에 대해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치는 다른 모든 사람을 폭격하고 자신들은 누구에게도 폭격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유치한 착각으로 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로테르담, 런던, 바르샤바 및 기타 50개 장소에서 그들은 그 순진한 이론을 적용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이제 그들은 광풍을 거둘 것입니다.”


그는 독일 도시를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것이 전쟁을 조기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신념은 영국군 수뇌부의 우려와 정치권의 반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전선이 종막을 향해가던 1945년, 그의 전략은 점점 더 많은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1945년 2월 13~15일,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드레스덴 시청에서 바라본 광경. [사진 출처: Walter Hahn, AFP]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그의 전략은 유럽전선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작전이 거행되었다. ‘엘베강의 피렌체’라 불리던 드레스덴이 단 3일 만에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약 1200대의 영국 및 미군 폭격기가 3,400여 톤에 달하는 고폭탄과 소이탄을 퍼부었고, 수십만 명이 거주하던 도시는 거대한 화마로 뒤덮였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도심은 거대한 화염폭풍에 휩싸였고, 산소는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숨조차 쉴 수 없어서 시민들은 질식하거나 불에 타 목숨을 잃었다. 반경 15 제곱마일 내 수천 개의 건물이 사라졌으며, 전기와 수도는 끊겼고, 도시 전체가 재와 탄 냄새로 후각을 채웠다. 한때 유럽 최고의 문화유산을 자랑하던 드레스덴의 건축물은 붕괴한 채 먼지 속에 묻혔다.


불타는 잔해 사이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은 그날의 지옥을 이렇게 증언한다. 마거렛 프레예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 왼쪽에서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 여자를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앞으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팔에다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기였다. 그녀는 달리다가 넘어졌고, 그 아이는 그대로 아치 문 안의 불속으로 날아갔다. 갑자기 나는 내 오른쪽에서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겁에 질렸고 손짓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며, 그다음, 나는 공포를 느끼고 경악했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순서대로 하나씩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드레스덴의 파괴는 곧바로 나치 독일의 선전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희생자 수를 20만 명으로 과장했고, 이를 통해 연합군의 도덕성을 공격하고자 했다.


또한 연합군 내부에서도 이 도시가 과연 전략적 가치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당시 드레스덴은 유럽 문화와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에는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든 도시였다.


심지어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조차 폭격 직후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그는 내부 비망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단지 공포를 증대시키기 위한 독일 도시 폭격은 이제 재검토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드레스덴의 파괴는 연합군 폭격의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해 아서 해리스는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그를 히틀러에 맞서 싸운 영웅이자, 공군 장병들의 헌신을 이끌어낸 지도자로 본다. 반면, 수많은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냉혹한 전략가, 혹은 전쟁 범죄자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만 그가 승전국의 편에 있었기에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해리스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인간성과 도덕, 전쟁과 정의에 대한 복잡한 질문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비인류적인 수단이다. 과학기술의 진보조차 더욱 정밀하고 치명적인 파괴의 도구로 변질되며, 전쟁은 치밀하고 기괴할 만큼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영국 왕립공군 폭격기사령부 총사령관 아서 해리스 원수가 작전 계획을 두고 고위 참모들과 논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Imperial War Museums]

1945년 드레스덴의 비극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전쟁의 이름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선은 어디까지인가?


현대의 전쟁 양상은 여전히 이러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폭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구역 미사일 포격 등은 ‘문명’이라 불리는 사회가 넘지 말아야 할 가장 마지막 선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이들 역시 민간인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외면하고 있다.


역사가 프레더릭 테일러는 말했다.


“드레스덴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한다는 이름 아래 어디까지가 허용 가능한지에 대해 끝없이 씨름하게 된다.”


전쟁은 항상 윤리와 효율 사이의 충돌을 낳는다. 드레스덴은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기억은 여전히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2010년, 독일 역사학자 위원회는 6년간의 조사 끝에 사망자를 약 2만 5천 명으로 공식 발표했지만, 극우 진영은 여전히 이 수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폭탄 홀로코스트(Bombenholocaust)’라는 용어를 만들어, 나치 독일이 유럽의 민간인을 상대로 한 비열하고 천박한 만행과 연합군의 공습을 도덕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묘사하려 한다.


그러나 2025년 2월 13일, 드레스덴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 80주년을 맞아 중요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해당 성명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불행하게도, 드레스덴의 파괴는 전쟁 속 고립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도시는 ‘무고한 희생자’도, ‘피해자’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성명은 나치 독일에 의해 파괴된 영국의 코번트리와 러시아의 레닌그라드를 상기시키며, 드레스덴의 과거를 단순한 피해자로만 서술하지 않는다. 이는 독일 시민들에게도 역사 전체를 직시하라는 요청이며,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윤리적 태도이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 같다. 드레스덴의 잿더미 위에서, 인간의 도덕성과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우리 곁에 불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반란의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