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태와 하나회 숙청에 대해
1979년 12월 13일 아침.
광화문 중앙청 앞에는 유난히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출근을 서두르던 시민들의 발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귀에 스치는 소리는 전혀 달랐다.
탱크가 도로를 긁는 ‘드르륵’ 소리. 무장한 군인들이 가득 탄 군용 트럭들이 시내 곳곳을 누비는 소리.
도시는 말없이 선언하고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하나회가 이미 국방부와 중앙청을 장악했고, 언론은 순식간에 검열의 벽 뒤로 사라졌다는 것을.
야당, 대학생,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저항했지만, 신군부는 더 단단하고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응답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바로 다음 날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 열흘 동안 167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현대사의 가장 짙은 어둠이 그렇게 드리웠다.
46년 전, 그 한밤중의 군사반란은 나라의 질서, 일상의 규칙, 민주주의의 근본을 단숨에 흔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 위에서 전두환은 군복을 벗고, 1980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한 후 한 달 뒤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결말이 정해진, 민주주의의 외형만 남은 선거였다.
12.12는 한 줄의 ‘쿠데타’로 요약될 수 없다.
그날은 한 사회의 질서와 상식,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순간이며, 그 흔들림을 되돌리기 위해 얼마나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일깨워주는 시간표이기도 한 것 같다.
1993년 봄, 대한민국은 마침내 오래된 군부 권력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9선 국회의원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던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그는 가장 먼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택했다.
그 핵심은 군 내부에 깊숙이 뿌리내린 사조직 하나회의 해체였다. 겉으로는 친목 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군 핵심 요직을 독식하며 폐쇄적 권력 구조를 만든 실세였다. 그리고 바로 그 조직이 12.12를 가능하게 한, 한국 현대사의 균열과도 맞닿아 있었다.
김 대통령은 그 균열을 정면으로 보았다.
취임 11일째 되던 1993년 3월 8일 오전 7시 30분, 그는 국방부 장관 권영해를 청와대로 불렀다. 오찬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담담하게 말했다.
“권 장관, 내가 오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려고 합니다. 누가 후임으로 적임자인지 한번 말해보시오."
그 말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군부 기득권을 흔드는 시작이었다.
권영해 장관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쑥국만 두어 숟가락 뜬 채 군의 인사 기록 검토에 착수했다.
그날 오후,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이 전격 해임됐고, 비(非)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12.12의 뿌리를 이루던 하나회 수뇌부에 최초의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김영삼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와 권 장관 두 사람만의 극비 작업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다음날, 비서관들이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회의 자리에서 김영삼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니들도 많이 놀랐제?”
그 뒤로 한 달 동안 수도방위사령관, 특전사령관, 각군 사령관, 수도권 사단장까지 군 주요 보직이 연이어 교체됐다. 하나회가 움켜쥔 권력의 혈맥이 빠르게 잘려나갔다.
또, 1993년 4월 2일. 용산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촌에 하나회 명단이 담긴 전단 142장이 대량 살포되었다.
육사 20기부터 36기까지, 군 조직의 중추를 이루던 장교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대령이 “단독 행동이었다”며 자수했고, 군은 명단을 조사했다. 142명 중 105명이 실제 하나회 회원이었다. 그들에게는 5년간의 승진과 보직 제한이 내려졌다. 장성은 물론, 영관급 장교까지 하나회라는 이름으로는 더 이상 군에 발붙일 수 없게 됐다.
같은 해 5월 24일에는 고위 장성들을 전격 예편시키는 일명 ‘5.24 숙군’이 단행됐다. 하나회 소속 3성 장군 전원과 일부 소장이 군복을 벗었다. 취임 석 달 만에 떨어져 나간 별만 무려 40개, 전역한 장군은 18명.
30년 넘게 이어진 군사정치의 문화를 해체하고, 군을 국민의 군대로 되돌리는 역사적 전환이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전격적인 인사 발표가 떨어지자 청와대에서는 새로 임명된 장군들을 맞을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보직·진급 신고를 받고 계급장을 달아주는 절차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그 ‘별’이었다.
신고식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계급장이 도착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확인해 보니, 아예 제작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장군 계급장은 청와대나 정부조달이 아니라, 외곽의 작은 공방에서 백금으로 수작업해 만들었다. 군도, 청와대도, 그날 갑작스럽게 단행될 인사를 예상하지 못했다. 정기 인사 때나 필요할 것이라 여겨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김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 국방장관이나 국방부 간부들이 쓰는 별이 있을 테니, 그 계급장을 빨리 빌려오라.”
급히 뛰어간 수행 인사들은 장관과 간부들이 달고 있던 ‘별’을 받아 왔고, 그 임시 계급장은 그대로 신고식에서 새 장군들의 어깨에 달렸다. 이후 새 계급장이 만들어지자, 빌렸던 이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역사의 큰 장면은 늘 화려하거나 완벽한 준비로 완성되지 않는다. 종종 이렇게 허겁지겁 빌려온 별 하나에 의해, 혹은 예상치 못한 작은 공방의 공백에 의해, 그 순간의 이야기들이 빚어진다.
1995년 12월, 국회는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에 관한 특별법’과 ‘5·18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12·12와 5·18의 책임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법적 장치였다. 그 결과, 전두환과 노태우는 재판정에 섰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원칙이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늘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내란과 살인, 뇌물 등의 혐의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 형을 받은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7년 12월, 김영삼 정부 시절 “국민 대화합”이라는 이름 아래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후의 시간은 질문을 남겼다. 5.18 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그리고 안기부로 인해 수많은 고문 탄압 흔적에도 전두환은 일 평생 반성 없이 살았다. 노년에는 법정 출석을 거부했고, 병을 이유로 재판에 나오지 않으면서도 골프를 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끝내 외면한 채였다.
노태우는 2021년 10월, 전두환은 같은 해 11월 생을 마감했다. 반성도, 참회도 없는 결말이었다. 12.12 군사반란에서 두 사람의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기는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미완의 역사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과연 12.12의 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반란, 살인, 내란을 저지른 자들에게 내린 특별사면은 정당했는가. 반성은 있었는가. 용서는, 정말로 가능한가.
그럼에도 역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묻는 질문과,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역사를 계속 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