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란.

러우전쟁의 민간피해에 대해

by 박준하

2022년 2월 24일, 파주에서 군 복무 중이던 나는 생활관 동기들과 함께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러시아군 탱크가 우크라이나 국경 검문소를 밀고 들어가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특수군사작전’을 명령한 직후였다.


스무 살 언저리의 동기들이 떠들던 농담은 서서히 사라졌다. 우리는 말없이 화면만 응시했다. 키이우에서 폭격을 피해 몸을 숙이는 BBC 기자, 대피소로 몰려가는 시민과 아이들. 앵커의 차분한 목소리와 대비된 그 장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합동작전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현장에 있는 그들의 공포를 온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떨림만큼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파주의 한 군부대까지 분명히 전해졌다.


군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 언론사에 입사해서 국방 담당 기자가 되었다. 매일 전쟁 소식을 확인하며 현대전의 흐름을 익히고, 드론과 정보전이 불러오는 변화들을 공부했다. 동시에 한반도의 군사 상황을 취재하며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이어졌다.


전쟁의 인간적 면모는 종종 잊힌다. 미사일의 궤적과 전선 지도, 사상자 숫자에 가려지기 쉽다. 그러나 러시아의 미사일과 드론은 아무 예고도 없이 민간 지역으로 파고들어 집과 삶을 갈라놓는다. 주민들은 전날 인사했던 이웃의 시신을 지나쳐 다시 집으로 향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역시 글보다 영상과 사진이 압도하는 시대다. 우크라이나의 고통은 어느새 몇 초 만에 스쳐 지나가는 짧은 영상과 사진이 됐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 시민들의 휴대전화 화면 속 전쟁은, 출퇴근길 뉴스 스크롤의 한 조각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러다 입사 1년쯤 되던 해, 다큐멘터리〈마리우폴에서의 20일〉을 보았다. 그때 나는 전쟁을 다시, 제대로 마주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전쟁 첫날부터 봉쇄된 마리우폴을 AP통신 우크라이나 취재팀이 20일 동안 기록한 작품이었다. 글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폐허와 붕괴, 인간의 울부짖음이 화면 가득 담겨 있었다.


첫 장면을 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무거움이, 어딘가 부끄러운 듯한 불편함이 마음속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영화는 단 하나의 진실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멀리 있는 듯 보여도 전쟁은 모든 생명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잔인하다는 것. 그것은 미래의 전쟁을 대비하라는 외침이 아니라, 전쟁이 가장 먼저 파괴하는 것이 바로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러시아의 폭격으로 두 살도 되지 않은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부모, 방공호에서 밤을 지새우며 나라의 내일을 걱정하는 아이들, 두려움 속에서도 약탈에 나선 이들에게 조용히 단호함을 보이는 군인. 전쟁이 어떻게 일상을 짓밟고, 인간 안의 빛을 서서히 녹여내는지 그 모든 과정이 숨김없이 펼쳐졌다.


세상의 윤리를 가장 깊게 흔드는 힘은, 어쩌면 공감의 부재다. 공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갈등이 자라고, 그 무감각은 때로 수천만 명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무모함으로 이어진다.


ELZGTORXMROGBK3WFJ7REK3WZA.jpg 2022년 4월 2일, 우크라이나 르비우 리차키브 묘지. 전사한 우크라이나군 장교의 장례식에서 한 여성이 국기를 받기 직전 통곡하고 있다. 사진 출처: 로이터


운 좋게도, 다니는 언론사 덕분에 나는 우크라이나 대표단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를 가졌다. 2022년부터 시작된 전쟁의 피폐함과 분노, 그리고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간절함이 담긴 시간이었다.


참전 중인 북한군의 작전능력 향상에 대한 브리핑을 마친 후, 자국 전쟁포로를 직접 다루고 그들이 러시아군에게 잡혔던 경험을 정리했던 한 우크라이나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송환된 포로 중 한 명은 다리가 기괴하게 시커멓게 변해 있었습니다. 걷기는커녕 제대로 앉는 것도 불가능했죠. 러시아군이 그 다리만 반복적으로 공격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는 오히려 나은 케이스였습니다.”


한 여성 대표는 전쟁 이후 지속된 우크라이나 아동 납치 문제를 한국이 주목해 주길 부탁했다.


예일대 인도주의연구소(HRL) 통계에 따르면, 2025년 6월 기준 약 3만 5천 명의 아동이 여전히 실종 상태이며, 러시아 본토나 점령지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가 사망했거나 가족이 있음에도 강제로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HRL의 나다니엘 레이먼드 소장은 말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벌어진 아동 납치 사건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나치가 폴란드 아동을 ‘독일화’했던 사건에 비견될 만합니다.”


구조된 아동들은 군사훈련을 받거나, 우크라이나어를 쓴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고 증언했다. 수용소, 고아원, 위탁가정 등으로 흩어져 간 그들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아픈 역사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납치와 강제이동의 참상은, 사실 한국도 겪었던 일이다. ‘먼 나라의 일’이라 치부하기 어렵다.


6·25 전쟁 당시 ‘납북자’라 불린 사람들은 북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이들이다. 전쟁 초기 1950년 7월에서 9월 사이에만 8만 5,659명, 전체적으로는 9만 6천여 명이 북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결코 먼 나라의 비극만은 아니다.


납북자의 대부분은 농업인이었다. 전체의 60.8%. 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했던 북한이 한국보다 곡창지대가 적었기 때문에, 주요 농업 인력을 집중적으로 납치한 것으로 해석된다. 판·검사 90명, 변호사 100명, 경찰 1,613명, 교수 863명, 의사·약사 526명 등 사회 기반을 떠받치는 이들도 포함됐다. 국회의원만 해도 63명이 납치되었다. 당시 국회의 총 의석이 210석이었으니, 의원 10명 중 3명이 전쟁 속에서 사라진 셈이다.


납북자의 84.6%, 약 8만 1,240명은 1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의 남성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핵심 노동력이었던 연령대다. 여전히 그들의 정확한 생사는 우리에겐 의문으로 남아있다.


전쟁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전쟁 속 사람들의 감정과 절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이다.


러우전쟁의 3년 10개월, 대한민국의 75년.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인간의 고통은 언제나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바꿀 수 있는 거창한 힘은 없어도, 계속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상처가 잊히지 않도록, 그리고 공감이라는 가느다란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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