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광복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심훈, 그날이 오면 中]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전율이 밀려든다. 1930년, 광복을 맞기 15년 전 쓰인 이 시에는 격정과 비장함이 뜨겁게 서려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인이었으며, 동시에 독립운동가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심훈은 1936년, 불과 서른두 해의 짧은 생을 병마에 빼앗겼다.
그가 노래한 “그날”은 8월 15일이 아닌, 하루 뒤 8월 16일에서야 현실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광복절은 일왕의 항복 방송이 울려 퍼진 날이다. 정오 무렵,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한반도 전역에 흘렀지만, 그의 어투는 모호했다. ‘항복’이라는 단어는 없었고, 그저 연합국의 공동선언을 받아들인다는 말뿐이었다.
1910년 8월 29일,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이후 35년 동안 이어진 철권통치는 황국신민화 정책과 민족 말살 통치로 일본은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문화를 송두리째 빼앗으려 했고, 전쟁이 격화되자 소년과 소녀들마저 강제 징병과 징용으로 끌고 갔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참혹한 성범죄는 인류의 양심을 짓밟았다.
그리고 1945년, 항복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한국인들은 뜻밖에도 고요했다. 전쟁 중 철저히 차단된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일본의 패전 소식을 쉽게 믿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은 사전에 변화의 기류를 감지하며 곧 다가올 광복을 준비했다.
8월 15일 오전,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부름을 받아 정무총감 엔도와 마주 앉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을 지냈고,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운동가로 손꼽히던 그는 협상을 통해 일본인의 생명과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대신,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각 석방, 총독부가 통제하던 식량과 생필품의 방출, 그리고 정치 활동의 자유를 요구했다. 엔도는 이를 모두 수락했다.
그날 오후, 여운형은 행정권과 치안권을 넘겨받아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곧 서대문형무소의 문이 열릴 준비가 시작되었다.
다음 날인 8월 16일 오전 11시, 한반도 전역에 번져 있던 긴장과 설렘은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전날 밤부터 퍼진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석방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가슴을 달궜고, 그 여운은 아침까지 이어진 셈이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군중 속에는 밤새 뜬눈으로 기다리며 가족과 동지의 귀환을 애타게 바라던 이들의 간절한 숨결이 서려 있었다.
조금 후, 독립을 위해 청춘과 삶을 바쳤던 이들이 하나둘 철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와 박수는 곧 감격의 눈물과 뒤섞였다. 오랜 세월의 고난을 온몸으로 견뎌낸 그들의 참혹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울렸다. 고문으로 불구가 된 아들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오는 노인을 알아보고 울다 웃는 가족과 동지들.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재회의 순간들이 오전을 진한 울림으로 채웠다.
이 석방을 시작으로, 전국 28개 형무소에서 약 2만여 명에 달하는 정치범·사상범·경제범이 일제의 감옥에서 풀려났다. 35년간의 웅크린 통치와 불안은 서서히 씻겨 나가, 마침내 자유의 신선함이 스며들었다.
숨통이 트인 서대문의 인파 속 해방의 소식은 심훈의 시구처럼 종로를 지나 서울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도시는 순식간에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모했다.
사람들은 발밑의 진동에 몸을 맡기며 직접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었고, 어떤 이는 일장기 위에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를 덧칠하며 함성을 터뜨렸다. 고요하던 8월 15일과는 달리, 8월 16일의 서울은 흥분과 환희가 뒤섞인 함성으로 끓어올랐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남녀노소의 목소리는 시내 곳곳에 울려퍼졌다.
전후는 1945년 책 “혁명의 길, 좌익인의 양심”에서 그날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들을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뛰어오르고, 뛰어내리고 수많은 문이 열렸다 닫히고 또 닫히고, 책상은 갖다 밀어붙이고 의자가 부서지고 뒤바뀌고 했다.”
당시 서울 주재 소련 영사 샤브신의 부인 피냐 샤브시나도 이렇게 회상했다.
“환희에 찬 거대한 인파가 도시를 뒤덮었다. 끝없이 펼쳐진 흰 바다가 흔들리듯, 사람의 물결이 출렁였다.”
한편, 서울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거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으며, 헌병과 경찰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건국준비위원회는 곧 치안 유지와 질서 확립, 그리고 정권 수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8월 말, 전국 145개 시·군에 지부가 설치되자, 각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서울 계동의 본부로 이어졌다.
광복 직후 언론은, 계동에 자리한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이 새벽부터 각계 저명인사들의 왕래로 붐볐다고 전했다. 이웃 부인들은 정성껏 쑨 죽을 들고 찾아왔고, 청년들은 기금을 내며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에 힘을 보탰다. 사무실은 많은 이들의 기대와 염원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
한반도의 광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불인정과 내부 계파 갈등은 건국준비위원회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에 나섰던 여운형도 끝내 1947년 암살당하며, 또 한 명의 정치적 거두가 혼란과 갈등의 시대를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떠나갔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오늘, 대한민국에 오고, 떠나고, 남아 흔적을 남긴 이들의 80년은 눈부셨다. 어둡고 불안한 밤을 견디고, 환희의 광장을 경험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하루들을 살아냈다.
그중에는 시대의 아픔을 당당히 증언하며 살아온 분들도 있었다. 잠시 잊힌 듯했던 그분들의 이름이, 얼마 전 다시 뉴스에 올라왔다.
올해 2월 1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가수가 꿈이었던 할머니는 생전에 음반을 발매하며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뤘고,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는다면 그 돈을 세계 전쟁 피해 여성들을 돕는 데 쓰겠다”는 뜻을 밝혔다. 할머니는 일본군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을 때의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이어 5월 12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14살에 끌려가 상상조차 어려운 고통을 견뎠던 할머니의 별세로, 현재 대한민국에 남은 생존자 할머니는 불과 6명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그들의 고통에 대해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
일제 강제 징용 피해 생존자들 역시 올해 2월 기준 640명으로 줄었다. 그들 또한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다.
80년 전, 광복의 함성은 모든 이의 가슴에 불을 지핀 듯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빛이 끝내 닿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그들의 광복은 과연 눈부셨을까, 문득 스스로 묻게 된다.
오늘 8월 15일(금) 저녁 8시, 서울의 노을은 서서히 검푸른 밤하늘의 색으로 스며들었다.
이 땅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들, 해방의 숨결을 처음 들이마신 이들, 고통과 고초를 온몸으로 견뎌낸 이들, 그리고 여전히 그 상처와 모욕에 대해 사죄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작은 촛불 하나를 밝히며 조용한 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