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먹던 맛이 아니지만 괜찮다.
어느 날 외국인이 되어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그 나라에서 의식주 고루 적응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중에서도 '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와 남편은 음식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언젠가 내 남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돈 쓰는 일 중 마트 가서 돈 쓰는 게 가장 보람 있고 좋더라.
한국과 판이하게 다른 식재료와 음식을 논하기에는 한 편의 글로 부족하다. 여러 번에 나눠서 이야기해야겠다. 그중에서도 한국을 가장 자주 떠올리게 하는 건 사과와 삼겹살이었다.
사과는 많은데 '한국 맛'이 없었다
세상 대부분의 아가들이 알파벳 a를 배울 때, 그림과 발음 연습에 가장 흔하게 쓰는 단어가 apple 아닐까?
사과를 팔지 않는 나라도 있을까?
이곳 마트에서도 사과 품종이 정말 다양하다.
동그란 모양은 같은데 형형색색 조금씩 얼굴이 다른 사과마다 각기 다른 품종 이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하나씩 다 시도해봤다.
아니, 그렇게 수많은 종류 중에서도
아사삭, 청량감 가득하면서도 적당히 새콤달콤한, 한국 어느 날 아침에 먹던 그 사과가 없었다!
나란 사람, 나름 사과를 두루 즐겨먹고 품종이나 맛을 굳이 따져가며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어떤 사과는 마치 과즙을 누가 사전에 미리 다 빼내서 과육만 남아 씹으니 아무 느낌 없이 바스러지는 듯한 맛이었다.
그래서 꽤 오랜 기간 사과를 먹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바나나, 키위, 오렌지 등 다른 과일에 손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해외 식재료와 그곳 출신 교민들을 위한 음식을 파는 작은 슈퍼가 생겼다. 호기심에 가봤는데, 한쪽 구석에 이 나라 마트에서 보지 못했던 품종의 사과가 있었다.
남편이 사 온 사과를 보면서, 사실 별 생각하지 않고 오랜만에 사과 영양분이나 섭취하자며 경건한 마음으로 한입 먹었다.
그런데 유레카,
한국 맛 사과를 발견했다!
너무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사과를 한입 베어 먹었던 그 순간이 운명 같았다는 철학적인 말을 갖다 붙이고 싶다.
이제 우리는 그 작은 슈퍼에 '한국 맛' 사과를 사러 간다.
삼겹살이 있긴 하니까.
이곳 마트에서도 삼겹살을 판다. 한국식으로 불판에 지글지글 구워서 마늘 하나, 쌈장 한 스푼 얹어 쌈으로 싸 먹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돼지고기 코너에 늘 포장되어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삼겹살이 있다.
마치 세계 어딜 가도 있는듯한 맥도널드 빅맥버거로 각국의 물가를 가늠해본다 하여 빅맥지수(Big Mac Index)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삼겹살 100g당 가격이 한국과 네덜란드 물가를 비교하는 척도가 되었다.
이곳은 100g당 한화 1500원 정도 수준이고, 5년 넘게 지켜보자니 가격 변동이 크지 않다.
마트에 갈 때마다 삼겹살을 보면서 한국은 일반 대형마트에서 얼마였더라? 요즘은 얼마 할까? 하며
자연스레 내 의식의 흐름이 한국으로 향하곤 한다.
그러면 가격 말고는 무엇이 달라서, 우리가 한국 삼겹살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실, 그리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긴 하다.
이곳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삼겹살은 마치 한 사이즈만 출시된 티셔츠 같다.
천편일률적으로 얇은 두께로 재단하듯 잘려서 포장된 삼겹살이다.
그 두께가 애매해서 제육볶음 하기엔 두껍고, 구워 먹기엔 너무 얇아 식감이 도통 살지 않는다.
게다가 이곳 마트에는 삼겹살 이외에도 다른 돼지고기 부위들이 제법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지만,
그 다양함의 스펙트럼이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한국만큼 고기를 손질해서 내놓은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
얇은 불고기용, 깍둑 썰기한 목살, 항정살, 갈매기살, 가브리살, 오겹살 등등,
한국은 돼지고기 스펙트럼이 그 얼마나 화려한가!
이곳은 삼겹살, 목살, 앞/뒷다리살, 햄버거 패티 정도 있다.
대신 2차 가공한 소시지, 슬라이스 햄 종류가 어마어마한데, 육류 코너 긴 매대 한쪽을 다 차지할 정도다.
식빵 한 장 위에 올려 먹거나 바삭한 빵 사이에 끼워 넣어 먹는 식문화를 고려하면 자연스럽다.
족히 수십 가지는 넘는 듯한 슬라이스 햄,
카트를 끌고 지나가다 보면 가끔은 문득 한번 '아,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난 외국인이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제는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나름 익숙한 광경이기에 별 생각이 지나칠 때도 많지만 말이다.
마트에서 육류 코너를 지나가다가 그런 생각이 든다고? 라며 혹자는 웃을지 모르겠지만,
진실하게 말하건대 그런 생각이 든다.
2% 부족한 맛?
이 나라에서 끓이고 볶아먹을 삼겹살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는 음식에 진심인 부부이지만, 엄격한 한식 파는 아닌 듯하다. 양식, 중식, 빵 등 다양한 종류를 요리해서 먹다 보니 쌀밥 없이도 1주일이 흐르곤 한다.
그런 우리도, 가끔은 한국의 삼겹살이 그립다.
육류코너 직원분께 부탁하면 두툼하게 썰어주시는 그 삼겹살 말이다.
제육볶음에서 2% 부족한 맛이 나는 건, 나의 요리 실력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삼겹살이어서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