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100일을 여행할 수 있다면 1년마다 한 달씩 여행하겠는가? - 3년을 쉬지 않고 일한 후 100일을 한꺼번에 여행하겠는가?
<질문의 여행> 중에서.
내가 만으로 33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이 있다.
3년 동안, 33만 원짜리 중저가 백(bag)을 일 년마다 한 번씩 사주면
연애를 지속할 수 있지만,
3년 동안, 아무거도 안 사주다가 100만 원짜리 명품 백(bag)을 한 번 사주면
결혼할 수 있다.
혹시 내가 살아생전에 못 가면,
아들에게라고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비밀 여행지 3곳.
1. 평안북도 북서단에 위치한 '의주군'
[역사의 숨소리를 고이 간직한 곳]
동쪽으로는 삭주군·구성군, 남쪽으로는 용천군·철산군·선천군, 북서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만주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경 124°20′∼ 125°02′, 북위 39°55′∼ 40°28′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1,677㎢이다. 1개 읍 12개 면 140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의주읍 향교동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조선시대 사신과 상인들이 중국을 오고 가던 '의주길'은 역사의 숨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지금은 자유로와 통일로(국도 1호선)가 의주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의주길은 도성과 지방을 잇는 6간대로 중 제1대로로 가장 중요한 도로였다. 조선시대 사신은 한양 도성의 서쪽 문인 돈의문(敦義門·서대문)을 나와 홍제원∼구파발∼벽제관지∼혜음령∼분수원∼파주향교∼화석정∼임진나루∼동파나루∼개성∼의주를 거쳐 중국을 오고 갔다.
과거에는 신의주시까지 포함하였던 지방이다. 전통적으로 의주읍은 중국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해 왔으나,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의선이 놓이게 되면서 신의주-단둥 간 교통로가 발달하며 관문 역할은 신의주에게 내주고 오히려 신의주의 위성도시 역할로 변모했다. 조선 후기 리즈시절이던 의주의 인구는 30만 명을 넘겼다. 그것도 30만 명을 갓 넘긴 정도가 아니라 40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조선 후기 당시 의주는 한성과 동래, 평양 다음의 인구였다. 개성특급시, 대구광역시, 수원, 청진보다 의주 인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서울특별시의 의주로(통일로)는 이곳의 이름을 딴 길이다.
[출처] 나무위키
의주군은 우리나라의 북방 관문에 자리해 일찍부터 신문명을 받아들였고, 진취적 기상이 강해 애국자·선각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온상지이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천주교가 대륙으로부터 수용되는 통로로서 많은 신자가 나왔으며, 개신교 역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응찬(李應贊)이 전교 활동을 했고, 1894년에 최초의 순교자 백홍준(白鴻俊)이 나오기도 하였다. 근대교육기관도 다른 지역보다 많았는데 양실학교(養實學校)가 대표적이다. 을미사변 이후 조상학(趙尙學)·조병준(趙秉俊) 등이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며, 1910년의 105인 사건에 관련된 의주인으로는 김창건(金昌健)·백용석(白用錫)·백일진(白日鎭)·안광호(安光浩) 등이 있다. 3·1운동 첫날인 3월 1일에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곳 출신 유여대(劉如大)를 중심으로 양실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간 이후, 5월까지 각계각층이 참여한 치열한 시위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곳은 예로부터 중국으로 가는 관문역할, 신문명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의 온상지로써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왜군이 쳐들어오는 와중에 나라와 백성들까지 버리면서까지 혼자 살아보겠다고 이곳, 의주까지 도망쳤다. 대낮에 쌩얼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빗줄기가 드센 1592년 음력 4월 그믐날 밤 궁을 빠져나갔다. 의주로 가는 도중 임진강을 건널 땐 , 백성들의 집 문짝들을 다 뜯어와 혼자 살겠다가 뗏목을 만들어 건넌다. 다 건넌 뒤엔 나룻배와 뗏목을 전부 태워버렸다. 그리고 '행여 왜군이 뗏목을 끌어다 쓰면 어쩌나 싶어서 불태웠다'는 개소리도 잊지 않았다.
한 나라의 왕이 백성 집 문짝태우고 나라까지 버리고 선택한 여행지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2.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1번지'
[제국의 중심 공간과 외국인들의 공간이 공존하는 곳]
정동(貞洞)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에 속하는 법정동으로 덕수궁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동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관할하는 행정동은 소공동이다. 정동의 범위를 살펴보자면 현재의 정동길의 서쪽 일대를 '대정동'이라 하였고 동쪽 일대를 '소정동'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정동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일부를 포함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지역까지 아우르는 지역이며, 소정동은 지금의 덕수궁을 포함하여 대한문 앞(서울시청광장 일대)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19세기 말부터 각국 공사관들이 정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순우의 책에는 과거 정동에 있었거나,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공사관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미국공사관(1883년 5월 개설, 정동 10번지), 영국 공사관(1884년 4월 개설, 정동 4번지), 독일 영사관(1891년 후반, 서소문동 38번지 이전), 러시아공사관(1885년 10월 개설, 정동 15-1번지), 프랑스 공사관(1889년 10월 정동 28번지 이전), 벨기에 영사관(1901년 10월 개설, 정동 16-1번지), 이탈리아 공사관(1902년 11월 이전), 외교관 구락부(1894년 정초식(定礎式), 정동 17번지) 등이 있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육영공원을 거쳐 독일 영사관이 있던 자리이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 프랑스 공사관의 자리엔 오늘날 창덕여중(昌德女中)가 위치해있다. 과거 벨기에 영사관 자리(정동16-1번지)는 해방 이후 하남호텔을 거쳐 오늘날 캐나다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외교관구락부는 1892년 결성되어 프랑스공사관 인접가옥에서 회합을 갖다가, 1894년 정동 17번지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후 1923년에 이 자리를 서울외국인학교가 매입하여 1957년까지 사용하였다. 현재는 프란치스코교육회관(Francisco Education Center)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미국대사관저(정동 10번지), 영국대사관(정동 4번지), 성공회대성당(정동 3번지), 이화여고 구내(정동 29번지, 30번지, 31, 32번지)가 거의 변동이 없이 남아있다.
[출처] 위키백과
여기는 한국인가 외국인가.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결정장애를 지닌 사람이라면 특히 서울의 정동을 추천하고 싶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한꺼번에 다 준비한 곳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반드시 가보야 할 곳은 바로 정동 15-1번지에 위치한 개항기 르네상스식 건물인 '구러시아공사관'이다. 이 건물은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더 유명한 장소이다. 건물은 6·25 사변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 옥 부분만 남아 있다.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으며,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 모양의 2연창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왕궁을 떠나 이곳, 러시아 공사관에 거쳐했다. 당시 조선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의병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는데, 이를 진압하느라 일본군의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도망친 것이다. 일본군 때문에 죽을뻔했는데, 일본군 덕분에 목숨 연장한 순간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 왕세자만 챙겨서 나라까지 버리고 1년 살기로 선택한 여행지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3. 대한민국 최대의 과학·연구도시 '대전광역시'
[충청권 제1의 도시이자 교통의 요지]
동쪽은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논산시, 남쪽은 충청남도 금산군, 북쪽은 세종특별자치시·충청북도 청주시와 각각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7°14'∼127°33', 북위 36°10'∼36°29'이다. 면적은 539.98㎢이고, 인구는 151만 877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5개 구, 79개 행정동(177개 법정동)이 있다. 광역시청은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에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충청권 제1의 도시로 중부지방과 영·호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대덕연구단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조성된 한국 최대의 과학·연구도시이다. 대한민국 도시 중, 북위 36도선 ~ 북위 37도선 지역의 최대 도시다. 여담으로 대전광역시의 신용등급이 좋은 편인데 무비스 신용등급이 대한민국과 같은 Aa2등급이다. 대한민국에서 살기 좋은 도시로 대전이 6위에 링크되었다. 또한 광역자치단체 순위로는 1위다. 또한 환경도 좋은 도시중 하나다.
순우리말 이름은 '한밭, '큰 밭'이고 '한밭'이 대전과 같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야민정음으로 '머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시에, 중소벤처기업부, 관세청, 대한민국 특허청, 통계청, 조달청, 문화재청, 산림청, 병무청, 국가기록원 등 정부 대전청사와 다수의 공기업 본사가 위치한 행정도시이다. 또 3군 본부와 인접해 있고, 육군 교육사령부, 국군의무학교, 합동군사대학교 등이 모여있는 자운대가 위치해 군사도시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대전은 대한민국에서 교통이 가장 발달한 도시다. 서울이 고속도로와 철도의 첫 출발점이라면 대전은 중간 지점이다. 중부 지방과 영남·호남 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중요한 도로가 거의 다 대전을 거쳐 간다.
더불어 대전에는 칼국수, 두부 두루치기, 튀김소보루가 유명하다. 맛있는 음식이 있고, 공기업 본사의 메카이며, 과학은 물론 군사도시의 기능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기습 남침해오자, 6월 27일 새벽 4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탈출해 대전으로 갔다. 그는 수줍음이 많았나 보다. 국회에도, 국무위원들에게도, 육군본부에도 '서울 탈출'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치밀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폭탄을 설치하게 한다. 그래서 한강철교가 폭파됐고, 다리를 건너던 시민 약 1200명이 죽게 된다. 대전을 거쳐 대구로 갔던 이승만은 너무 내려갔나?라는 판단(혹은 그때부터 그는, 대구에서 2020년에 벌어질 코로나 사태를 직감했던 것일까)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허위 방송까지 한다. 결국 대전에서 4일을 머물고, 이후 이리, 목포, 부산까지 도망간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냥 도망가는 것도 모자라 시민을 죽게 하고, 거짓말하고, 대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4일간 머문 여행지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직까지도 정확히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멋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어처구니없는 역사까지도 말이다.
바다에 가라앉는 배와 선원 및 학생들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선장이나, 강 건너 불구경하면서 네일아트 등 미용시술로 7시간을 오롯이 온몸에 처바른 대통령까지. 그리고 시민들이 바이러스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지 혼자 어지럽다고 자택인지 대구 관사인지 처박혀서 제 발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전하는 시장까지.
인터넷에 떠도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들은 안 가봐도 된다. 그곳들에 안 간다고 죽는 거 아니고, 그곳들에 간다고 안 죽는 거도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잊는다는 건
나라 버리고 가서, 몰디브 바드후 섬에서 별의 바다를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