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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ㄱㅍㅇ Aug 13. 2023

낮잠 3/6

초여름과 선풍기


초여름은 원래 잠들기 힘든 계절이다. 갑작스레 변한 날씨에 숨을 고르기 벅찬 느낌이라 뒤척이기도 힘든 사면의 벽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기 마련이다. 한여름이 오히려 낫다. 이때는 더운 것과 우울한 것만 잘 구분하면 몇 번이고 침대에 파묻힐 수 있다.


1. 셰프 3부작: <더 셰프>, <보일링 포인트>, <헝거>


진짜 좀.. 아름다운 포스터 없나?


자체 테마 상영회의 시도는 계속된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관람한 <더 메뉴>로 ‘요리 영화’의 섹시함에 관해 고찰하던 중, <헝거>의 추천글을 보았다. <위플래쉬>의 요리사 버전이라고 했나... 난 <위플래쉬>에 환장하기 때문에 겸사겸사 평소에 보려고 생각해 뒀던 셰프 영화들을 꺼냈다.


<더 셰프>는 인성은 별로지만 마성의 매력이 있는 브래들리 쿠퍼가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한 다니엘 브륄을 엿먹이고 쪽쪽 빨아먹은 다음 키스 한 번으로 퉁치는 영화다.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던 3 스타를 선심 쓰듯 날리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보아 그리 맛있는 영화는 아닌 듯하다. 난 2.5점 줌... 왜냐? 재미가 없으니까.


<보일링 포인트>는 문제 많은 이혼남이 손쓸 수 없이 틀어지는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진부한 이야기지만 영화의 포인트는 바로 원테이크샷으로, 다양한 인물의 서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현장의 생생함을 끊김 없이 전달함으로써 보는 이가 레스토랑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평 역시 무봉의 한 문장으로 써보고 싶다는 쓸데없이 지난하고 결과물의 가독성도 별로인 결심을 하게 만든다. 3.0.


<헝거>(2023)는 일단 <위플래쉬>가 맞다. 근데 너무나도 아류인... <배드 지니어스>에서부터 눈여겨본 배우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은 내가 태국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지만, 이번에는 조금 아쉬웠다. 가업을 물려받아 길거리 식당을 운영하는 ‘웍의 신’ 역할은 추티몬에게 매우 잘 어울렸지만, 빈약한 시나리오 때문에 그의 진지한 연기가 오히려 유치하고 진부한 이야기에 겉도는 느낌이었다. 전부 어디선가 봤던 전개, 대충 자극적인 결말을 내면 완성도가 높아 보일 거라는 잘못된 판단으로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린 영화. 배우는 너무 좋아 추티몬 상영회를 열 생각이지만 이번 영화는 2점이다.



평점을 보면 알겠지만 이번 상영회는 실패다!


2. 지미 T. 무라카미, <바람이 불 때>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1986년 제작된 반전, 반핵 애니메이션 영화다. 이야기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는 노부부가 다가오는 핵전쟁의 위기에 대비해 정부가 제공한 팜플렛을 가지고 집안에 대피소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단단한 벽이 있는 코너에 나무판자, 쿠션, 매트리스 등을 사선으로 쌓아 숨을 공간을 만드는 다소 조악한 대피소인데, 실제 핵폭탄이 떨어지자 놀랍게도 노부부는 긁힌 자국 하나 없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생존의 기쁨도 잠시, 곧 비극이 시작된다.

2020년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허술한 ‘대피소’가 폭발의 충격은 막아줄지언정 방사선의 침투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끝까지 방사능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폭발에서 살아남았으니 언제쯤 모든 게 정상화될까 궁금해하며 일상을 이어나갈 뿐이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피부가 벗겨지는 등 몸의 이상이 시작되지만 라디오도, 핵폭발 ‘이후’의 행동지침도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갈 수밖에 없다.

데이빗 보위, 핑크 플로이드 등이 음악 작업에 참여했는데 순수하고 온화한 성우들의 목소리와 평화를 가장하는 음악이 어우러져 너무도 쉽게 스러지는 ‘작은 인간’의 삶에 비참함을 더한다.


3. 이응일, <불청객>



진짜 이상한 감독이다. 그리고 진짜 더럽게 연기를 못한다.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돈데 그 정도 재주는 없으신 것 같다. 액면가 4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여전히 법전을 펼치고 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주인공(어떠한 정치적인 이유로 선정한 영화는 아니다.)은 어느 날 정체불명의 해외배송 소포를 받게 된다. 이걸 뜯어도 되나 고민하던 사이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택배를 뜯어 버리고, 그렇게 주인공이 두 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던 반지하 자취방은 우주로 날아가게 된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불청객’을 무찌르고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분투하는데….

모르고 볼수록 재밌고(?) 웃긴(?) 영화라 내용을 더 말하지는 않겠다. 그저 대 UCC 시대였던 2010년도에 이만한 CG로 SF를 찍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후진데 대단한 영화는 처음이다. 마지막 결말까지 SF적 메시지를 잊지 않는 이 엄청난 시나리오가 궁금하다면 왓챠, 혹은 유튜브(감독이 직접 올림)에서 관람하시길... 그러나 미리 경고하겠는데 재생한 지 10초 만에 뒷걸음질 칠 수도 있다. 세계 최초(?)로 디씨인사이드에 바쳐진 영화를 보는 셈이니까...


4. 한국 스릴러 영화 마라톤(<지구를 지켜라!>, <친절한 금자씨>, <마더>, <살인의 추억>,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신세계>, <공동경비구역 JSA>, <박하사탕>, <박쥐>, <올드보이>)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솔직히 말해, 극한의 도파민 없이는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 주씩 같은 작업을 하다 보면 참을 수 없는 권태가 밀려오고 매일 일정한 분량을 채워야 잘 수 있는 프리랜서의 삶이 이보다 원망스러울 수 없어진다. 하지만 프리랜서의 가장 좋은 점은 작업창 옆에 마음껏 영화를 틀어놓을 수 있다는 점. (회사원인 당신도, 혹시...?)  100% 집중하지 못하니 새로운 영화를 틀 수는 없고 이전에 봤던 영화들을 틀었다. 그리고 영어로 된 영화를 틀어놓으면 해석하느라 집중이 안 되기 때문에 한국 영화, 그중에도 가장 자극적인 00년대 스릴러를 골랐다.

전부 다시 봐도 재미있는 영화들이었지만, 어느새 작업도 놓고 빠져든 영화라면 역시 봉준호의 <마더>다. 아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김혜자 배우의 광기 어린 연기가 도망칠 수 없이 현실적인 시나리오와 만나 그 기억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최근 봉준호를 만난 아리 애스터가 ‘<마더>는 아름다운 모성애를 그린 영화인데 어머니가 좋아하시지 않았냐’고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었다.

이 시절에는 김혜자, 이영애 등 온화한 분위기의 배우들이 파격 변신을 하는 작품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그런 경계가 흐려진 것 같다. 솔직히 한국 영화 많이 안 봐서 별로 얹을 말이 없음. 더 열심히 볼게요...


5. 미야케 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한국 버전, 영어 버전 포스터

복싱 영화! 놓칠 수 없다. 3개월 배운 걸로 되게 나댄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복싱이 정말 좋다. 근처에 복싱장이 없어 쉬고 있는 이 기간이 지옥 같다... 뛰어서 30분 거리 복싱장이라도 갈까 고민 중이다.

실제 여성 농인 복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다니던 복싱장이 관장의 건강 문제로 문을 닫게 되면서 벌어지는 프로복서 케이코의 심리적 갈등을 그린 영화다. 주연 키시이 유키노의 연기도, 담담하게 미래를 말하는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케이코의 훈련 일지다. 나는 종종 일기를 쓰기 전에 ‘대단하지 않은 글을 쓰자’고 다짐한다. 너무 사소하고 개인적이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을 적는 것이다. 그렇게 써버리고 나면 놀랍게도 내 복잡한 머릿속에서 그 문장이 사라진다.

농인이지만 ‘보고 듣고 말하며’ 살아야 하는 케이코의 언어는 수어와 필담뿐만 아니라 거울, 진동, 그리고 시선으로 전달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라기보다는 ‘말이 아닌 것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을 그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제인 'Small, slow but steady'는 주인공 케이코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관장님이 복서로서의 그를 설명하는 표현으로, 촬영 단계 때 사용하던 제목이라고 한다. 유독 마음에 들어 추가했다. 가까스로 시간을 내 영화관에서 보고 왔는데 마침 필로(FILO)에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특집판이 나왔길래 얼른 구매했다. 근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못 읽음... 절망스럽다.


6.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유일하게 덥썩덥썩 도전하는 영화제가 바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다. 자꾸만 아리 애스터가 나오는데 이번 개막작 감독인 아리 애스터가 ‘It's a festival for weird fucked up movies made by sad and lonely people’(BIFAN은 우울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만든 존나게 이상한 영화를 위한 영화제)이라고 했다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BIFAN이 자랑하는(?) 트리거 워닝 사인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fucked up movies’를 분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직접 부천에 가지는 못하고 온라인 상영으로 봤는데 그마저도 시간의 압박으로 장편보다는 단편 위주로 봤다. 제일 궁금했던 <포크호러의 황홀한 역사>마저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해 1.25 배속으로 봐서 너무너무 아쉬웠다. 가능하다면 소장하며 꼼꼼히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


기억에 남는 것만 간단하게 리뷰하자면 <알렉스의 기계>는 <티탄>에 크로넨버그의 살(literal flesh)을 붙인 느낌이었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는 모든 면에서 퀴어한 주인공의 환각 체험 같은 느낌. (촬영 장소가 숭실대 임을 한눈에 알아봐서 왠지 뿌듯했음) <앤디 워홀의 프랑크슈타인>은 집에서 봐서 3D로 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예상만큼이나 섹슈얼하고 우스꽝스러운 바디 호러물이었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소재가 워낙 인간 본성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라 어떻게 각색해도 재미있는 것 같다.


<포크호러의 황홀한 역사>는 포크 호러 장르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이론을 소개하는 3시간 반 분량의 다큐멘터리인데, 꼼꼼히 보지 못해 아쉬운 와중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Anything can happen right now’(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였다. 포크 호러 영화는 주로 각종 미신을 무시하고 규칙을 어긴 인간의 정신에 알 수 없는 악의 기운이 파고들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우리는 그 강도는 다르더라도 뉴스에서 원인불명의 사건사고들이나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접하며 이러한 '악의 기운'이 현실에도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시대에 상관없이 포크 호러가 인기를 끄는 이유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현대식 포크 호러를 느끼기에는 <블레어 위치>와 <곤지암>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캠코더를 이용한 파운드 푸티지 형식 공포 영화의 시초 격인 <블레어 위치>를 완벽하게 한국식으로 현지화한 게 바로 <곤지암>이다. 어릴 적 곤지암 옆 동네에 살아 관련 괴담을 익히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웃으면서 틀었다가 식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사실 5, 6월 정산을 8월에 한다는 게 웃기긴 하다. 글 초입에 썼던 초여름에 관한 감상이 무색하게 이제는 하루하루 가을바람을 기다리는 시기가 됐다. 하지만 어쨌든 썼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

곧 7, 8월 정산 써야 한다... 그리고 그거 쓰려면 영화 봐야 한다... (왜 그렇게까지...?) 요즘 앨범 리뷰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영화로 치면 좋아하는 배우만 몇 명 있는 수준. 사실 음악은 영화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내 삶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나는 낮잠을 자거나 책 읽는 시간을 빼면 거의 항상 박자를 세고, 가사를 읊고, 춤을 춘다. 공부를 좀 한다면 내가 깨어있는 시간도 이렇게 정리, 정산할 수 있을까? 근데 아직 영화도 제대로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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