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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ㄱㅍㅇ Apr 08. 2021

달콤한 죽음, 그 이름은 사랑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 Sappho의 시와 레즈비언 영화들






0.



펭귄 클래식의 <Sappho - Stung with Love : Poems and Fragments>는 아론 푸치기안 Aaron Poochigian이 원문을 영어로 해석하고 설명한 시집으로, 현재 복원 가능한 사포의 시를 모아 여섯 가지 주제로 묶어내었다. 각 시의 제목은 첫 구절을 따 지어졌다.


이 글의 첫 부분은 영어로 번역된 시를 한국어로 번역하며 공부한 내용을 기록한 것의 일부로 역자의 설명을 일부 참고한, 나를 포함한 여러 인터넷 사용자들의 주관적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은 영어 번역자와 마찬가지로 번역 자체가 시적인 운율을 가지게 만들려 노력했다.


시작하기 앞서, 내가 영어, 라틴어, 번역학, 문학, 역사, 신화학 등 관련된 어떠한 것의 전문가도 아님을 미리 밝히며, 오류나 오역에 대한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한다.




‘In all honesty, I want to die. ...’



‘In all honesty, I want to die.’


‘진심을 담아, 나는 죽기를 소망해’


Leaving for good after a good long cry,
She said: ‘We both have suffered terrible,
But Sappho, it is hard to say goodbye.’


한참의 눈물 끝에 영영 작별하며 그녀는 말한다.

‘우리 둘 다 끔찍하게도 고통받았다.

하지만 사포, 안녕을 고하기란 참으로 힘들구나.’


I said: ‘Go with my blessing if you go
Always remembering what we did. To me
You have meant everything, as you well know.


나는 답한다. ‘진정 가야겠다면 축복으로 보내리.

언제나 우리가 한 일을 기억해.

너는 나의 전부였다. 이미 알고 있듯이.


‘Yet, lest it slip your mind, I shall review
Everything we have shared – the good times, too;


‘그렇지만, 너의 마음에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우리가 나눈 것들, 좋았던 순간들도 되새기고 싶구나.


‘You culled violets and roses, bloom and stem,
Often in spring and I looked on as you
Wove a bouquet into a diadem.


‘너는 제비꽃과 장미를, 꽃봉오리와 줄기를 따다 모았지.

그런 봄날이면 나는 너를 구경하곤 했다.

꽃다발을 왕관으로 엮는 모습을 말이야.


‘Time and again we plucked lush flowers, wed
Spray after spray in strands and fastened them
Around your soft neck; you perfumed your head


‘몇 번이고 다시, 우리는 무성한 꽃을 뽑아 엮었다.

가지 하나하나를 긴 가닥으로 만들어 네 목에 두르면, 

너의 머리에선 향기가 났지.


‘Of glossy curls with myrrh – lavish infusions
In queenly quantities – then on a bed
Prepared with fleecy sheets and yielding cushions,


‘반짝이는 곱슬머리에는 몰약을 풍성하게 담아

듬뿍 발랐지. 그리고 침대로 향해,

양털 같은 시트와 부드러운 쿠션이 있는 그 위에서


‘Sated your craving... ‘


‘너의 욕망을 가득 채웠다... ‘





1.


 푸치기안은 이 시를 ‘DESIRE AND DEATH-LONGING’ 즉, ‘욕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갈망’이라는 제목의 챕터로 엮었다. 앞선 장이 고대 그리스 시의 전형적 주제 중 하나인 ‘GODDESSES’ (‘여신들’)였던 것에 반해, 성적 욕망과 우울이 결합된 이 제목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울은 '동물적 본능'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같은 챕터의 시들 중에는 더 노골적인 우울을 나타낸 구절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That fellow strikes me as god’s double,…’ 에서 사랑과 질투라는 감정들에 공격받고 있는 화자는 자신이 시달리고 있는 고통을 호소하다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But I must suffer further, worthless / As I am... ‘

 (‘그러나 더 시달려 마땅하니, 나 같은 쓸모없는 자는... ‘)


시 속에서 사랑은 질병에 가까우며 인간을 자기혐오로까지 몰아넣는다. 사랑으로 인한 화자의 우울을 그리는 사포의 시 한 편을 더 적어본다.



‘That impossible predator, ...


That impossible predator,
Eros the Limb-Loosener,
Bitter-sweetly and afresh
Savages my flesh


저 무자비한 포식자여

에로스, 사지를 무너뜨리는 자여

달콤하고도 쓰게, 다시 한번

내 육신을 무참히 찢어놓는 자여.


Like a gale smiting an oak
On mountainous terrain,
Eros, with a stroke,
Shattered my brain.


돌풍이 떡갈나무를 쓰러뜨리듯

우거진 산간에

에로스는 단칼에

내 뇌를 산산조각 내는구나.


But a strange longing to pass on
Seizes me, and I need to see
Lotuses on the dewy banks of Acheron.


그러나 죽음에 대한 기묘한 갈망은

나를 사로잡아 기어이 보고자 하게 만든다

축축한 아케론 강둑 위에 피어난 연꽃들을.




 욕망은 쉽게 방향을 바꾼다. 사랑의 욕망은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소유의 욕망은 파괴의 욕망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성 동성애자를 이르는 ‘Lesbian’ [레즈비언] 이라는 단어가 사포가 태어난 곳인 ‘Lesbos’ [레스보스]에 사는 이들을 지칭했던 단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사포는 자신의 시에서 여성에 대한 사랑과 욕망 등에 대해 자주 묘사했는데, 첫번째 시(‘In all honesty, I want to die. ...’)의 마지막 구절만 보아도 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우정이나, 동료 혹은 가족에게 느끼는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상의 피조물 Heavenly Creatures>(1994), 케이트 윈슬렛, 멜라니 린스키 등


개인적으로 이 시를 읽으며 피터 잭슨의 1994년 作 <천상의 피조물>이 떠올랐다. 이 영화는 각각 15, 16세였던 두 소녀 줄리엣 흄(케이트 윈슬렛)과 폴린 파커(멜라니 린스키)가 어른들에 의해 헤어질 위기에 처하자 존속살해를 저지른, 1952년 뉴질랜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다. 다음(Daum) 영화  시놉에는 ‘우정(?)’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가 등장하나, 그렇게도 절친했던 둘은 영화 속에서 자신들만의 아지트로 쓰이는 오두막 침대에 누워 키스를 나눈다.



<천상의 피조물> 중



영화는 끔찍한 사건이 전개되는 것과 별개로 전반적으로 다채롭고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띈다. 자연광을 커튼처럼 두른 화면 속에서 두 주인공은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빛난다. 실제로 함께 소설을 쓰며 많은 시간을 보낸 두 주인공의 심리를 투영하는 듯 한데, 사랑에 빠져 현실 감각을 잃은 두 인물에게 살인이란 또 하나의 문학적 상상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



사포의 시에서도 죽음을 바라는 욕망이 종종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과 복수를 말하는 그의 언어는 성숙하며 담담하고, 가끔은 ‘남성적’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과격하다.



‘May gales and anguish sweep elsewhere ... ’


May gales and anguish sweep elsewhere
The killer of my character.


세찬 바람과 거센 비통이 다른 곳에 몰아치길,

나의 마음을 해친 자에게로.


But I am hardly some backbiter bent
On vengeance; no, my heart is lenient.


허나, 나는 복수에 눈이 먼 뒷담꾼이 아니다.

아니, 나의 마음은 무엇보다 관대하다.


You were at hand,
And I broke down raving –
My craving a fire
That singed my mind,
A brand you quenched.


너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나는 망가진 채 미쳐갔다.

불같은 나의 열망은

나의 정신을 태우고

식었던 낙인을 뜨겁게 달궜다.


Cold grew
The spirits of the ladies;
They drew
Their wings close to their bodies.


냉기가 서린다,

여인들의 영혼에.

날개를 끌어당긴다,

더 가까이, 육신에.



이 시 속의 화자는 분노와 냉정 사이에서 고뇌한다. 대상에 대한 욕망과 고통의 근원이 되는 이의 죽음을 바라는 욕망이 동시에 화자를 사로잡아 이성적 판단을 흐리고 있다.



<리지 Lizzie>(2018), 클로에 셰비니, 크리스틴 스튜어트 등



사랑에 눈먼 이들의 로맨스는 장르를 불문하고 매혹적인 중력을 가진다.


2018년도 영화 <리지> 또한 실화 기반의 영화로, '도끼 살인마'로 유명한 리지 보든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속에서 보든(클로에 셰비니)은 입주 하녀인 브리짓 설리번(크리스틴 스튜어트)과의 연인 관계를 들킨 후, 설리반을 성적으로 학대하던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재산을 노리던 새어머니를 살해한다.

사건 이후 드라마, 연극 등 수많은 각색 작품이 나왔는데, 실제로 보든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아 풀려났기 때문에 그 진상은 알 수 없다. 이 영화와 동명의 뮤지컬 등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연인과 성적 학대 이야기는 미국의 작가 애드 맥베인의 동명 소설(1984)에 등장하는 가설을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영화는 클로에 셰비니의 덤덤한 카리스마로 가득 차 있어 그의 팬이라면 즐길만하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주로 실망스런 문구들이 적혀 있는 국내 포스터들



어렴풋이 떠오르는 동성애 코드를 가진 여성 살인마 캐릭터의 모습은 유독 괴물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죽여줘, 제니퍼!>의 메간 폭스처럼 섹시하게 대상화되거나, <몬스터>(2003)의 샤를리즈 테론처럼 최대한 추한 모습으로 그려지거나. 잠깐, 동성애 코드가 없는 여성 살인마도 있던가? 아니, 잠깐. 성별을 떠나 동성애 코드가 전혀 없는 살인마 캐릭터는 얼마나 있던가? 성인 비디오 중독자 패트릭 베이트먼도 디나이얼 게이임이 분명하다. (어떤 질문을 구글링 하든 이미 이에 대한 레딧 토론이 존재한다. Is Patrick Bateman a denial gay?)






장르 불문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데에 수많은 작가들이 고전한다. 여성 작가만이 여성 캐릭터를 잘 쓴다는 것은 아니나, <미쓰 홍당무>, <매기스 플랜>, <파니 핑크> 등 내가 보아 온 영화 중 가장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모두 여성 감독이나 작가의 작품이었다. 이걸 보면, 그들의 여성으로서의 경험 또는 관찰이 이야기의 훌륭한 양분이 됨은 확실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의 욕망을 과장도, 축소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여성 서사를 확장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남성 캐릭터들에게 주어지던 특성을 여성에게 부여하거나, 남성적 욕망을 그대로 전이시킨 '무성(無性)'의 인물을 만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은 아니나 현실성은 떨어진다.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느라, 혹은 그러지 못했기에 여기저기 위축되어 있고, 어떤 면에선 쑥맥이며, 목 뒤에 비밀을 감추고 있는 캐릭터들은 보기 싫고 비호감일지언정 현실에서 툭 하고 벗어날 위험은 없다. 이것이 바로 '욕망하는 여성 캐릭터'가 중요한 이유이며,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



<Sappho>(1877), Charles-Auguste Me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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