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막이 불러온 기억
"엄마, 외할머니 꼬막 먹고 싶어요."
닭볶음탕을 맛있게 먹던 아들의 한마디에 마음이 살짝 따뜻해졌다. 아들은 외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친정엄마가 자주 해주시는 음식 중 매운 치킨(닭볶음탕)과 꼬막무침을 가장 좋아한다. 할머니표는 아니지만, 매운 치킨을 먹다 보니 문득 울산 할머니가 떠오른 모양이다. 음식을 보고 떠오르는 얼굴이라니, 그게 참 고맙고 뭉클했다.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손주가 할머니 꼬막 먹고 싶데요."
"호호호. 우리 손주가 꼬막이 먹고 싶다고? 근데 아직 날이 더워서..."
"찬바람 불면 서울 한번 오셔야겠어요."
"그래야지, 그래야지. 할머니가 가서 꼬막 해줄게."
이제는 안다.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걸.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땐 왜 몰랐을까.
결혼을 하고 진짜 엄마가 되기 전까지, 나는 엄마의 호의를 늘 거절했다. 엄마의 건강상 무리일 것 같았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산후조리를 해주러 호주에 오겠다는 엄마를 말렸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반찬이나 육아 도움을 받지 않았다.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워야 한다'는 오기 같은 신념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인다. 혹시나 엄마의 마음을 거절한 거라고 느끼셨을까 봐.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아프셨다. 첫 입원은 내가 고1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언니가 수능을 치르고 원서를 쓸 무렵이었다. 귀 옆 침샘에 혹이 생겨 간단히 제거하고 오겠다고 하셨는데, 결과는 달랐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평소라면 골목 어귀까지 마중을 나오던 엄마 대신, 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단단히 하고 들어. 엄마 수술이 좀 길어졌어. 혹을 제거하려고 열었는데, 암세포가 신경을 감고 있어서... 그걸 없애려면 신경을 잘라야 했대. 깨끗이 제거는 했는데, 이제 얼굴 한쪽 안 움직인다고..."
예상치 못한 말에 충격을 받았다.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잊고 싶은 순간이라서일까, 그날의 장면은 지금 떠올리면 안갯속처럼 뿌옇다.
엄마를 보러 처음 병문안을 갔을 때, 기운이 없는 얼굴로 누워있던 엄마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엄마, 좀 괴물 같지?" 붕대를 감은 얼굴로 던진 농담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눈물도 터질까 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그날 엄마의 웃음은 씁쓸했고, 차갑고 하얀 병원 냄새는 오래도록 남았다.
그 후, 엄마의 한쪽 눈은 잠잘 때도 완전히 감기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밤 연고로 눈을 덮어줘야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의 일이 되었다. 엄마가 누우면 나를 부르셨고, 나는 면봉으로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드렸다. 대부분은 보통의 밤 루틴처럼 흘러갔지만, 어떤 날은 참 귀찮았다. "왜 나만 해야 해?" 그런 날은 투덜거리는 말투만큼 터치도 거칠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도려내어 버리고 싶을 만큼.
몇 년 뒤, 엄마는 언니 결혼을 앞두고 재건 수술을 결심하셨다. 그 무렵 나는 정유회사 단기 알바 중이었는데, 일이 끝나면 거의 매일 부산 병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얼굴만 보고 돌아왔지만, 하루라도 안 가면 왠지 불안했다.
두 번의 재건 수술 끝에도 엄마의 얼굴은 완전히 돌아오진 못했다. 밤마다 연고를 바를 일은 사라졌지만, 좌우의 불균형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아사풍이 왔느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는 한결같았다.
약해 보이지만 단단한 우리 엄마. 그녀 스스로 다독였을 숱한 시간들은 내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늘 웃었다.
한참이 지나, 내가 비행을 하던 시절. 엄마는 다시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았다. '징글징글하다'던 병원으로 또 가야 했다. 내가 옆에 있진 못했지만, 아빠와 언니의 돌봄 속에 수술과 치료를 무사히 마쳤다.
그 모든 과정에서 엄마는 말했다.
"괜찮아."
정말 괜찮으셨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되었을까. 무엇이든 좋다. 우리 삼 남매에게 엄마는 영웅이다. 어느 슈퍼히어로 못지않게, 멋지고 용감한 사람.
할머니와 꼬막이 생각났던 그날 밤, 자려고 누운 아들이 말했다.
"엄마, 나는 울산 할머니가 너무 좋아.
할머니는 다정하고 따뜻해.
할머니는 잘 생겼어."
마지막 말에 웃음이 터졌다. 아이의 눈에도 할머니의 얼굴은 특별했을 것이다. 고정되지 않은 아이만의 아름다움의 기준, 그 너머의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얼굴. 아이의 따뜻한 시선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아들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가 왜 '예쁜'이 아니라 '잘 생긴'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인지에 대해서.
아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두 달이 넘도록, 서랍에서 나오지 못했던 글입니다.
쓰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애써 매듭을 지어봅니다.
지난주 엄마가 다녀가셨고, 우리는 꼬막무침을 맛있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