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사? 찍사!
사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애매한 사람의 단체 여행 후기
좋은 기회로 회사에서 해외 연수 자격을 얻었다. 휴가는 아니지만 입사 이래 2주간 사무실을 비우는 건 처음이라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다.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여러 업무를 앞서 처리하던 중, 한 팀원이 말을 걸었다.
"함께 가는 다른 연수생분들 중에 비슷한 연령대가 있나요?"
이번 연수는 A대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 주 1회 교육을 수료했다는 조건 하에 부여되는 혜택이었다. 따라서 동종업계 다른 회사들에서도 한두 명씩 교육생을 선발하고 있었고, 우리는 12주간 퇴근 후 3시간씩 한 강의실에 모여야 했다. 그러나 퇴근 전 이미 소진돼 별다른 대화 없이 수업만 듣고 해산하는 편이었다.
"아직 서로 나이 물어볼 정도로 친하진 않아서...... 외관상 또래로 보이는 분들은 있어요."
"잘됐네요, 그래도 여행 가면 사진 많이 남겨야 하는데 서로 찍어주면 좋잖아요."
그제야 내가 처음으로 북유럽 4개국에 가는 것이고, 복지국가여서일까 사비로 가기에는 경비 소요가 꽤나 커서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게다가 여행사에서 따로 일정을 조율해준 출장이므로 유관기관 외에도 관광지 방문 일정이 고루 분포했다. 흔치 않은 출장 기회 잘 누리다 오길 바란다는 팀원의 의도는 고마웠으나, '친구들도 아니고 직장인들끼리 사진 찍어달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냥 멋진 풍경만 단독으로 찍고 눈에 담기만 해도 충분하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9박 11일 동안 노르웨이, 스웨덴, 에스토니아, 핀란드 순으로 이동하며 길치인 내가 길 잃을 걱정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다수가 다수를 찍는 무리만 찾으면 됐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수일간 단체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길어야 반나절 정도 가이드님의 설명이 유익할 것 같은 바티칸 성당 혹은 프랑스 파리 근교 몽생미셸에 갔던 게 전부다. 그래서 연수 초반에는 현지 가이드 분이 버스 이동시간 내내 설명하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정과 다른 장소에서 버스가 불쑥 멈추는 상황이 어색했다.
"이곳에서는 저기 폭포를 뒷배경으로 사진 찍으면 잘 나와요. 아까 설명드린 야생블루베리 기억하죠? 반대쪽 숲에 들어가면 있습니다. 마침 저기 산양들이 지나가네요. (버스 운전사 분과 노르웨이어로 대화한 후) 여러분들이 앞서 잘 따라주셔서 다음 행선지까지 충분히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넉넉히 15분 드릴게요. 어서 내리세요!"
여기 그냥 오르막길 도로 아닌가요. 여기서 15분이나 정차해도 되는 건가요. (다행이라 하기엔 다소 불안한 면적이었으나 어느새 도로 바깥 산비탈 쪽에 버스가 자리 잡았다.) 15분이나 찍을 만큼의 풍경은 아닌 것 같은데...... 어라 1분 남았다! 어서 다시 버스로!
나는 사진 찍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카메라 앞에서 내 표정은 (^0^)와 (ㅇㅡㅇ) 두 가지로 나뉜다. 입이 웃으면 눈도 함께 웃어 평소 눈 크기에 비해 작게 찍히고, 반대로 눈 크기를 유지하려 하면 자동으로 입술이 사라질 정도로 앙 다물어 그다지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어색할지라도 당시를 추억할 이미지를 얻는다는 건 소중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휴대폰 혹은 가까운 지인이 촬영했을 때다. 먼저 가까운 지인이 찍어준 사진은 금세 공유받을 수 있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상대가 마음에 든다면 웬만해서는 소장해도 상관없다.(그만큼 그 사람이 내 초상권을 지켜줄 거란 믿음이 있으니까. 별표.) 그리고 무엇보다 내 휴대폰 갤러리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지인들과의 사진 공유가 끝난 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은 바로 삭제한다. 한 장소에서 동일한 구도로 찍었다면 한두 장으로 바로 줄여두는 편이다. 그래서 버스에서 우르르 내려 서로가 서로를 찍어줄 때, 특히 가까이 있던 한 명에게만 부탁했는데 어느새 여럿이 내 앞에 카메라 렌즈를 가져다 댈 때면 "감사합니다"며 그들이 있는 쪽으로 황급히 빠져나왔다. '(나의) 수요 없는 (연수생들의) 공급'보다는 차라리 공급자가 되는 게 나을 터이니.
그렇다고 사진 찍어주는 사람, 일명 '찍사' 역할로 연수생들에게 기여하기에는 뛰어난 실력자들이 많았다. 정말 놀랐다. 아마 팀원이 '또래'가 있냐고 물었던 것은, 연령대별로 사진 찍을 때 방점을 두는 지점이 달라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함께한 연수생들은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가 비교적 다양했는데, 나를 찍어준 혹은 내가 찍을 때 요청받은 것들로 사진 취향을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겠다.
1. 20~30대 초반: 풍경이 좋다면 인물의 크기는 작아도 상관없다. 찍는 사람은 일단 바닥에 앉아서 피사체의 비율을 최대한 늘리는 데 집중한다. 셔터 누르기 전 '하나 둘 셋'이라 외치기보다는 여러 차례 사진을 찍고 자연스레 움직여보라고 권유한다.
2. 30대 중후반: 풍경과 명소보다도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둔다. 인물의 비율보다는 프레임 내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 중요하다. 한 곳에서 여러 차례 사진 찍기보다는 한 번 촬영을 시작하면 이곳저곳 이동을 제안했다. '하나 둘 셋' 외치는지 여부는 각기 달랐다.
3. 40~50대: 인물 촬영 시에는 2번 유형과 비슷하다. 다른 두 유형이 사진 촬영을 요청한 특정 인물 위주로 찍는 것에 비해, 이곳에 모인 '연수생 모두'를 찍어두는 편이었다. (단체 메신저 방에서 사진을 공유받은 후 출장증빙 보고서에 활용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스타용, 블로그용, 부모님 카카오톡 프로필용 사진이 각각 다르다는 유머글에 공감되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선입견과 다른 게 하나 있다면, 1번 유형에 속하는 나에게도 2,3번 유형이 촬영한 사진들 중 마음에 드는 게 많았다는 것이다. 촬영하는 인물에 포커싱 기능을 활용하니 오히려 비용을 지불한 스냅사진 마냥 내 얼굴이 잘 나오는 사진이 많았다. 또한, 연수생 전부를 한 프레임에 담으니 서로를 기억하기 유용하며 카메라 렌즈가 나를 향한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어 다양한 표정의 나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두 가지를 꼽자면, '맥주 반캔도 안 마셨으면서 햇빛에 양볼이 빨갛게 익어 얼큰하게 취한 모양새로 방긋 웃으며 건배하는 모습'과 '공식 일정 수업 중 직류와 교류 차이가 가물가물해 황급하게 휴대폰으로 검색하는데 난이도에 비해 엄청 학구적으로 진지한 모습'이다.) 결국 사진은 세대가 아닌 실력 차이에 달린 것이라 느꼈다. 교육생 중 최연소였던 내가 찍은 사진들에 대한 기대가 크지는 않았을까 문득 걱정된다. 그런대로 나 역시 세대 선입견을 깨는 데 일조한 것이리라.
찍는 사람으로서도 찍히는 사람으로서도 이리저리 허둥댔지만, 이 과정에서 강의실에 앉아있을 때와 달리 여럿과 대화 나누고 친해질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돼 글을 쓰는 지금, 아직까지 서로 주고받지 않은 사진들이 많다. 주말이 지나면 다시 각자의 직장에서 밀린 업무를 해야 하므로 사진 공유의 최종일자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다시금 만날 훌륭한 구실일 것이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모두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은 같다. 기록하는 방식 및 취향은 각기 다른데, 그렇기 때문에 서로 교류하는 것이 더욱 뜻깊다. 그 사진을 내가 간직할지 안 할지는 부가적 요소다. 앞으로도 과잉공급이라 지레 '셔터 내리지' 말아야겠다. 평소 믿을만하던 '찍사(찍는 사람)'에게만 부탁하지 말고, 쭈뼛거리더라도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찍사(찍히는 사람)'에 종종 지원해 봐야겠다. 찍사? 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