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할멈이 버린 정구지 자라는 바위와 얼음굴
구름이 피어오른다는 운문산은 예로부터 호거산(虎居山)으로 부르기도 하며, 산의 모양이 마치 한 덩이의 큰 바위처럼 생겼다고 하여 '한바위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과 아랫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산으로 운문지맥의 최고봉이다.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을 경계로 능선은 활처럼 휘어져 있다. 조선시대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의하면 '운문산은 골이 깊숙하고, 불가에서는 1,000명의 성인이 세상에 나올 것이며, 또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복지'라 했다. 학심이골을 비롯한 천문지골, 심심이골, 복숭아나뭇골, 새암터골, 못골, 상운암 계곡 등 깊은 계곡을 품고 있다. 치마바위, 정구지바위, 소머리바위, 문바위, 사자바위 등 걸출한 바위능선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대 사찰인 운문사를 비롯한 대비사, 천문사, 석골사와 천상에 걸린 상운암 등 많은 암자도 이 산자락에 있다. 또한 동의보감 허준이 반위에 걸린 스승의 시신을 해부한 곳이 운문산의 얼음굴이라는 설(說)이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 볼수록 신비로운 곳이다. 심산유곡의 깊은 골짜기에는 약초와 산나물이 지천에 깔려있고 기암괴석과 산세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 신라 말 비허스님이 지은 오랜된 절집 석골사
석골사는 경남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에 소재하고 있다. 석골사는 신라 말 비허(備虛) 스님이 지은 암자로 추정되는 오래된 절집이다. 한때는 석굴사(石窟寺)라고도 했는데 비허스님이 석굴에서 수도하기 위해 지은 암자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보양(寶壤)이 석굴사(石堀寺)의 비허(毗虛))와 도반(형제)이 되었는데, 봉성사(奉聖寺), 석굴사(石窟寺), 운문사(雲門寺)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고 한다. 비허는 도반인 보양 선사와 함께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던 인물이다. 그 덕에 석골사는 고려 때 9개의 말사를 거느릴 만큼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절은 점점 쇠퇴를 거듭했지만 임진왜란 때는 석동계곡으로 들어온 의병과 백성들을 품기도 했다. 의병으로 활약했던 손기양은 임란 후 관직에 나갔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는데 그가 쓴 '석골사'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전략)
계곡의 물은 여러 바위에 걸려 골짜기에 울리고
달은 층층 봉우리에 솟구쳐 한밤중에도 밝은데
산 밖의 길은 험하여 피곤한 다리를 걱정하고
베개 가엔 묘한 향냄새로 마음이 맑아지네
근자에 듣자 하니 강호에 풍랑이 많다는데
그 누가 노를 잡고 생사를 살펴볼까
(후략)
석골사는 광해군 연간까지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정구지바위, 함화산·얼음굴
정구지바위는 석골사와 상운암 중간 기점에 있다. 바위의 형태는 마치 거대한 고인돌처럼 아래에 기단 형태의 큰 바위가 있고 그 위에 높이가 4~5m, 둘레가 30여m나 되는 타원형 형태의 돌이 얹혀 있다.
오랜 옛날 밀양에 사는 마고할멈이 어느 봄날 울산에 사는 딸집에 정구지(부추) 모종을 갖다주기 위해 석골사에서 부처님을 알현하고 상운암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호시절이라 지천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온갖 산새들도 지저귀며 교태를 부린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조차 마치 마고 할멈을 반기기라도 하는 듯 아름답게 들려왔다. 마고 할멈은 이 호시절에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바위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바위에 올라 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석골사 앞 수리봉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오고, 맞은편 비로능선과 그 아래에 흐르는 비로암폭포를 바라보니 흥이 절로 나와 창부타령 한 대목을 불렀다.
아니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어지러운 사바세계
의지할 곳 바이 없어
모든 미련 다 떨치고
산간벽절을 찾아가니
송죽바람 슬쓸한데
두견조차 슬피 우네
귀촉도 불여귀야
너도 울고 나도 울어
심야삼경 깊은 밤을
같이 울어 세워볼까
얼씨구나 좋다~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흐드러지게 창을 한 대목 한 뒤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는데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가고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탓에 마고할멈이 머리에 이고 온 정구지를 두고 간 바람에 이 바위 위에서 정구지가 자라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필자도 오래전 이곳을 산행하면서 정구지꽃을 본 적이 있다. 정구지 바위는 함화산과 얼음굴 들머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이정표이기도 하다.
# 유의태·석골사 보양대사, 자주 왕래 하던 얼음굴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준이 스승 유의태 시신을 해부한 곳이 밀양 시례 빙곡으로 돼 있다. 그래서 재약산 얼음골 동의굴이 해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는 얼음굴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다르다. 유의태가 운문산 석골사의 보양대사와 친분이 두터워 자주 왕래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들어 운문산 얼음굴이 허준이 스승 유의태 시신을 해부한 곳이 아닐까 하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얼음굴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동굴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굴은 길이 7~8m, 높이 2.5m, 둘레 30여m로 집채만 한 바위 1개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거대한 적묘를 옮겨 놓은 듯하다. 동굴 가장자리에서 약간 아래쪽에는 누군가가 불을 피워 생활한 흔적이 있으며, 위쪽은 반듯하고 매끄러운 돌침상(기단)이 있어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할만한 침상 크기이다. 또한 4월부터 6월 사이 동굴 내부의 온도가 섭씨 영하 3~4도까지 내려가 바위틈의 물이 1~3㎝ 두께로 얼었다가 6, 7월 사이에 천천히 녹는다는 곳이다. 천황산 북쪽 계곡(밀양 얼음골 위쪽 계곡)에 유의태가 제자인 허준에게 자신의 시신을 남겨 해부하라고 한 바위굴이 이 곳일 것이라고 추정해 동의굴이라는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실제 이 굴을 찾아가보면 동굴 자체가 굴(窟)로서의 깊이가 너무 얕다. 굴의 길이는 입구에서 불과 1~2m도 안 되기 때문에 비바람을 피할 수 없을만큼 협소하다. 쉽게 생각해보면 시신을 해부할 장소 즉 우선 시신(몸)을 눕힐 자리도 시원찮고 굴 안에 돌침대와 비슷한 것도 없어 해부를 하기엔 알맞지 않는 곳으로 판단된다.
#찾아가는 길
울산에서 밀양 가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 가지산 터널을 지나 밀양 방향으로 간다. 원서교차로에서 원서리에서 빠져나와 오른쪽 지하도 앞에 석동 표지석이 보인다. 석골교 건너 우회전한 후 석동마을 지나 산길을 조금 더 오르면 석골사가 있다. 석골폭포 옆에 주차장이 있다.
□ 참고문헌
* 밀양읍지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 20여년전 상운암 주지 <지수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