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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08. 2020

손에 손잡고

[랩걸] by 호프 자런

이 책은 오십 살 이전에 절대 쓸 수 없는 책이다. 씨앗으로부터 꽃이 필 때까지의 모든 순간을 한 번은 겪었던, 어딘가를 지나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 아직 지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덧 인생의 한 부분이 저물어져 간다는 느낌을 아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책. 고로 아직 청춘인 자들은 이 책을 이해한다 말할 수는 있겠지만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냐’고 나에게 울면서 소리치던 엄마를 보며 나는 그동안 엄마의 좌절과 고통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절대 앞으로도 그 심연의 바닥에 내가 직접 가 닿을 수는 없겠구나 절망하던 그 날이 생각난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삼십 대 후반의 나에게 이성에 대한 이상형을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어차피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는 경우가 많으니 진지하게 대답하면 내 자신과 물어본 사람이 둘 다 어색해질까봐 항상 대답할 말을 쉽게 찾지 못하고 이 순간을 어떻게 재치 있게 넘길까 궁리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중에서 이상한 놈이요’라고 말해왔는데 사실 내 진짜 이상형은 언제나 ‘뭘 좀 아는 놈’이었다. 진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사람, 실제의 나를 인지하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 어떻게 사는 것이 멋지고 가슴이 뿌듯한지 아는 사람, 물론 항상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한 마디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이상형으로 얘기를 했지만 실은 ‘좋은 사람’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이 비루한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기에 내 인생의 정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감지했던 어느 신년에, 매년 결심해오던 영어 공부하기, 건강해지기, 책 많이 읽기 따위의 신년 계획을 세우는 게 문득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제법 진지하게 ‘차카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미래지향적인 질문은 그 시점부터 ‘나는 죽기 전에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 미룰 수가 없게 된 그때부터 나는 내 자신이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착한 사람? 순한 사람?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주는 사람? 상냥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무엇이든 좋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영원히 좋은 것도 없겠지만 좋은 건 좋은 거니까. 그다음은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보아야겠다. 나를 관찰하고 알아내는 성찰하는 일,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피곤하고 많은 노력을 요한다.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위적인 정당화를 끊임없이 주장하는, 욕망 덩어리인 나와 싸우고 화해하고 합의하는 지긋지긋한 일. 이 일의 더 지긋지긋한 점은 죽을 때까지 끝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와 나는 누구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는 일은 기차를 달리게 하는 두 갈래 레일처럼 종착지까지 나란히 이어질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최근에 더욱더 내가 어쩔 수 없는 먹물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그것은 내가 좋은 학교를 다녔거나 공부를 직업으로 삼아서는 아니다. 이유 없이 무엇엔가 끌리는 것은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선천적 취향 같은 것인데 책, 인문학, 글쓰기, 교양, 대담 등등의 키워드가 눈에 잘 들어오고 다른 가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보편적으로 고상하고 좋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니까 많이 알고 똑똑해지면 뭐가 좋은 거지? 그래서 몇 년 전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세간에 오르내릴 때도 도대체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바로 대답할 수 없었지만 당장에 할 고민도 아니어서 머리 한구석에 밀어놓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호회에서 알게 된 친구 중 하나가 외국으로 늦은 나이에 취업비자도 없이 유학도 아닌 이민을 가기로 결심한 이유가 가족이었고 도저히 앞으로 견뎌낼 자신이 없다는 얘기를 하기에 찬찬히 들어주다가 문득 아 이래서 지성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배움이 짧지도,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하고 자식이라고 함부로 대한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이 분들은 무식한 게 아니라 무지하구나.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늙는 것이 추한 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결국 그 무지함 때문에 그들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이민을 간다는 자식을 이해하지도, 붙잡을 수도 없겠구나. 지성이 없는 삶은 뿌옇고 흐린 슬픈 느낌으로 알게 되었다.

결국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다 알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겠지. 존재에 목적이 있을까. 신학적인, 철학적인, 과학적인 이 질문. 고대에는 이렇게 분류되지 않았던 존재에 대한 이 유니버셜한 질문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목적이 있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것이다 라는 끝이 없는 이상한 문장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명백한 사실들이 내가 살 수 없거나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존재는 영속하기에 의미가 있으므로 우리는 주어진 이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야만 한다.

나에게 이 책은 기나긴 일기장을 읽어본 것 같은 공감의 시간이었다. 과학자로서 가장 뿌듯한 발견을 한 순간에조차 느끼는 그 외로움의 정서, 절대적으로 나는 이 우주에서 홀로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울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 여성으로 사는 것은 어디에 있더라도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평가받는다는 그 속박의 시선들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전투적인 자세, 그렇지만 그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바깥에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느껴지는 허기, 자기 자신에 대한 직관적인 확신이 있으면서도 끝없이 회의하고 의심하는 그 집요한 성찰의 기록들. 결국 좋은 과학자, 좋은 엄마, 좋은 교육자, 좋은 반려자 그리고 좋은 친구가 되고자 하기에 이런 성찰들이 의미가 있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구나 라는 안도감과 공감을 얻는 것, 그래서 비트코인이 판을 치고 희망사항이 임대업자라고 말하는 어린이들을 봐야 하는 이 미친 세상 속에서, 최근 공포에 가까운 좌절감과 자괴감을 좀 털어낼 수 있었던 것,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서 덜 의심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생각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문장들을 오랜만에 비망록에 옮겨 적으면서, 뿌리와 뿌리가 이어져 위험한 순간이 오면 서로 손을 꼭 잡아주듯 신호를 보내주는 나무들로 꽉 찬 숲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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