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제 전 글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현재 저와 제 남편은 시가 식구들과 연락을 끊은 상태입니다.
좀 더 극적인 표현으로 '손절'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겠지만, 사실 가족이라는 것이 휴대폰 연락처를 '차단'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쉽게 끊어질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생략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남편은 부모 연락처의 빨간색 '차단'버튼을 누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많은 지옥을 오가야만 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빠와 성이 다른 저에게 성을 바꾸는 게 어떠냐며(일가친척을 맞이하는 본인들의 '면'이 서지 않기 때문에) 제 상처를 뒤집어 놓을 때도, (이미 결혼 전에 글쓴이인 제가 과거 기흉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스트레스로 2일 병원에 입원해 산소치료를 받은 것을 안 시가 부모가 운전 중이었던 우리 엄마에게 대뜸 전화해 사기 결혼이라고 따질 때도, 그때 병원에서 누워있는 '며느리'에게 전화 한 번 하지 않았을 때도, 신혼여행에서 사 온 선물'들'을 남편 얼굴에 던지며 이혼을 하라고 행패를 부릴 때도, 결혼 전 남편의 외가 식구들에게 첫인사를 가던 날 10인분의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해야만 했을 때도, 상견례가 끝나고 우리 엄마가 '놀던 여자'였던 것 같다며 뒷담을 깠을 때도, 결혼식 날 우리 엄마가 자기에게 '먼저' 인사 오지 않았다고 뒷담을 깠을 때도, 결혼식 중간 높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 잠깐 앉아 쉬고 있던 날 보며 어디 아픈 애 아니냐며 핀잔을 주는 시가 일가친척을 겪을 때도, 저희 부부는 참았습니다.
우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살면서 어른에게 할 말을 하고 대들어 본 적도 없던 터라, 남편의 부모가 그렇게 나와 우리 집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을 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런 비슷한 일이 있거나, 일련의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남편이 대신 화를 내주고 싸워주고 맞서줘서 제가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었기도 했죠. 그저 전 남편의 뒤꽁무니에 찰싹 붙어 '싹수없는' 며느리라는 이미지를 심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우리 부부는 결국 시가 부모를 차단해야만 했습니다. 왜냐고요?
시가 부모가 저와 남편의 이름으로 '다단계'를 가입했거든요.
비가 많이 오던 그날. 남편과 제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습니다. 메시지 하나가 왔는데, 그 메시지는 사진 한 장이었습니다. 문서가 찍힌 그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편과 내 이름
-남편과 내 현주소
-남편과 내 전화번호
-남편과 내 생년월일
-시부모의 통장 번호
-남편과 내 서명
네, 계약서였어요.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어떤 회사 이름과 직인이 맨 아래 찍혀있는, 절대 번복이 안된다는 그런 무서운 말이 쓰여있던 그 종이 한 장.
남편은 그야말로 꼭지가 돌아버렸습니다.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밟고 살아온 남편은 말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 장난질 치면 그때는 진짜 끝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아들과 심지어는 며느리의 이름으로 장난질을 쳐버린, 그 결과가 이 계약서 한 장이었습니다.
남편은 곧바로 시부모에게 전화했죠.
'당장 철회 안 하면 변호사 부를 거니까, 알아서 해.'
'이거 그런 거 아니야, 너희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원금 보장되고 수당도 쏠쏠하대.'
'우리 도와주는 건데 아빠 계좌가 왜 쓰여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철회해.'
저의 경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이런 경우는 생애 처음이었고,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던 터라 상황파악이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멍하게 하루를 보내고 그날 저녁, 불현듯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 저는 시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시엄마는 다 우리 잘되라고 한 거라며, 오히려 저희가 유난을 떤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전 이렇게 대답했죠.
'아, 그렇구나... 근데 어머니 제가 어느 날 어머니 이름, 생년월일, 전화번호, 주소 이런 개인정보가 적힌 계약서를 들이밀면 기분이 어떠실까요? 이미 계약을 마친 뒤예요. 지금 어머니 아버님이 하신 그대로 똑같이요.'
'.... 아니 근데 나는 좀 서운하다? 다 너희 잘되라고 그런 거잖아. 아무튼 너네가 싫으면 너희 이름은 뺄게.'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
난생처음으로 어른에게 할 말을 해본 날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속이 시원해 사실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여전히 남편은 곁에서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 특유의 낙관성으로 우선 남편을 재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시부모는 계약을 철회했을까요?
사실 이 글에 쭉 써 내려가려고 했으나, 쓰다 보니 다시 열이 받고 쓰다 보니 그때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는 느낌이 강해 이만 줄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늘어뜨리는 글을 쓰는 날에는 나머지 하루가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괜히 과거의 기억 때문에 오늘을 망쳐버리는 불상사를 막고자 이 글을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 참고로 지금까지의 시점은 아직 연락처 차단을 하기 전이예요.
그 후의 일화가 또 있거든요! 그럼 부정을 회복할 수 있는 긍정 탄력성을 충분히 충전한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며느리에게 힘을 보내며, 글을 (진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