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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디 Jun 03. 2023

인간실격을 마주하는 매 순간

공원에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씨도 부드럽고 해도 좋은 날에는 야외에 나와 잠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살아가는데 큰 버팀이 되어줍니다.


현재 온도는 25도 이고, 바람이 좀 많습니다. 대신 해가 굉장히 강하고 시야는 지나치게 뚜렷해 눈이 부십니다. 함께 산책길에 나선 나의 두 마리 강아지는 벌써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눈을 가늘게 뜬 녀석들. 전 어쩔 수 없이 그늘을 찾아 헐레벌떡 가까운 공원으로 향합니다. 가까워봤자 집에서 1km 떨어진 곳이지만, 이곳 말고는 다른 공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 동네로 이사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지리에 미숙한 탓입니다.



평상이 넓게 마련된 공원입니다. 저녁만 되면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공원이지만, 한낮에는 한가롭습니다. 주말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태양에 움츠려든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기를 꺼려한 듯, 공원에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여자 한 명과 운동기구 주변에 모여 있는 어르신 몇몇 분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던 그때 할아버지의 쯧쯧거림이 들렸습니다. 베이지색 중절모를 쓰고 삼베 비슷한 옷을 입고 있던 그 할아버지는 품에 안겨 있는 강아지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보호자를 나무랐습니다.


"어떻게 개가 사람이랑 같이 앉아있나? 인간의 격이 떨어지지 않나?"


얌전히 잘 쉬고 있던 강아지는 영문 모를 불안함에 벤치에서 내려왔고, 옆에 앉아있던 견주는 짧은 대답 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네." 

조용한 여자의 대답을 들은 할아버지는 더욱더 세차게 쯧쯧거리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편안했던 공원 분위기는 삽시간에 불편해지고 말았습니다. 아. 

 

*


드는 생각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격이라....?'


과거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이자 도전은 밤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같은 초원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생존'이라는 같은 목표를 나눴던 과거 그때, 인간을 먹이로 하는 사자가 제일의 두려움이자 천적이었던 그때 인간은 이윽고 늑대를 우리의 방패막이로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 배경에 따라 일각에서는 늑대를 인간이 집으로 들인 최초의 동물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윽고 늑대의 후손인 개는 (아마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안전을 위해 집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마당견이 탄생하게 된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더 이상 개에게 집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은 개로 하여금 따뜻한 온기와 감정을 주길 바라게 되었죠. 이에 따라 애완견, 마당견이라는 호칭은 시대착오적인 발생이 되었고, 대신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반려견.




삶은 갈수록 퍽퍽해지고 버겁습니다. 저의 인생도 그렇고 아마 당신의 인생도 그럴 것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고 느끼고, 차라리 가까워지지 않는 편이 깔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웬만해서는 완전한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버렸습니다. 자기 방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혼자가 되는 것, 그러나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으로서 예고 없이 밀려드는 외로움은 막아낼 길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막막함을 느낍니다. 당황스러운 감정의 썰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릅니다. 마음은 허하고 기분은 우울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그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려동물을 집으로 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꼬리를 흔들어주고 몸을 기대고 그야말로 확실하게 제 온기를 나눠줍니다. 말 그대로 아무런 조건 없이, 이 털 달린 털북숭이들은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게다가 녀석들이 말을 못 하니 모든 것은 인간 중심적으로 의인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강아지를 나 자신보다 아끼는 이유입니다. 


물론 화수분 같은 동물들의 사랑 속에서도 인간의 악함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소름 끼치게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강아지들의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될 때이죠. 직립보행을 하고 두뇌가 크다는, 순전히 운이 좋아 생태계의 우위를 점유한 인간이 동물을 도구화 할 때 그 만행을 목도하고 있노라면 정말 한 번도 빠짐없이 저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죄스럽습니다. 


자신의 개가 늙어서, 300만 원 주고 구입한 개가 알고 보니 잡종이라서, 갑자기 개가 아파 돈이 많이 들어서, 생각보다 개를 키우는데 품이 들어서, 짖어서, 기분이 나빠서, 술에 취해서, 꼬리를 흔들어서.. 사람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다양한 방법으로 반려동물을 자신의 삶에서 삭제합니다. 여행길 도로 한복판에 버리거나, 찾아오지 못할 먼 섬에 갖다 버리거나, 기분이 나쁘다며 학대를 하거나, 혹은 직접 죽이거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이것이야 말로 인간실격 아닐까요?



이런 인간에게 격이 있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저는 24시간 1년 365일 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이고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에 반하는 경우가 많은 인간이라, 그 멀끔한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에 의해 살이 찢기고 피가 철철 흐르고 사지 중 몇 개가 절단되고 귀가 잘리고, 턱이 나가고, 이빨이 빠지고, 눈알도 빠지고,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똥과 오줌을 흘리는, 그런 녀석들을 보다 보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성악설에 기반한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인간에게 격이 있다니요. 강아지와 같은 높이에 앉아 있다고 인간의 격이 떨어지다니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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