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사랑한 도시, 내가 사랑한 문장을 따라서 떠난 여행
우린 우리의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그저 공간을 떠날 뿐, 떠나더라도 우린 그곳에 남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정도 시작된다. 그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_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2013)> 중
한 권의 책과 한 장의 열차 티켓으로 시작된 여행.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알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에 야간열차를 타고 리스본에 도착한다. 그는 의문의 여자가 남긴 한 권의 책을 단서 삼아, 리스본에 낯선 언덕들을, 오래된 거리들을, 그 모든 문장 속을 정처 없이 헤매기 시작한다.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며, 작가가 남긴 그 문장들 속에 내가, 그가 안내하는 그 장소들 속을 걷고 있을 어느 날의 나를 동경하게 되었다. ‘읽는다는 것은, 낯선 이의 손을 잡고 꿈꾸는 일이다’ 포르투갈 대표작가 페소아의 시의 한 구철처럼, 때로 문장이 가진 힘, 책이 주는 그 마력은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어느 날 16시간의 비행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낯선 도시인 리스본에 꿈처럼 도착했다. 작품 속 그레고리우스를 쫓아 그가 헤매고 다녔을 알파마의 언덕을, 그가 묵었을 법한 숙소 골목을 종일 찾기도 했다. 오래된 거리를 드문드문 내달리는 노란색 28번 트램을, 빛바랜 건물들 사이로 노란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 길을 앞서 걸었을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도 지금 나와 같았을까. 지도 없이, 어떤 목적도 없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소설 속 문장들을 따라 나는 외롭지도 않고 마냥 걸었다. 그러다 골목 한 귀퉁이, 오도카니 노란불을 밝힌 가로등 아래에서 낯선 이 도시로 안내해 준 그의 손을 잡고 동행하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묵었던 숙소 앞. 의문의 여자가 두고 간 빨간 코트를 들고서 그가 막 리스본 한 골목에 도착했다. 사진출처ㅣ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장면
(사진) 그레고리우스를 쫒아 실제로 찾은 골목은 영화 속 장면보다는 덜 쓸쓸했고 어쩐지 친근했다. 검은 고양이가 걸터앉은 창문은 없었지만, 여전히 비스듬히 세워진 표지판을 보고서 왠지 안심이 되었다.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6.13~1935.11.30)
페소아 찾기ㅣ 리스본 곳곳에서 페도라를 쓴 갸름한 턱을 가진 남자를 찾을 수 있다. 그는 1905년 문을 열었다는 리스본의 한 오래된 카페 앞에도, 24시간 동안 트램과 버스 이용이 가능한 교통카드에서도 만날 수 있다. 평생 서로 다른 인격에 75개의 필명으로 활동했던 페소아는 여전히 지금도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선 리스본을 누비고 있다.
페소아의 서랍장ㅣ 페소아가 생의 마지막 15년을 보냈던 집에는 그의 손때 묻은 타자기와 노트, 안경이 그가 방금 전까지도 이곳에 있었던 모양으로 남겨져 있다. 1914년 3월 8일, 페소아는 서랍장에 기대어 <양치기 O Guardador de Rebanhos>, <사선의 비 A Chuva Obliqua>, <승리의 시 O de Triunfal>를, 자신의 대표작인 세 작품 모두를 하룻밤에 완성했다고 한다.
SINCE 1782 ㅣ코메르시우 광장에 위치한 '마르티뇨 다 아르카'는 1782년 문을 연 이래 230여 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이다. 1888년 생인 페소아는 자신보다 백 년을 더 먼저 살아온 이 곳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백 년이 흐른 지금, 서서 훌쩍 마시는 진한 에스프레소는 1유로 남짓. 가벼운 지불로 카페와 페소아가 공존해 온 시간 속에 여행자는 잠시 머무를 수 있다.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1922.11.16 ~ 2010.6.18)
카사 도스 비쿠스 Casa dos Bicosㅣ 사라마구 생의 흔적을 연대기별로 만날 수 있는 그의 기념관 앞에는 2011년 한 줌의 재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유해가 묻힌 올리브 나무가 서 있다. 묘비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용접공으로, 기자를 거쳐 거침없는 사회비판을 하는 '문제적인' 소설가로 일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를 위한 한 구절의 글귀가 남겨져 있다. '지구에 속해 있다면 별로 가지 못한다 MAS NAO SUBIU AS ESTRELAS A TERRA PERTENCIA.'
'만일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사람만 보게 된다면.'ㅣ 『눈먼 자들의 도시』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생전에 자신이 글을 쓴 계기는 '평범한 사람들인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문학 속 인물로 탈바꿈시켜 두 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라고 회고했다.
"몇 시간이 지나 공항 로비의 전광판에서 밝게 반짝이는 리스본이라는 도시 이름을 보고서야 머나먼 옛 시간, 또 다른 인생에서 그 단어가 그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기억해냈다. 산세바스티안을 떠난 후 그가 살았던 모든 도시들이 어쩌면 이제야 결말을 맺을 한 여행의 지연된 에피소드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도망 다니다 마침내 두 시간 후면 리스본에 도착할 것이다. _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 나송주 역 『리스본의 겨울』 민음사 중
리스본은 여전히 많은 작가들이 사랑하는 도시이다. 소설가 존 버거는『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1장 <리스본>에서 죽은 어머니와 해후하는 가상의 공간으로 리스본을, 황인숙 작가는 시집『리스본의 야간열차』에서 동명소설을 읽고 나서 서걱서걱 그대로 남겨져 있는 여운들을 시로 옮겼다. 작품에서 리스본은 공통적으로 아련한 기억의 공간, 언젠가 도착해야 할 그리운 장소로.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된다. 나 또한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해질 무렵 노란 햇살이 리스본의 언덕에 가만히 내려앉으면 도시는 멀고 고요한 골목 속으로, 그 옛스런 시간 속으로 차분히 걸어 들어간다.
리스본의 색 ㅣ황금빛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 거리는 노란 가로등 불빛을 밝히며 도시에 빛을 더한다.
언덕의 시간ㅣ 가파른 언덕을 천천히 오르는 노란 트램의 속도는 때론, 여행자의 시간마저 대책 없이 늦춰버린다. 빈티지한 트램은 자신을 닮은 빛바랜 골목을 유영하듯 천천히 누비며, 도시에 오랜 풍경이 되었다.
변신, LX팩토리ㅣ 1864년 지어진 방직공장 지대가 크리에이터들의 공간으로 변신했다. 그중에 한 곳인 '레르 드바가르 Ler Devagar' 에는 서점의 마스코트인 '자전거 탄 소녀'가 날고 있다. 소녀를 만든 사람은 섬유 기계 관련 일을 하다 은퇴 후 '키네틱 아티스트'로 변신한 백발의 할아버지이다. 어쩐지 리스본을 닮은 노란 책이 눈에 먼저 띄는 서가를 따라 올라가면, 미치도록 탐나는 창의력의 소유자인 백발의 그를 만날 수 있다.
전설의 에그 타르트 ㅣ벨렝 지구에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수녀들의 비밀 레시피를 전수받은 에그 타르트 전문점이 있다. 1837년, 그 달콤한 역사가 시작된 이곳 타르트를 먹으러 리스본에 다시 간다는 사람도 실제로 2명 봤다. 바삭한 타르트를 한입 베어 물면, 노란 커스터드 크림이 쏟아지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시나몬 가루를 솔솔 뿌려먹는 에스프레소로 입을 합치는 것이 핵심이다.
카라코이스의 계절 ㅣ봄에 방문한다면 난생처음 보는 음식을 만날 수 있다. 이 메뉴는 사계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서 메뉴판에서는 찾을 수 없다. 가게문 앞 벌집처럼 생긴 볼록한 노란 그물주머니를 발견한다면, 반쯤 성공! 그날그날 들어오는 제철음식에 현지인들에게도 워낙 인기 메뉴라 아직 남아있다면, 일 년 중 딱 넉 달간 만 먹을 수 있다는 포르투갈식 달팽이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노란 미소의 사람들 ㅣ눈을 마주치는 낯선 이방인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정표를 잃어 잠시 길 위에 어색하게 서 있기라도 하면, 자연스레 눈을 맞추고 먼저 도움을 주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있다. 리스본의 사람들은 때론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천천히 상대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먼저 밝은 표정으로 대답해주며 그 어떤 소통도 즐겁게 이어나갔다. 그 말간 미소가 이 도시를 꼭 닮았다.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중략)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_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중
여행은 때때로 작은 우연에 매혹되어 시작된다. 어느 날 그레고리우스가 야간열차를 타고 느닷없이 리스본에 도착했듯이, 어떤 우연이 나를 '여행'으로 이끌고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소설 속 문장에서 출발한 나의 여행은 그가 봤을 장면과 그 감정들을 천천히 더듬어 가며 어느 순간엔, 나만의 속도로 그 문장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일상의 속도에 쓸려 흩어지던 장면들과 희미하게 남아있던 조각 같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그 형체를 맞춰가는 퍼즐의 한 장면처럼. 나는 여행을 통해 비로소 사랑하는 이 도시와, 선명한 기억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수집하며 여행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은 일상 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아 여행자는 여전히 삶을 여행한다. 그 기록들은 이제 나만의 '마들렌'으로, '나의 리스본'으로 언제고 그곳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글. 사진_ 석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