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정체성을 품은 국내 크래프트 양조장들
오래된 것들이 주목받고 있다. 흔적만 남았던 한옥이 펍이 되고 방치된 양곡 창고가 카페가 된다. 폐허 직전 막걸리 양조장과 부두에서 늙어가던 창고가 맥주 양조장으로 변신하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여전히 재개발 욕망이 태풍의 눈이 되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옛것의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다. 깔끔하고 반듯한, 모던한 것들은 옛날 사람들의 취향이 됐다. 이제 사람들은 높고 번쩍거리는 빌딩보다 낮지만 주위 환경에 어울리는 건물들을 좋아한다.
언제나 시작은 임대료가 낮은 구도심이다. 청년 상인들이 건물세가 싼 골목에 정착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오래된 공간 속에 새것이 뒤섞였지만 이질감은 없었다. 오히려 힙한 기운이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항상 새로운 것을 갈구했던 우리는 왜 낡고 불편한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보다 도시 공동화 문제를 겪었던 미국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여러 연구를 진행했다. 이 분야에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브루클린 대학의 샤론 주킨 교수다. 그녀는 <변화하는 풍광의 힘>에서 중산층 도시 거주자들이 역사적 건물이 제공하는 단순함과 연결성에 환호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예전의 산업 공간들이 진정성(authenticity)을 제공하며 소비를 촉진시킨다고 말했다.
보스턴 대학 자포니카 브라운-사라시노 교수는 <사회보존주의자와 진정한 공동체 탐구>라는 논문에서 ‘사회보존’(social preservation)이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사회보존주의자는 도시에 정착한 경제력이 높은 계층으로 지역 랜드마크나 역사적 건축물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그곳에 거주하는 이유를 역사적 공간에서 찾기 때문에 오래된 공간을 보존하고 소비하려고 한다.
레지나 대학 바네사 매튜스 교수는 도시 변화에 미치는 브루펍의 영향을 연구했다. 그녀는 <중독화되는 젠트리피케이션 : 브루펍과 산업화 이후 유산의 지형>에서 산업환경을 소비환경으로 탈바꿈하는데 맥주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논증했다. 크래프트 맥주 생산과 소비가 과거 산업 시설을 미화하고 도시를 고급화하는데 유용한 모델이라고 설파했다.
이런 논문들은 소비력을 갖춘 중산층이 옛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를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래된 시설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연결되면 소비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청년 창업자뿐만 아니라 공간 기획자들이 구도심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맥주가 이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해왔다. 산업화 흔적이 남아있는 시설이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으로 바뀌며 도시 재개발의 한 축을 담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플로리다 잭슨빌이다. 아름다운 골프 코스와 잭슨빌 재규어스라는 미식축구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마이애미와 올랜도에 비해 콘텐츠가 부족했다.
잭슨빌은 대규모 재개발 사업을 통해 도시 정체성을 변화시키려고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8년에서야 그 답을 찾았다. 크래프트 맥주였다. 역설적으로 보존된 역사적 건축물이 장점이 됐다. 이 지역은 미국 역사보존지구로 지정됐지만 유동 인구가 적었다. 경제력이 있는 중산층들이 소비할 수 있는 것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볼드 시티 브루어리(Bold City brewery)와 인투이션 에일 워크(Intuition Ale Work)가 2008년과 2010년 문을 열며 쇠락해가고 있던 지역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저렴한 임대료가 두 양조장을 구도심으로 불러들였다. 과거 공장 부지였다는 장점도 있었다. 전기와 하수시설이 구비되어 추가적인 비용이 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불리한 조건이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오래된 공간이 맥주와 연결되며 크래프트 맥주를 즐기려는 중산층 소비자들이 유입됐다. 맥주는 옛 흔적을 문화로 표현하는 매개체가 됐다. 그리고 이런 복합적인 환경은 진정성으로 전환되며 도시 정체성을 구축했다.
도시 환경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됐다. 사람들이 몰려들며 거리는 밝아졌고 경찰의 순찰이 잦아지면서 범죄위험이 낮아졌다. 지자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브루어리 디스트릭트’, ‘비어 센트럴’ 같은 별명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비어 패스포트를 제작하며 기차와 연계한 상품도 선보였다. 관심이 떨어졌던 잭슨빌 역사지구가 맥주를 만나 유명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공식적으로 잭슨빌은 크래프트 맥주를 도시 정체성으로 알리고 있다.
한국에는 공간정체성이 드러나는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없을까? 2015년 이후 지역 문화를 맥주와 연결시키는 양조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요한 건, 공간이다. 맥주를 잇는 이야기들이 공간 속에서 숨을 쉬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정성이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느리지만 꾸준히 공간정체성을 맥주에 담아내고 있는 곳을 소개한다.
서울 정동은 개화기 정치와 문화 중심지였다. 아관파천과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상처가 남아있지만 한편으로 서양과 조선이 만나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 곳이기도 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공사관이 들어섰고 선교사들이 신식 교육을 전파하는 문화 도래지였다.
덕수궁돌담길에서 경향신문사로 이어지는 정동 길 주변에는 최초의 개신교회인 제일교회, 한옥을 품고 있는 성공회 성당, 근대 교육의 시초 배재학당, 최초의 여성 학교 이화학당, 러시아 구공사관, 을사늑약의 아픔이 남아있는 중명전,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경교장, 구세군, 신아일보 등 19세기 흔적이 즐비하다.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캐나다, 노르웨이 등 주요 대사관과 정동극장, 서울시립미술관, 경향아트센터 같은 문화 시설도 모여있다.
독립맥주공장은 유관순 열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이화학교 건너, 500살 넘은 회화남무가 굽어보고 있는 이화정동빌딩에 2018년 터를 닦았다. 지금은 자리를 물려줬지만 창업자 엄혁 대표는 정동 문화를 담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맥주를 선택했다.
독립맥주에서 독립은 서브 컬처를 의미한다. 독립영화, 독립음악처럼 주류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철학과 개성을 갖고 있는 맥주라는 뜻이다. 주체성도 상징한다. 천편일률적인 맥주 시장에서 정동 정체성에 어울리는 독립적인 맥주를 만든다는 의미다.
독립맥주공장의 색깔이 잘 드러나는 곳은 공간이다. 개화기 정동 구석에 있던 살롱을 오마주 했다. 입구에는 옛 타자기와 가방, 영사기, 전화기가 놓여있고 전통 맥주잔을 비롯해 정동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커다란 맥주 나무통과 몰트는 이곳이 양조장임을 말해준다.
테이블은 모두 초등학교 나무 바닥에서 가져왔다. 한 땀 한 땀 조립해 만들었다. 개성 가득한 조명도 모두 수제품이다. 버려진 거푸집을 이용해 키치 한 벽면도 구성했다. 중앙에 있는 자작나무는 500살 먹은 회화나무에 대한 헌정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19세기와 21세기가 혼재된 야릇한 느낌을 받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양조장 모습이다. 유리벽으로 내부가 훤히 보이는 양조장은 아마 도시에서 가장 작은 규모가 아닐까 싶다.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로 반짝이는 당화조와 발효조를 볼 수 있다. 양조장에서는 매주 뜨거운 김과 고소한 맥아 향이 흘러나온다.
맥주는 정동을 품고 있다. 시그니쳐 맥주는 정동다반사와 오얏꽃의 꿈이다. 정동다반사는 정동에서 차를 마시듯 평안하고 여유롭게 맥주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망고, 자몽, 구아바 향이 풍성한 IPA로 5.5% 알코올과 부드러운 목 넘김을 자랑한다. 오얏꽃의 꿈은 격동의 세월을 겪은 정동이 다시 평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7% 알코올을 가진 아메리칸 IPA로 망고, 솔, 파인애플 향과 또렷한 쓴맛이 특징이다.
경북 안동시, 낙동강이 보이는 구도심 속에 작은 한옥이 있다. 이곳의 이름은 안동가옥, 1970년대까지는 여관이었다. 이후 팔도불고기회관이라는 식당으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맥주를 파는 펍이 되었다. 여관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공사를 하던 중 천장에서 발견된 숙박명부를 통해 알게 됐다.
안동가옥은 특이하다. 안쪽은 전통 한옥의 모습이지만 바깥 건물은 적산가옥이다. 양준석 대표는 안동가옥의 리모델링을 계획하면서 자신의 손때를 묻히기로 결심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싫었다고 한다. 직원들과 직접 한옥을 개조하며 원래 있던 문과 지붕은 보존하고 19세기 맛을 덧입혔다.
안동가옥이라는 이름도 한옥과 적산가옥의 중의적 의미를 품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부를 잇는 문과 창틀 그리고 지붕은 적산가옥의 냄새가 난다. 조명과 테이블도 개화기 문물 같다. 그러나 안뜰을 지나면 전형적인 한옥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마와 서까래가 훤히 보이고 구들장이 손님을 반긴다.
맥주는 문경에 있는 태평양조에서 가져왔다. 양 대표의 또 다른 보금자리다. 태평양조에서 만드는 맥주는 문경을 담고 있다. 지역 농산물과 부재료가 핵심이다. 와일드 가든 청수는 뒷산에서 채취한 야생효모와 청수포도를 이용해 만들었다. 섬세한 산미 위에 백도, 레몬 그라스 향이 입안을 수놓는다.
인천 신포동은 적산가옥과 차이나타운이 혼재되어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 인천맥주는 그 중심에서 인천 문화를 담은 맥주를 양조하고 있다. 2016년 이곳에 뿌리를 내린 인천맥주는 원래 칼리가리 브루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박지훈 대표는 뒤늦게 지역 맥주가 가진 힘을 깨달았다고 한다. 맥주를 양조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지역성이 크래프트 맥주의 핵심임을 느꼈다고 했다. 양조장이 있는 공간은 원래 보세창고였다. 그 뒤, 술집, 나이트클럽, 그릇 보세창고로 사용되다 맥주가 탄생하는 곳으로 거듭났다.
인천 맥주는 사명을 변경하고 인천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극장 간판을 그리던 최명성 어르신을 모델로 내세워 개항로라는 맥주를 출시했고 지역 이벤트를 적극적으로 개최했다. 현재 인천맥주는 칼리가리에서는 전달되기 힘들었던 진정성을 찾으면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성수동의 작은 목공소가 브루펍이 됐다. 어메이징 브루어리는 목공소였던 이곳을 양조장으로 바꾸며 이 기운이 최대한 맥주에 이전되기를 원했다. 빨간 벽돌과 지붕과 벽을 받치고 있는 나무 프레임은 여전히 어메이징에 남아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반짝이는 양조 장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규모는 매우 작다. 하지만 덕분에 개성 있는 맥주가 생산된다. 수십 개의 맥주 탭도 흥미롭다. 성수동의 맥주 성지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회전이 빠르기 때문에 맥주도 신선하다.
성수 어메이징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맥주는 성수동 페일에일이다. 캔 라벨은 양조장 입구에 늘어선 오래된 빨간 벽돌로 되어 있다. 이 맥주의 진정성은 탄생 스토리에 있다. 성수동 주민들이 동참한 레시피로 탄생했다. 주민들의 손길이 들어있는 맥주라. 성수동 페일에일보다 성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맥주가 있을까. 맥주가 자아내는 섬세한 자몽과 오렌지 향 그리고 가벼운 바디감은 편하지만 우아하다.
맥주와 공간이 전하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면, 왜 주저하는가. 봄 햇살을 받으며 잔을 맞대보자.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