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피에서 맘다니까지 아메리칸 사이코로 뒤틀어 보는 크래프트 맥주
누가 드라이 맥주를 시켰어? 위스키를 주문했어야지
단정하고 매끈한 머리, 고급스러운 슈트, 삐딱한 자세로 앉아 술과 담배를 들고 있는 남자들. 지적이고 엘리트의 풍모가 넘치지만 거들먹거리는 말투와 눈빛에 허영이 가득하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 베이트먼, 어젯밤 뉴욕 한복판에서 시민과 경찰을 살해한 후, 변호사에게 그간 저지른 수많은 살인을 자백한 채 이곳에 막 도착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모두가 평화롭다. 자신의 변호사는 베이트먼의 자백을 농담으로 취급하고, 동료들은 어제 회사 근처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모른 채 하는 건가? 모두 꿈이었던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패트릭 베이트먼, 27살, 하버드 졸업. 뉴욕 월스트리트 ‘피어스&피어스’ M&A 담당 부사장, 맨해튼 최고급 아파트 거주. 짙은 눈썹에 푹 들어간 눈, 작은 얼굴에 군살 하나 없는 조각 같은 몸을 가진 그는 매일 새벽 운동 후 최고급 세안제와 안티에이징 크림을 바른 뒤 아르마니 슈트를 입고 출근한다.
점심 식사로 100달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며 저녁 약속을 위해 매일 최고급 파인 다이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약한다. 단 한 곳, 전설의 레스토랑, 도르시아를 제외하고. 베이트먼은 도르시아 예약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마커스 할버스트럼으로 헷갈리는 폴 앨런이 도르시아 예약에 성공했다는 우쭐거림을 듣는 순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열등감에 휩싸인다.
2000년 개봉한 아메리칸 사이코의 배경은 1987년 뉴욕 월스트리트. 영화 속에서 과시와 허세에 찌들어 있는 젊은 백인 남성은 여피들이다. 여피(Yuppie)는 ‘Young Urban Professional‘의 약자다. 80년대 도시에서 성공한 젊은 전문직 계층을 가리킨다.
70년대 진보 바람이 불었던 미국은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베트남 전쟁의 국가적 모멸감을 만회하기 위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백인 가정을 이상적으로 선전하고 미국 패권주의를 앞세운 신보수주의를 강화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감세, 규제 완화, 공공부문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지향했다. 그 결과, 미국 사회는 국가 간섭의 최소화 속에 무한 경쟁과 소비문화를 추구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정글로 변했다.
이런 경제적 자유화와 주식 시장의 호황 속에서 뉴욕 금융계를 중심으로 젊은 고소득 엘리트 전문직이 등장했다. 이들은 자유시장과 경쟁을 찬양하고 소비를 미덕으로 여겼으며 대도시 중심가 최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명품 정장과 시계, 고급 레스토랑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았다.
여피라는 단어는 1983년 시카고 매거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70년 대 반문화와 저항을 외쳤던 히피와 대조되는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는 별칭이었다. 1984년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밥 그린과 사회학자 댄 로텐버그는 여피를 히피에서 태어났지만 저항보다 이익을 택한 계급으로 정의했다.
이들의 분석처럼 여피와 히피는 같은 세대였다. 70년대 히피였던 세대가 80년대 들어 여피로 탈바꿈된 것뿐이었다. 여피 안에는 체제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었던 세대가 시장 안의 자유를 추구하는 세대로 변했다는 역설이 들어있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도 이런 의미들이 반복해서 드러난다. 베이트먼이 자신의 것보다 월등한 폴 앨런의 명함을 본 후,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그를 살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식사 후 자신의 집에 데려온 폴 앨런을 살해하기 전, 베이트먼은 팝가수 필 콜린스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필 콜린스는 70년대 프로그래시브 락 그룹 제네시스의 리더였다. 실험적 색채가 강했던 그의 음악은 80년대 들어 말랑한 소프트 락으로 변절했다. 베이트먼은 폴 앨런에게 제네시스 시절 필 콜린스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가수라며 음악을 틀어준 뒤 도끼로 살해한다. 히피와 여피의 역설을 향한 감독의 의도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사이코 패스의 가면을 벗은 뒤, 베이트먼은 점점 더 노골적인 행보를 이어간다. 폴 앨런을 죽인 것이 열등감과 경쟁심에 대한 복수였다면 뉴욕 뒷골목 노숙자의 살인은 경쟁에서 탈락한 루저를 향한 단죄였다. 노숙자를 살해하기 전, 베이트먼은 그에게 왜 직업을 가지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회 안정망 밑으로 추락한 책임을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며, 결국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였다.
낮에는 사회 문제와 비즈니스를 논하고 누구보다 배려심 많은 엘리트지만 밤에는 살인과 매춘 그리고 마약을 일삼는 두 얼굴의 사나이, 패트릭 베이트먼은 레이건 시대의 극단적 표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래프트 맥주는 여피의 시대에 태어났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홈브루를 합법화하자 대량생산 ‘라거’에 반기를 든 젊은 양조사들이 등장했다. 이들이 시도한 맥주는 미국 홉을 넣어 개성적인 향미를 품은 ‘에일’이었다. 소량으로 생산해 비싸고 품질도 들쑥날쑥했지만 기존 맥주에서 볼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었다.
1975년 앵커 브루잉의 프리츠 메이태그가 출시한 리버티 에일을 필두로 1980년 시에라 네바다의 캔 그로스먼이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을, 그리고 뉴 알비온의 잭 맥얼리프가 뉴 알비온 에일을 출시하며 새로운 맥주 시대가 도래했음을 천명하고자 했다.
이런 크래프트 맥주의 배경에는 히피 정신이 들어 있었다. 프리츠 메이태그, 캔 그로스먼, 잭 맥얼리프는 버드 와이저, 밀러 같은 기득권 라거에 저항하는 반문화 정신을 맥주에 녹여내려고 했다. 하지만 히피스러운 맥주 탄생 뒤에는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회학자 니콜 베컴은 크래프트 맥주 논문집 언탭드(Untapped)에서 이를 ‘기업가적 여가‘라고 정의했다. 그녀는 크래프트 맥주가 “대기업 맥주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안에서 발전했다”라고 지적하며 취미로 시작한 홈브루가 시장의 논리 속에서 사업으로 성장했다고 설파했다. 히피의 정신을 품었지만, 레이건의 철학이었던 자율, 경쟁, 책임의 미학이 크래프트 맥주의 실질적인 토양이었던 것이다.
찬란한 미래를 꿈꿨지만 시장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움직였다. 대중에게 맥주는 청량하고 저렴한 술이었다. 비싸고 익숙하지 않은 향미를 내는 맥주는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보보스(Bourgeois Bohemians)라는 신세대였다.
보보스는 여피의 자본과 히피의 정신을 이은 새로운 계층이었다. 80년대 말 여피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미국 뉴욕 증시가 하루 만에 20% 이상 폭락하며 1조 7100 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다. 우리가 흔히 ‘블랙 먼데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으로 여피는 종말을 맞았다.
레이건의 시대가 저문 1990년,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조의 젊은 엘리트들이 나타났다. 실리콘 밸리에서 IT 성공으로 큰 부를 이룬 이들은 초기에는 테크 여피로 불렸지만, 이후 보보스로 구분되었다.
여피와 보보스의 가장 큰 차이는 소비였다. 여피가 ‘얼마나 버는가’로 자신을 증명했다면, 보보스는 ‘어떻게 쓰는가’로 자신을 증명했다. 보보스는 부를 소유했지만 단순한 부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과소비보다 자신의 가치에 맞는 소비를 추구했고, 럭셔리 대신 진정성에 관심을 가졌으며, 대량생산 대신 장인정신이 깃든 상품을 구매했다. 또한 공공성에 냉소적이던 여피와 달리 로컬, 환경,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위스키와 와인 대신 지역성을 중시하는 샌프란시스코 크래프트 맥주를 손에 들었다. 보보스는 여피에서 태어나 히피의 옷을 입은 존재들이었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히피의 정신으로 탄생한 크래프트 맥주는 여피와 보보스의 틈에서 ‘혁명을 판매’하며 살아남았다. 반문화와 자본의 공존, 이야말로 크래프트 맥주의 역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미국 민주당 후보 맘다니가 뉴욕 시장으로 당선됐다. 34세 무슬림이자 민주사회주의자인 그는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전 뉴욕시장 앤드류 쿠오모를 무려 100만 표 차로 따돌렸다. 맘다니의 당선은 공화당뿐만 아니라 기존 민주당 기득권에게도 충격을 던졌다. 그가 내건 공약들, 아파트 임대료 동결과 부유층 세금 인상 등을 막기 위해 뉴욕 부유층들이 낙선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젊은 세대들의 투표 열정은 막지 못했다.
나에게 맘당선은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아니라 미국식 자유를 뒤엎은 혁명처럼 느껴졌다. 개인의 자율과 시장의 활력을 내세운 레이건의 자유는 실제로는 공동체의 해체,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뿌리 깊이 심어버렸다. 크래프트 맥주는 그런 자유 속에서 태어나 시장 논리 안에서 성장한 부산물이었다. 히피 정신은 자본이 선택한 또 다른 탈출구였고.
트럼프의 자유는 신자유주의의 그늘에서 자란 독버섯이다. 그는 자유를 외쳤지만, 공동체의 회복보다 배척과 불평등을 판매했다. 미국의 민주당 또한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맘다니는 이런 극단성과 모호성 사이에서 고통받던 시민들의 불가피한 선택 아니었을까?
이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폴 앨런을 살해했다는 자백에 변호사는 지난주에 런던에서 두 번이나 식사를 했다며 자리를 벗어난다. 베이트먼의 비서 진은 그의 노트에서 모든 살인 행각이 담긴 그림을 발견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것들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별할 방법은 없다.
진실은 사라지고 무감각한 소비, 무한한 경쟁, 과시와 허세 속에 결국 남은 것은 공허뿐. 베이트먼의 마지막 대사는 인간보다 자본을 숭상했던 레이건 시대의 속살이다. 미국 사회는 여전히 그 연장선에서 극단적 자본주의를 원동력으로 위태롭게 항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며 어떤 맥주가 어울릴지 떠올려본다. 스톤(Stone) IPA, 1990년 대 후반 샌디에이고에서 등장한 이 맥주의 모토는 “이 맥주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This beer is not for you)”였다. 대기업 라거의 획일화된 맛에 대한 도전이자, 소비자의 취향을 되찾으려는 선언이었지만, 동시에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브랜드가 되었다.
자유의 이름으로 경쟁을, 진정성의 이름으로 성공을 좇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묻는다 — 이 고백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